소설리스트

마녀와결혼하는법-5화 (5/18)

5장

엘렌은 창가에 서서 마을의 공터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조프리를 바라보았다. 혹독하게 춥던 겨울이 지나고, 3월의 날씨는 금세 따스해졌다. 그는 장부를 들여다볼 때처럼 진중하게 훈련을 시켰다. 엘렌은 그가 병사들을 쉽게 지휘하는 것을 놀라서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일에 능숙했다. 그가 나에게도 저토록 열중해서 관심을 쏟는다면 어떤 기분이 될까?

“날씨가 풀리는가 봐요.”

서얼의 낮고 뾰로통한 목소리가 들리자 엘렌은 흠칫했다. 조프리에게만 정신이 팔려서 집사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나약함에 화가 났다. 그에게 이렇게 정신을 파는 것만 보아도 조프리에게 흔들렸다는 또 다른 증거였다. 그것이 못마땅했다.

“조프리 성자께서 빌던 대로 봄을 일찍 맞을 것 같군요.” 서얼이 말했다. 엘렌은 집사가 남편의 별명을 부르자 바보처럼 화가 났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경멸을 읽자 그의 속셈이 뭔지 궁금했다. 내가 그를 경멸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왜 그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을까. 그들의 적개심은 부당할 뿐 아니라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평하지 않다고? 내 인생부터가 공평한 적이 없었잖아. 세상이 공평하다면 죽음의 손길은 어머니를 앗아갈 수가 없어. 이 끔찍한 장원에 내 편 하나 남겨 두지 않고. 둘러봐도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피한다 해도 내가 무슨 상관이람.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서얼을 보았다. “고고하신 성자라서 계절까지 마음대로 주무르는 모양이지.” 그녀가 빈정거렸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지만 조프리에게는 그 외에도 두려운 능력이 많아 보였다.

“신을 모욕하는 거예요, 아가씨? 에드레드가 들으면 못마땅해하겠군요.”

엘렌은 무뚝뚝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드레드는 무슨 일이든 꼬투리만 잡으면 잔소리를 했다. 엘렌은 여자는 선천적으로 악마적인 존재라는 에드레드의 말을 믿지 않았다. 늘 자애롭고 부드럽던 어머니 같은 사람도 있잖은가. 전에 봉직한 신부는 그런 악의 있는 설교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진정한 성직자로서 아버지에게 수없이 맞섰고, 결국 그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녀가 아끼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씁쓸한 기억을 떨쳐 버리고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조프리와 수석 기사가 육척봉이라는 무기를 들고 대적하고 있었다. 문득 조프리가 평소와 달리 더욱 강인해 보이고 더욱 두려웠다.

“저러다 몽고메리가 죽일지도 모르겠군요.” 서얼은 듣기 거북할 정도로 기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아가씨는 미망인이 될 수 있죠.”

엘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슨 뜻일까? 누군가 조프리를 죽일 계획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남편에 대한 애정은 없지만 만일 그가 죽으면 자신은 금세 다른 남자에게 넘겨지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돌아보면서 단도에 손을 대고 낮게 쏘아붙였다. “그를 죽이는 건 나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입조심하라구. 안 그러면 당신부터 죽여 줄 테니까.”

서얼은 건방지게 절을 하고 물러갔다. 엘렌은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단도를 쥔 손이 축축하고 손가락이 뻣뻣했다. 누군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조프리가 갑자기 무척 근사해 보였다.

그는 훈련을 위해 가벼운 웃옷만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체격을 바라보았다. 웃옷만 입은 모습을 여러 번 보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라 보였다.

그는 몽고메리처럼 덩치는 크지 않았지만 탄탄하고 날렵했다. 엘렌은 평소 기사들의 훈련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조프리가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그의 움직임은 유연하고 우아했다. 훈련 삼아 시작한 싸움이 점점 더 치열해지자 그의 웃옷이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서 근육이 씰룩거리는 것이 보였다.

평소에는 혐오스러웠는데 지금은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토끼가 뱀에 홀려 꼼짝 못하는 것처럼. 전에는 남자, 전쟁, 기사, 그리고 그들의 우쭐대는 모습이 역겨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모습에 홀려 못 박힌 듯이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의 이마와 목덜미에 땀이 번들거렸다.

그때 조프리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검은 머리칼이 묵직하게 흔들렸다. 엘렌은 그의 남자다운 체취를 들이마시려는 듯 코를 벌름거렸다. 갑자기 말라 버린 입술을 혀로 축이면서 온몸을 치달리는 묘한 감각에 혼란스러워졌다. 이름 모를 병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노곤하고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었다.

그 동안 머리 속에서 몰아내려 애쓴 장면이 생생하고 자세하게 떠올랐다. 마구간에서 조프리의 밑에 깔려 있던 장면이...... 그는 자신을 마구잡이로 누르지 않고 단단한 근육으로 감싸안으면서 입술을 가져왔다.

그의 입술 감촉은 생전 처음 맛보는 것이었다. 아찔하고 따스하고 경이로운 감촉......

엘렌은 요란하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창에서 몸을 돌리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왜 이러지? 요즘은 자신이 다른 사람 같았다.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는 것보다 그런 자신이 오히려 두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고함 소리가 들렸다.

훈련으로 시작한 시합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주민들과 농노들 여럿이 병사들 속에 끼여들어서 열광하며 구경하고 있었다. 조프리와 몽고메리의 싸움에 이 영지의 지배자가 결정되기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조프리가 상대에 걸려서 넘어질 뻔 하자 엘렌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몽고메리의 배신적인 행동에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웨섹스 성과 전투를 벌인 뒤에도 살아남은 가장 우수한 기사였다.

몽고메리는 조프리를 쓰러뜨리는 데 혼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넘어졌다가 다시 뛰어일어나 조프리의 목에 봉을 찔렀다. 목이 잠긴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엘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프리는 간신히 봉을 피하고 몽고메리의 가슴에 봉을 찔러 싸움을 끝냈다. 몽고메리가 순순히 항복하지 않을 것 같은 직감이 들어 그녀는 칼을 움켜쥐었다. 몽고메리가 남편을 죽이게 할 수는 없어! 절대로! 마침내 몽고메리가 항복하면서 미움이 가득한 눈으로 조프리를 노려보는 것을 보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몽고메리가 일어나서 저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녀는 단도를 잡은 손을 풀었다. 하지만 조프리가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장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경계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그가 안뜰에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오는 동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북적거리는 틈을 타서 누가 칼을 꽂을 수도 있어. 그녀는 문으로 걸어가면서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그를 보호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이롭다고 속으로 타일렀다. 그의 속셈이 뭔지는 몰라도 그는 다른 남자들보다 대하기가 쉬웠다. 이름 모를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느니 그와 부부인 편이 바람직했다.

그가 홀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그의 무모한 짓을 욕해 주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하인의 손에서 리넨 수건을 받아 땀을 닦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혀가 붙어 버렸다. 그녀는 목이 잠긴 채 그가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있는 것을 모르는지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도통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 침실로 들어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두 팔을 들어 올려 땀에 젖은 웃옷을 벗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그의 등 근육을 바라보자 숨이 막혔다. 그의 등은 탄탄하고 널찍한 황금빛이었다. 그녀는 열병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달아올랐다. 불안이 온몸을 헤집고 그 뒤로 뭔가 다른 것이, 유혹적이지만 위험한 감각이 그녀를 덮쳤다. 눈에 물기가 핑 돌았다.

그때 문득 그가 돌아서자 검은 털로 덮인 맨 가슴이 드러났다. 그녀는 무릎에 맥이 풀릴 뻔했다. 가운데 털이 가장 짙었다. 엘렌은 손을 뻗어 그를 어루만지고 싶은 기묘한 충동에 시달렸다. 손가락으로 그 털 속을 헤집고 싶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그의 가슴에서 억지로 눈을 떼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엘렌?” 그의 깊고 따스한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것을 들키자 바보가 된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무심코 한 손으로 가슴을 문지르자 그녀는 다시금 그 넓은 가슴에 눈길이 갔다. 그의 손가락이 가슴의 윤곽을 쓰다듬고 있었다. 자신더러 그렇게 하라고 재촉하는 듯이. 갈증이 그녀의 살갗으로 속속 스며들었다. 뜨겁고 유혹적인 갈증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갈증을 떨어냈다. 온몸을 덮치고 있는 기묘한 무기력증과 함께.

“몽고메리가 당신을 죽일 거예요.”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이 허리로 내려가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눈길은 길고 늘씬한 그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크고 따스한 손.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보통 남자들이 그렇듯이 오만한 어조의 낮은 목소리를 듣자 엘렌은 순식간에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났다. “사람들이 뭐라 부르든 간에 당신이 정말 성자는 아니잖아요. 당신은 그저 인간이라구요. 가슴에 칼이 박히면 죽는 건 마찬가지예요.”

그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했다. “몽고메리를 믿지 못할 이유가 있소?”

이유?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나한테 남자를 믿지 못할 이유를 대라고? 그녀는 경멸이 담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는 당신을 죽이고 싶어해요.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등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자 엘렌은 홱 돌아섰다. 하인들이 오래된 욕조를 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하인들은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영주님.” 어린 남자 하인이 말했다. 하인들은 깊숙이 절을 하면서 엘렌의 옆을 지나갔다.

목욕물. 엘렌은 욕조를 바라보다가 조프리를 바라보았다. 조프리도 어두운 눈길로 그녀의 눈길을 마주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내이자 여주인으로서 그녀는 그를 목욕시켜 주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의무를 실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그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은 어떨까 궁금해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저 무성한 털은 어디까지 내려갈까? 긴 다리도 역시 근육으로 단단할까? 그의 엉덩이도 다른 데처럼 황금빛일까? 그리고.....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신음 소리를 냈다. 벌거벗었든 아니든 난 이 남자한테 아무 관심 없어! 이 남자를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그녀는 일부러 경멸하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는 그녀의 결정을 기다리는 듯이 참을성 있게 서 있었다. 힘차고 당당하고 아름다운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자 조프리. 늘 완벽하시군. 하지만 난 잘빠진 몸매도 사근사근한 태도도 아무 관심없어! 그녀는 뒷걸음질치면서 욕설을 퍼부어 주려 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의 앞에만 서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도 그랬다. 그녀는 욕설을 삼키고 돌아서서 씩씩거리며 방을 나갔다.

조프리는 그녀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내가 헛것을 본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정말 나를..... 흥미롭게 쳐다본 걸까? 만약 그렇다면 왜? 마구간에서 사고처럼 키스를 나누고 난 뒤부터 엘렌은 나에게 온전하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마주치는 일도 줄어들었지만 막상 만나도 전보다 더욱 사납게 굴었다. 그래서 나 역시 될 수 있는 한 그녀를 피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만남은 분명 이상했다. 그녀는 마치...... 아니지. 그는 손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착각이야. 그녀가 내 몸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어디다 칼을 꽂으면 가장 좋을지 궁리하기 위해서라구!

그런데 몽고메리에 대한 경고는 무슨 뜻일까? 그녀는 분명 강력한 어조로 경고했다. 자신의 입으로 걸핏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했으면서 왜 위험을 알려 준 것일까?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경고를 무시해 버릴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몽고메리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가 왜 그렇게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 그에게 월터 에이버리의 뒤를 이을 욕심이 있는 건 아닐까? 조프리는 엘렌이 다른 남자와 있는 생각만으로도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지금 생각하니 월터 에이버리가 엘렌의 손에 죽은 것이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점잖지 못한 생각을 한 자신에 놀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맙소사, 나도 내 아내처럼 피에 굶주려 가는 건 아닐까?

몽고메리는 웨섹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두고두고 분통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새로 온 영주를 몰아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혹시 여주인의 도움을 받아서 나를 몰아내려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스러져 버렸다. 엘렌이 남자와 공모하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서도 음모를 꾸밀 능력이 충분한데 뭣하러 그런 짓을 하겠는가......

엘렌이 몽고메리를 없애 버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생각도 지워 버렸다. 엘렌이 몽고메리를 없애 버리고 싶은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기사도 얼마 없는데. 그는 한숨을 쉬었다. 몽고메리 같은 기사를 잃고싶지 않았다.

그러자 몽고메리의 얼굴에 떠올랐던 증오심이 생생히 기억났다. 훈련을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흥분하는 일이 종종 있고 부상을 입는 일도 많지만 갑작스럽게 봉을 찔러 오던 몽고메리의 행동은 분명 고의였다. 너무 아슬아슬했기 때문에 더욱 불안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때늦은 후회보다는 안전한 쪽을 택해야겠지. 엘렌의 말이 옳아. 몽고메리의 눈빛은 뭔가 꺼림칙했어.

조프리는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잠에서 깼다. 옷을 입은 채 잤기 때문에 겉옷만 걸치고 칼을 차는 것으로 차비가 끝났다. 그는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엘렌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금살금 침대로 걸어가 엘렌을 내려다보았다.

자고 있는 동안은 그녀도 무방비 상태였다. 격한 성미로 사랑스러운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했지만 지금은 그 격한 성미도 평화로운 잠 속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다. 조프리는 너무나 달콤하고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놀라서 숨이 막혔다. 계피색 속눈썹이 부드러운 뺨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입술은 살짝 벌리고 있었다. 조프리는 그 입술에서 맛본 쾌락을 생생히 기억해 냈다. 짜릿하고 자극적인 쾌감을 생각하자 유혹이 생겼다.

엘렌이 몸을 뒤척거렸다. 숱 많은 머리칼 밑에서 갈색 드레스를 입은 어깨가 드러났다. 조프리는 이마를 찌푸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옷을 입고 자고 언제까지 무장을 해야하지.....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렇게 굽어보고 있는 것을 들키면 그 곤경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닌데. 그는 한 번 더 그녀를 바라보고 나서 문으로 걸어가 몸종 소년을 조용히 불렀다.

오랫동안 몸종 일을 해오던 청년이 지난 가을에 기사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오스버트라는 소년이 새로 왔다. 조프리의 형제들은 캠피온 성에서 몸종을 데려가라고 다그쳤지만 조프리는 이 장원에 사는 사람 가운데서 고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과연 현명한 처사였는지 의심스러웠다. 오스버트마저도 경계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그는 쓴 미소를 머금고 오스버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몽고메리의 말을 준비시켜라. 마구간에서 그의 물건들을 모두 집어내.”

소년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두운 복도를 달려나갔다. 조프리는 소년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대결의 순간에 대비해 각오를 다졌다. 적을 치려면 적의 힘이 가장 약할 때 쳐야 한다. 그래서 일부러 몽고메리가 자는 시간을 골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홀 바닥에 잠든 하인들을 지나 지하실로 내려갔다. 기사들이 살고 있는 원형 지붕의 지하실이었다. 몽고메리가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부츠 신은 발로 그를 깨웠다.

몽고메리는 몸을 일으키면서 욕설을 투덜거렸다. 속옷 차림이었지만 조프리는 그가 옷을 입게 놔두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몽고메리에게 손짓해서 홀 안으로 올라가게 했다. 여기저기서 하인들이 잠을 깨고 있었다. “자네 말을 준비시켜 놓았네. 날이 밝는 대로 여길 떠나게.”

몽고메리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농담이시겠지.”

“농담이 아니야. 난 자네 같은 기사의 도움은 필요 없네. 장원은 물론이고 내 영지에서 아주 떠나게. 내 형이자 웨섹스의 남작인 던스탄의 땅에도 발 디딜 생각 말고.”

조프리의 강한 어조에 비로소 사태를 깨달은 몽고메리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날 쫓아내지는 못할걸!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다구, 이 어리석은 양반아! 나 아니면 누가 문을 지키고 이런 오합지졸을 이끌어 주지?”

“반항할 생각 마.” 조프리는 칼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영주로서 내 집 문은 내가 지킨다. 그리고 난 진정에서 우러나는 충성의 맹세를 하는 자만 데리고 있을 것이다.”

몽고메리는 격분했다. 무기를 꺼낼 수만 있다면 꺼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었다. 그는 홀 안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하지만 홀 안에는 하인들만 가득했다. 자신의 몸종도 보이지 않았고 반역에 가담할 다른 기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험악한 욕설을 뱉으면서 몸을 돌렸다.

“꼼짝 마라.” 조프리가 말했다. “몸종을 불러서 필요한 것을 가져오게 하겠다.” 그는 돌아오는 오스버트에게 손짓을 해서 몽고메리의 몸종을 부르고 몽고메리의 소지품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몸종이 와서 몽고메리의 발치에 무기와 옷들을 쌓아 두자 몽고메리는 즉시 칼에 손을 뻗었다.

“그건 지금 필요가 없지.” 조프리가 나직이 말했다.

몽고메리는 분노와 미움으로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다 쓰러져 가는 이런 장원말고는 갈 곳이 없을 줄 알았나?” 그는 서둘러 튜닉과 부츠를 신으면서 조롱했다. “더 돈 많은 영주를 찾아낼 테니까 두고 보라고. 특히 당신과 적인 사람 가운데서 찾으면 좋겠지, 드 부르그. 그런 다음에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가 협박했다. 그러고는 몸종을 향해 뒤를 따르라고 소리치면서 홀을 나갔다. 하인들이 숨을 죽인 채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몽고메리가 자신의 땅을 떠나는 것을 확인할 생각으로 쫓아가려는데 등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엘렌이 서 있었다.

“당신 미쳤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이 충고해 준 대로 몽고메리를 추방하는 중이지.” 조프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 충고라고......” 그녀는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프리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고 그녀는 다시 화가 났는지 그를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어리석어요, 당신은 죽을 뻔했어요!” 그녀는 팔을 휘둘러 홀 안을 가리켰다. “하인들밖에는 없잖아요. 당신을 보호해 줄 기사도 병졸도 없단 말이에요! 당신 등뒤를 경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녀의 심상치 않은 어조가 그를 놀라게 했다. 그는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협박하듯이 단도 손잡이에 손을 대고 있었지만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정말 죽고 싶은 거예요?” 그녀가 소리쳤다.

“내가 죽으면 슬퍼할 거요?” 조프리가 물었다.

그 말에 그녀는 멈칫 섰다. 그녀는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다시 그를 노려보았다. “천만에, 좋아서 춤이라도 출 거예요!”

“그렇다면 뭣 때문에 내 등을 그렇게 걱정하는 거요?” 조프리가 물었다. 그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자신의 목숨이 그녀에게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잠깐 밝아졌던 기분은 곧 사그러들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경멸조로 코웃음치면서 턱을 뺐다. “내가 죽이기 전에 누가 먼저 당신을 죽이면 내가 지고 마니까 그러는 것뿐이에요, 드 부르그!” 그녀는 그 말을 내뱉고는 홱 돌아서서 달려나갔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채가 등뒤에서 경쾌하게 흔들렸다.

기묘한 실망감이 밀려들었지만 그녀의 빈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그릇을 던진 것 말고는 그보다 심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분통이 터졌는지 엘렌이 그의 등 뒤 벽에 단도를 던졌다. 분명 그를 맞히려고 던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악명 높은 솜씨를 확인시켜 주려는 듯 했다. 홀 안에 정적이 내려앉으면서 모두들 그가 어떻게 할 것인지 기다렸다.

하인들은 그가 곧 복수를 하리라 예상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머리에 가려진 얼굴은 작고 창백해 보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여기서 보고있는 사람들의 판단이 달라질 것이고 그 말은 곧 여기 없던 사람들한테까지 퍼질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단도가 꽂힌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 나서 눈부시게 빨리 단도를 뽑아 들고 엘렌에게 걸어갔다. 엘렌은 꼼짝 않고 서 있었지만 도전적인 자세 너머로 긴장한 표정이 엿보였다.

“이걸 떨어뜨린 것 같소, 부인.” 그는 딱딱하게 말하면서 칼을 건넸다.

그녀의 손이 조금 떨리는 듯하더니 손을 내밀어 칼을 받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마주치면서 그는 후끈한 열기가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손을 홱 빼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포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러고는 방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한결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 부부 사이에 혈투가 벌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안도하는 한숨이었다.

이번 만큼은 안심해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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