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와결혼하는법-4화 (4/18)
  • 4장

    그는 의혹을 뿌리치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다음 집사를 돌아보았다. “서얼, 장원 안을 둘러보고 싶네. 주방과 마을 사람들이 사는 집도 봐야겠고. 그런 다음에 영지 내의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으게. 할 말이 있으니까.” 그러고는 집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엘렌을 돌아보았다. “같이 가겠소?”

    엘렌은 조프리를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조프리는 한숨을 쉬면서 그녀의 뒤로 걸음을 옮겼다. 특별히 위험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녀 앞으로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서얼은 그를 장원의 주방으로 안내했다. 주방 역시 장원 구석구석과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하인들에게 주방을 물로 닦아내라고 시키고 일을 잘하면 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고는 엘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흘끗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에 흘러내린 짜증나는 머리칼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날카롭게 지켜보면서 그녀가 장원의 여주인 역할을 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하인들도 모두 서얼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엘렌에게 절을 하면서 뒷걸음질쳐 멀찌감치 물러났다. 모두들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표정에 마음이 불편했다. 캠피온 성에서는 하인들과 사이 좋게 지냈는데.....그런데 이곳에서는 하인들이 원수 대하듯 했다. 언짢은 기분을 떨쳐 버리려고 입을 열었지만 헛기침만 나왔다. 이 모두를 변화시키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리라.

    끝까지 인내하겠다던 조프리의 결심은 성안의 식품창고를 둘러보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애처로울 만큼 빈약한 식품들을 바라보면서 큰소리로 욕설을 토했다. “이게 다라구?” 그는 집사를 돌아보았다. “누가 책임자지?”

    “접니다, 영주님.” 서얼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겨울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어떻게 백성들을 먹여 살리지?”

    “죄송합니다. 전쟁으로 생필품이 바닥났습니다.” 서얼이 설명했다. “포로가 되었던 기사들 몸값을 치르고 나니 금고도 바닥났구요.”

    조프리는 다시 욕설이 튀어나가는 것을 겨우 참았다. 웨섹스 성과 싸운 손해가 생각보다 심한 것 같았다. 영지를 재건해서 번영시키겠다는 계획은 둘째치고 일단 먹을 것부터 챙겨야겠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캠피온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해야지. 기분이 찜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웨섹스 성이 더 가깝긴 해도 그곳도 남을 도와 줄 만큼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조프리는 한숨을 쉬었다. 무거운 책임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던스탄도 이런 책임감 속에 고심했을 테지. 형의 괴로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짐이 무겁다고 휘청거리지 않았다. “남은 것이 무엇인지 목록을 봐야겠네. 이곳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명단하고.”

    서얼은 투덜거릴 듯한 얼굴이었지만 금세 머리를 조아려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그가 주저하는 것을 보니 이제까지 장원 안에서 장부 기록이 제대로 되어 왔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서얼, 회계 장부도 보고 싶네.”

    집사는 알았다는 듯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밖으로 나갔다. 조프리는 뒤로 물러서서 엘렌이 먼저 창고를 나가게 했다. 그녀가 왜 그 동안 장원의 여주인 역할을 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그녀가 머리 나쁜 것이 들통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맡게 된 걸까? 누가 이곳을 관리했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엘렌이 한다 해도 더 이상 나쁠 수 없을 정도였다.

    엘렌의 뒤에서 걸어나오던 그의 눈길은 숱 많은 그녀의 머리채에 머물렀다. 물론 결혼한 여자라면 머리 장식으로 머리를 가리고 다녀야 마땅하지만 엘렌은 관습 같은 것에 얽매일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얇은 머리망에 감추어진 머리를 상상하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머리망 안에 넣기엔 너무 숱이 많았다. 땋아 내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이 직접 머리를 땋아 주는 상상을 했다. 숱 많은 머리채를 두 손에 쥐고서. 그러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걸이에 따라 머리채가 흔들렸다. 긴 끄트머리가 드레스 허리 아래를 스치고 그 밑으로는......

    그는 얼른 눈을 돌려 차가운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행은 양조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참이었다. 하지만 양조장 일꾼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머리 속은 그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사람들이 내민 맥주를 맛보자 조금 밍밍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맥주 맛이 밍밍한 것은 뭔가 수상한 것이 들어가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 성의 분위기 때문에 괜스레 머리 속까지 이상해져서 의심만 많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엘렌에게 자꾸 관심이 가는 이상한 현상도 그렇게 생각하면 설명이 되는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엘렌은 구석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조프리를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종종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종종 그의 눈길이 닿는 기척은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 정말 거기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눈길이었다. 등에 단도가 날아오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틀림없어. 그녀는 짓궂은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스러져 버렸다. 그의 피를 보고 싶은 갈증과 함께.

    뭔가 전같이 단순하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린 뒤부터 조프리 드 부르그는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당연히 형제들을 따라서 떠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남는 것을 보자 무척 화가 나는 동시에 그의 속셈이 뭔지 궁금했다. 혹시 나의 아버지처럼 웨섹스의 늑대에게 싸움을 걸려는 것인지도 몰라. 별것도 아닌 이유로 형제들과 전쟁을 벌이는 남자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는 휘하의 군사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음식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백성들의 복지와 장원의 관리 상태에 관심을 쏟는 것이 자신이 여태껏 알던 어떤 남자와도 달랐다. 나의 주의를 돌리려는 계략이 분명해. 하지만 뭘 피해서 관심을 돌리려는 것일까?

    며칠 전 그는 회계 장부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더니 지금도 장부 속에 푹 빠져 있었다. 그것도 그녀를 놀라게 하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회계 장부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자잘한 일들에 매이기 싫어서 집사에게만 모든 것을 맡겨 두었다. 아니, 적어도 말은 그렇게 했다. 엘렌은 아버지가 글을 못 읽기 때문에 장부를 봐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줄곧 품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그녀는 흘끗 조프리를 보았다. 서얼이 흘려쓴 글씨를 얼마나 알아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여전히 장부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무 열중해서 검은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것도 모르는 듯했다.

    엘렌은 의자에서 몸을 고쳐 앉으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아버지 피츠휴는 탐욕과 야심에 불탔다. 아버지가 자애롭던 어머니와 결혼한 것은 지참금으로 가져올 땅에 욕심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까운 땅을 손에 넣고 나서도 만족할 줄 몰랐다. 아버지는 남부럽지 않은 성을 손에 넣길 바랐다. 그래서 웨섹스를 탐냈다.

    아버지 휘하의 기사들도 모두 나름대로의 탐욕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리고 월터 에이버리라는 인간도 파악했다. 그 역시 탐욕 때문에 웨섹스의 늑대를 배신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섰다. 모두들 탐욕스럽고 복수심에 불타는 남자들이었다. 더 많이, 또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그와 대조적으로 조프리는 마치 수도승 같았다. 맥주를 들이켜지도 않고 걸신들린 것처럼 먹을 것을 탐하지도 않았다. 상소리도 하지 않았고 말소리를 높이거나 잔인한 말도 쓰지 않고 욕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공대했다. 가장 천한 농노한테까지 공대했다. 아버지의 기사들처럼 상스럽게 트림을 하거나 방귀를 뀌어 대지도 않고 여자들에게 집적거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궁금해졌다. 그에게도 다른 남자들 같은 신체 기능이 있을까?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 가지 그가 자주 하는 일이 있다면 목욕이었다. 그는 혼자 목욕을 했다. 그에게서 몇 번이나 깨끗하고 좋은 냄새를 맡았다. 젖어서 이마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도 보았다. 그녀는 의자에서 초조하게 몸을 뒤틀며 그의 영상들을 머리 속에서 몰아냈다. 아버지도 기사들도 제대로 목욕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녀들이 간혹 목욕 시중을 들라치면 끝에는 비명 소리가 나고 물이 첨벙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한 가엾은 하녀는 월터 에이버리의 아이를 낳다가 죽은 일도 있었다. 그가 이곳에 왔을 때 생긴 아기였다.

    엘렌은 몸을 떨었다.

    조프리를 바라보며 그 역시 다른 사내와 다를 것 없다고 중얼거렸다. 수법이 좀 특이할 뿐이지. 아니, 오히려 더 악질일지도 몰라. 친절하고 부드러운 척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본색을 드러낼 것이 분명해. 차분한 태도 따위에 속을 내가 아니지. 엘렌은 그가 돌려 준 단도를 늘 지니고 다니다가 그가 가까이 올 때마다 잡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밤마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잤다. 그리고 아침이면 자리를 개켰다. 하인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 이상한 것은 간밤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뭔가에 놀라 잠이 깼다가 촛불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칼에 손을 댔다. 문득 살펴보니 그는 제자리에서 옆으로 누워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월터 에이버리가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보던, 그림만 가득한 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책이 창가에 놓여 있기에 얼른 살펴보았는데 진짜 책이었다. 에드레드 신부가 설교할 때 꺼내 들던 종교 서적말고는 처음 구경하는 책이었다.

    조프리는 책을 읽을 만큼 글자를 잘 아는 것일까?

    책을 보고 나자 그녀는 그가 장원에 가져온 옷궤 속에 또 무엇을 숨겨 왔을까 궁금해졌다. 그녀는 불쑥 일어나서 조심스레 조프리 쪽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장부에만 골몰할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흥미로울까? 잠깐 궁금증이 일었지만 곧 눌러 버렸다. 그가 다른데 정신을 팔고 있을수록 유리하니까.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에 있는 큰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등뒤로 단단하게 문을 닫고 그의 옷궤 가운데 가장 큰 것 앞에 무릎을 꿇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요즘 익숙해진 남편의 향취가 훅 번졌다. 몸속 깊숙이까지 스며드는 듯한 청신하고 따스하고 멋진 냄새였다. 그녀는 그의 물건들을 헤쳐 보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곧 옷궤 속에 든 옷들을 내려다보았다. 숨이 막혔다. 생전 보지도 못한 윤택한 옷감으로 만든 옷들이 아찔할 정도로 많이 개켜져 있었다. 자신이 입는 초라한 옷들과 이 화려한 옷들을 비교하자 묘한 질투심이 가슴을 찔렀다. 녹색 리넨 상의의 부드러운 감을 어루만지던 그녀는 자신이 그 옷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지금은 모두들 나를 레이디 드 부르그라고 부른다. 하지만 진짜 레이디의 인생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오래 전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때 묻어버린 꿈들이 되살아났다.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스치는 바람에 허리가 꺾일 뻔했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면서 얼른 기억들을 몰아내고 옷들을 뒤져보았다. 옷 밑에 나무로 만든 작은 장난감 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끈으로 조종하는 인형 세트가 있었다. 엘렌은 혼란스러워서 눈썹을 찡그렸다. 다 자란 남자가 왜 이런 물건들을 갖고 있지?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우아하고 두꺼운 털옷을 들어올리다가 그 밑에 있는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옷궤 맨 밑바닥에 줄지어 있는 것은 책들이었다. 두꺼운 책, 얇은 책, 작은 책...... 이렇게 많은 책들은 생전 처음 보았다.

    그는 책을 읽을 수 있다.

    회계 장부와 간밤에 본 책뿐만 아니라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잘. 에드레드 신부보다 더. 아니, 그 누구보다 더. 여러 가지로 기이한 사내인데 한술 더 떠 학자라는 것도 분명해졌다.

    그의 지식을 생각하자 화도 나고 두려웠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화를 눌렀다. 그리고 물건들을 다시 정리해 놓을 생각도 하지 않고 뚜껑을 닫아 버렸다.

    그를 미워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침실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아버지와 기사들을 피해 종종 혼자서 밥을 먹곤 했다. 떠들썩한 홀이 싫어서였다. 지금은 홀이 조용하고 질서있게 바뀌었지만 이제는 그곳을 그렇게 변화시킨 남자를 피해서 혼자 먹고 싶었다.

    묽은 스튜를 한 입 떠넣는데 문이 열렸다. 화가 나서 올려다보니 조프리가 서 있었다. 그의 큰 체구가 문을 꽉 메우고 있었다. 음식이 목에 걸릴 뻔했다. 제기랄!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는 거지? 아주 영원히 가버리면 좋겠는데! 그녀는 그를 향해 나이프를 겨누면서 싸울 태세를 취했다.

    “왜 그러는 거요, 엘렌?” 그는 낮고 달래는 투로 물었다. 그 목소리에 왠지 끌리면서도 화가 났다.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이 나타나는 바람에 식욕이 달아나 버렸거든요. 썩 나가요!” 그녀가 소리쳤다.

    “몸이 좋지 않소?”

    “멀쩡했는데 지금은 그렇군요! 당신 꼴을 보니 속이 뒤집혀요!”

    “당신 자리는 홀 안이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 자리? 내 자리가 뭔지 제까짓 게 뭘 안다고? 이 장원에 내 자리라고는 없어.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살기 위해 필요한 먹을 것 조금뿐!

    아버지는 여자를 경멸해서 어머니와 내가 장원의 여주인 역할을 하지 못하게 했어. 하다 못해 홀에 내려와 손님을 대접하는 역할도 맡기지 않았지. 그리고 아버지는 오직 재산과 신분을 노리고 어머니와 결혼했어.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그 둘을 모두 빼앗았어.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이 남자 역시 내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갈 거야.

    그녀는 몸을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가락 사이에 단도가 끼워져 있었지만 그 대신 저녁 그릇을 던져 버렸다. 하지만 그는 놀랄 정도로 빨리 피했다.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의 값비싼 옷소매로 스튜가 흘렀다. 그 꼴을 바라보자니 엘렌은 자신이 너무 심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화를 터뜨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화를 낸다면 그 역시 보통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니까. 아버지나 다른 기사들과 다를 것 없고 서얼이나 하인들보다 더 현명할 것도 없는 보통 남자라는 증거.

    하지만 그는 화내지 않았다. 한숨을 쉬고 등을 돌려 걸어갈 뿐이었다. 엘렌은 놀라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서 문으로 달려가 계단 밑으로 소리쳤다.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까지 내민단 말이죠, 영주님? 당신이 성자라도 돼요? 에드레드 신부한테 말해서 당신한테도 신부복을 달라고 해야겠군요, 조프리 성자님!”

    계단 아래서 하인 한 명이 숨 죽여 쿡쿡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한순간 몸이 굳었다. 다른 사람하고 같이 웃는다는 것이 아주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요란하게 문을 닫고 고픈 배를 움켜쥔 채 침대로 향했다.

    조프리가 잠자리를 깔려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옷을 입은 채 누워 있었다. 제아무리 성자 같은 남자라도 무작정 믿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가뜩이나 화가 나 있는데 오늘따라 그가 유난히 부스럭대는 것 같아 더욱 화가 났다. 그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고 이쪽저쪽으로 몸을 뒤집는 기척도 전해졌다. 딱딱한 타일 위에서 잔다고 죽기야 하겠어? 그녀는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당신은 저녁을 먹어서 뱃속이 든든하잖아.

    갑자기 그의 평평한 배가 떠올라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조프리는 여전히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마침내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문득 그가 일어나 서성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화가 난 것도 잠깐 지금은 경계심이 생겼다. 눈을 떠보니 그는 꺼져 가는 난롯불을 쑤셔보다가 몸을 굽혀서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책을 꺼내 들고 다시 누워 책에 정신을 팔았다.

    엘렌은 화가 났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가볍게 책을 들고 술술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자신처럼 옷을 입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구겨진 매트 위에 길게 몸을 뻗은 모양새를 보자 조롱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방은 촛불로 구석구석 환했다. 이렇게 환한 방에서 나보고 어떻게 자라는 거야?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모든 것이 밉살스러웠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남자도 그래 본 적 없는데 그만 유독 자신 앞에 편히 누워 있는 꼴이 미웠다. 이 남자는 왜 다른 남자들처럼 겁내면서 움츠러들지도 않고 혐오스러워하면서 도망치지도 않는거야?

    “대체 무슨 짓이에요, 드 부르그?” 그녀가 소리쳤다. “종일 귀찮게 하고도 모자라서 이젠 밤까지 새게 만들려구 그래요?”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촛불 갖고 뭘 그러오, 엘렌. 어서 자요.”

    “안 돼요! 불을 꺼요. 안 끄면 후회할 거예요!”

    “엘렌......”

    그의 낮고 달래는 말투에 그녀는 또 화가 났다. 자신에게 감히 그렇게 친근한 말투를 쓴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화가 나서 침대 옆으로 몸을 날려 촛불을 훅 불었다. 방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의기 양양해졌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깐,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조프리의 손이 그녀를 움켜잡고 끌어 내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녀는 그의 몸 아래 깔려 버렸다. 단단한 손아귀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머리 위에 붙여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엘렌은 조금 전에 자신이 조롱한 남자가 알고 보니 90킬로그램은 족히 될 만한 근육질의 남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커다란 체구를 움직이는 속도도 놀라웠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그가 자신을 타고 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도 몸부림칠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심상치 않은 그의 열기에 넋이 빠졌다. 그리고 후끈한 열기가 덮치자 보호 본능도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녀는 벽난로의 흐린 불빛에 적응하려고 눈을 깜빡였다. 마침내 눈을 치켜 뜨자 조프리도 자신처럼 놀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크게 벌어지고 자신만큼이나 숨소리가 빨라졌다. 가슴에 맞댄 그의 심장도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놀라서 올려다보자 그의 눈동자가 더욱 짙어지면서 꿈을 꾸는 듯한 묘한 그림자로 덮였다. 그리고 두툼한 입술이 마치 배고픈 사람처럼 벌어졌다. 엘렌은 잠깐 그도 자신처럼 저녁을 거른 것이 아닌가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저녁 생각을 하자 갑자기 입술이 말라와서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의 눈이 그녀의 혀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왔다.

    그의 눈길이 자신의 입술에 못 박히는 것을 보자 그녀 몸 속 깊숙한 곳에서 뭔가 불붙었다. 기묘한 열기에 그녀는 그의 몸이 자신을 누르고 있다는 것을 잊고 싶었다.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가 싶더니 뒤이어 공포가 덮쳤다. 그녀는 미친 듯이 그를 떼밀었다.

    필사적으로 떼밀자 그가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듯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엘렌은 자신의 옆에 길게 누운 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너무 힘을 쓴 탓에 가슴이 마구 들먹거렸다.

    “미리 경고하겠소.” 그는 그녀를 노려보며 속삭였다. “앞으로는 어두운 데서 달려들지 마시오. 나도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하니까.”

    그의 말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침대로 달려갔다. 그의 협박에 대꾸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단도를 찾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단도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한참을 그의 밑에 깔려 있었는데도 한 번도 단도 생각을 안 했다니......

    더 언짢은 것은 단도 따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조프리는 칼 같은 것으로 싸워 물리칠 존재가 아니다. 그의 매력에 대항해 얼마 동안이나 저항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우울한 불안의 그림자가 덮쳐 왔다.

    조프리는 콧마루를 눌러 두통을 물리치려고 애쓰면서 회계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행동을 생각하자 두통이 밀려왔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간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밑에 깔려 있을 때의 기억이. 그녀가 입은 모양 없는 옷 속에 풍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운 몸매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엘렌을 여자로 보는 것은 정말 반갑지 않다.

    형제들처럼 그녀를 혐오스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얼굴 윤곽과 황갈색 눈동자가 사랑스럽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녀의 머리칼에도 빠져드는 참이다. 하지만 나의 안정된 성격에 비해 그녀는 성격이 너무 격하다. 지나치게 야성적이고 기복 심한 그녀의 성격이 자신과 너무 대조적이라서 그는 머리가 아팠다.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렇게 맹세를 했는데도 그녀만 생각하면 냉정을 잃었다. 그는 그녀가 무슨 모욕을 퍼붓든 정중하게 대했고, 상스러운 욕도 무심하게 넘겨 버렸다. 아버지 캠피온 백작을 닮기 위해서. 하지만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하인들이 등뒤에서 성자 조프리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뒤로는 더욱 그랬다.

    게다가 하인들까지 반항적이라 더욱 골치가 아팠다. 너그럽게 대해 주는데도 걸핏하면 경계하는 눈초리를 했다. 병사들은 과연 얼마나 충성심을 보여 줄지 의문이었다. 이제는 이곳이 자신의 집이니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했다. 서얼과 에드레드 신부외에는 모두 의심스러웠다. 하긴 에드레드도 역시 종종 묘한 눈으로 자신을 보긴 했다.

    아, 힘들다..... 그는 다시 눈두덩을 눌렀다. 주위의 모든 것이 적이었다.

    피츠휴가 저질러 놓은 잘못을 혼자 바로잡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다. 능력 있고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그도 이 장원의 회계 장부만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수입과 지출이 맞는 곳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서얼이 관리하는 돈이 꽤 있었는데 무슨 명목의 돈인지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았다. 반면 겨울에 쓸 생필품은 바닥을 긁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 캠피온 백작에게 사람을 보내 생필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하는 한편 어서 빨리 봄이 오길 바랐다. 지금 형편으로는 빌린 것을 갚으려면 한동안 허리띠를 조여야 할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엘렌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죽이겠다는 그녀의 협박은 점점 줄었지만 그래도 걸핏하면 소리를 질러댔다. 얼굴을 가린 머리칼 뒤에서 고양이 같은 눈으로 노려보곤 하는 바람에 그는 머리칼을 확 잡아채고 싶은 심정이었다. 충동으로 손이 근질거렸지만 반대로 가슴은 심하게 요동을 쳤고, 몸의 일부분이 딱딱해졌다.

    그는 맥빠진 얼굴로 장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젖히고 목을 문질렀다. 숫자를 들여다보고 나면 피곤하고 목이 뻣뻣해졌다. 바람이라도 쐬어서 머리 속을 맑게 해야지. 그는 기지개를 켜고 외투를 걸쳤다.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바람에 활력이 솟았다. 하지만 새삼 이곳 지리에 서투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캠피온 성을 추억시켜 주는 곳으로 걸음을 떼었다. 캠피온 성에서 데리고 온 말을 보고 싶었다.

    마구간 쪽으로 걸음을 떼는데 누군가 있었다. 처음에는 마구간에서 일하는 시종인 줄 알았는데 숱 많은 머리카락을 보니 엘렌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말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평소처럼 째지는 목소리가 아니라 부드럽고 쉰 목소리로. 그는 맥박이 빨라졌다. 저 여자가 정말 내 아내란 말인가?

    겨울 햇살이 벽의 틈새로 스며들어 그녀의 머리를 물들이고 생강빛 머리칼을 도드라지게 해주었다. 유난히 작고 아담해 보였다. 그녀가 말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그토록 우아한 손놀림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생각보다 손이 작고 날씬했다. 문득 그 손이 자신을 쓰다듬으면 어떨지 궁금해졌다. 나의 팔을 쓸어 내리고 가슴을 어루만지고 또....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는지 그녀가 홱 돌아섰다. 마법 같은 한순간이 사라졌다. 벽 틈새로 스민 햇살 속에 천사 같던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짓이에요, 드 부르그?” 그녀가 소리쳤다. “잠깐도 혼자 못 놔두고 따라다녀야겠단 말인가요?” 평소와 다름없는 높게 째지는 소리였다. 그러자 말이 초조해하면서 경고하듯이 콧김을 뿜었다. 하지만 엘렌은 씩씩대느라 보지 못했다.

    “소리 지르지 마시오, 엘렌!” 조프리가 일렀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연거푸 욕설을 퍼붓자 말발굽이 바닥을 차는 소리가 들리면서 곧 말이 힘차게 몸을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조프리는 엘렌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마구간 바닥에 깔린 짚더미에 엘렌을 떼밀어서 말발굽을 피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렇게 뒤엉켜 있었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이윽고 그가 몸을 떨면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가 한 짓은 욕을 들어 마땅했다. 잔소리를 퍼부으려고 했지만 겁에 질린 그녀의 표정을 보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황갈색 눈동자를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할딱할딱 숨을 쉬느라고 입술을 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연약해 보였다.

    모처럼 머리칼이 뒤로 넘어가고 맨 얼굴이 보였다. 황금빛 살갗은 띠끌 하나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떨고 있는 암사슴을 쓰다듬듯이 천천히, 부드럽게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쓸었다. 비단보다 매끄러웠다. 그녀가 놀라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입술이 달콤해 보였다. 풍만하면서도 짜릿하고 톡 쏘는 맛이 날 것 같았다. 한 번만..... 그는 고개를 숙이면서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다시.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섬세한 입술 윤곽을 혀로 쓰다듬었다.

    너무나 놀라웠다. 입술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받쳐 주고 있는 그녀의 몸도 부드럽고  탄탄했다.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두 개의 가슴 봉오리에서 뜨거운 열기가 퍼져 오는 감촉도 놀라웠다. 그 가슴에 자신의 가슴을 문지르고 야생마 갈기 같은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촉촉한 입술이 자신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머리 한구석에서 위험하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깨물기라도 하면 심각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몽롱한 머리 속에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 한 번만. 그는 그녀의 숱 많은 머리채에 손을 묻고 다시 키스했다. 이번에는 더 깊게. 그러면서 그녀가 입술을 열도록 재촉했다. 그리고 그녀가 낮게 숨을 들이쉬는 틈을 이용해서 혀를 밀어 넣었다.

    계피. 그녀의 입에서 계피 향이 났다. 그리고 뜨거웠다. 너무나 자극적인 감촉에 그는 곧 흥분하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이빨을 혀로 쓸고 입안의 숨겨진 구석구석을 탐사한 뒤 만족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전에는 경험해 본 적 없는 뜨거운 욕망이 치밀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그녀가 누구인지도 잊고 심지어 자신이 누군지도 잊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로 그녀의 아랫도리를 누르면서 몸을 떨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그녀가 홱 밀치더니 그의 밑에서 빠져 나와 몸을 일으켰다. 조프리는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눈을 크게 뜨고 마주 보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쏟아져 나올 따가운 욕설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고 땅바닥에 침을 뱉을 뿐이었다. 그가 일어나 앉자 그녀는 돌아서서 달아났다. 서두르느라 모양 좋은 장딴지가 치마 밑으로 드러났다. 그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긁어 올리면서 한숨을 쉬고 방금 일어난 사태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쓰디쓴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알았어. 걸핏하면 고래고래 소리치는 엘렌의 입을 막을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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