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와결혼하는법-3화 (3/18)
  • 3장

    엘렌의 짐작대로 저녁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그녀는 포도주를 조금 마셨다. 포도주가 팽팽한 긴장을 어느 정도라도 누그려뜨려 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속만 뒤집힐 뿐이었다. 어쨌든 결혼식도 끝났으니 이제는 기다릴 일만 남았다.

    그녀는 경멸하는 눈길로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드 부르그 형제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인간들이람.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들은 다른 남자들처럼 맥주를 들이켜고 흥청망청하지 않았다. 실컷 먹고 취해서 나가떨어지길 바라면서 식품 창고를 활짝 열어 두었는데도 멀쩡했다. 이상한 인간들도 다 있지! 그들은 모두 겉보기엔 호탕한 전사들이면서 행동거지는 수도승 같았다. 스티븐이라는 남자는 제외하고.

    그는 지나치게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눈빛은 굶주려 있었다. 그녀는 그가 뭔가에 사로잡혀 방황하는 영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오만한 자세로 일관해 그녀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취해서 곯아떨어지거나 시녀들에게 집적대지도 않고 모두들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특히 웨섹스의 늑대가 그랬다. 그녀는 몇 번이나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녹색 눈동자에 자신에 대한 미움과 위협적인 표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런 뜻을 직접 입에 담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말라고 조프리가 분명히 못 박았기 때문이었다. 조프리가 에드레드를 그렇게 심하게 대하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엘렌도 그의 말을 그냥 재미있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성자처럼 참을성 있게 느리고 조용하게 움직이던 남자가 에드레드를 협박하고 눈부시도록 재빠르게 완력을 과시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가 대단한 힘을 가진 남자라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묘한 행동거지로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것만 봐도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영리했다. 그는 자신의 편을 들고 정중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놀리기도 했다. 엘렌은 얼굴을 붉혔다. 그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갈색 눈동자를 빛내면서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놀려대는 것을 보자 그녀는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면 앞으로 단단히 각오해야 해. 그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이제까지 자신에게 그런 어리석은 짓으로 접근한 남자는 없었다. 그가 구애할 만한 숙녀들한테는 잘 통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은, 여자들의 어리석은 감상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야. 그녀는 화가 나서 작은 방석을 발로 찼다. 방석이 타일 바닥 위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자, 이거나 받으시지, 드 부르그. 그녀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엘렌 아가씨!” 눈을 들자 서얼이 방석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아버지보다 젊은 나이였지만 체구가 땅딸하고 대머리여서 오히려 늙어 보였다. 장부 정리를 할 자신만 있었다면 진작 해고시켜 버렸을 사내였다. 그를 보는 것도 짜증 났고, 자신이 능력 없는 것도 짜증이 났다.

    “무슨 일이야?”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는 눈썹을 모았다. “이야기 좀 하려고요. 제발..... 얌전히 행동하세요, 제가 애원할게요.”

    얌전히 굴라고? 이 작자가 감히 나더러 얌전하게 굴라고 말해? 엘렌은 턱을 뒤로 빼고 그를 잡아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자 서얼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리는 건.... 다른 사람이 피츠휴 성을 다스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가 더듬거리며 겁먹은 얼굴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엘렌은 그가 느닷없이 충성심을 발휘하는 것은 집사 자리가 위태로울까 봐 그러는 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소를 터뜨렸다.

    서얼은 얼굴을 붉혔다. “제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이성적으로 행동해 주세요, 아가씨. 땅 한 평도 없으면서 아가씨하고 강제로 결혼한 기사를 죽이는 것하고 왕이 내린 드 부르그 가 사람을 죽이는 건 문제가 완전히 다르다구요.”

    엘렌은 얼굴을 찌푸렸다. 왕의 명령을 받은 뒤 그녀는 그런 명령은 따를 수 없다는 뜻을 왕에게 자주 전했다. 하지만 왕이 더 이상 너그럽게 봐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엉터리 결혼식을 올린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는 어떤 남자에게도 이용당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여러 가지 생각이 어지럽게 얽히는데 문득 깨닫고 보니 서얼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썩 꺼져!” 그녀는 소리치면서 단도 손잡이에 손을 댔다. 월터 에이버리를 죽인 바로 그 단도였다. 단도를 잡을 때마다 그녀는 위안을 받았다.

    서얼은 재빠르게 허리를 굽히고 물러갔다. 하지만 대신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순간 그녀는 몸이 굳었다. 따스하고 단단하고 깊고 거친 힘이 전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런 느낌을 떨구어 버렸다. 조프리란 사내는 어떻게 해서 그런 기운을 뿜어낼 수 있는지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는 정말 수수께끼 같은 사내였다. 미지의 위험한 사내. 위험한 사내에게서 나를 보호해야 한다.

    “무슨 일 있소, 엘렌?”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싫었다. 결혼식을 올린 뒤부터 그는 계속 이름을 불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아무도 그렇게 부른 사람은 없는데.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면서 단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드 부르그.”

    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어떤 표정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말에 반박하려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남편이니까. 하지만 그는 피곤한 한숨만 쉬었다. 아직도 머리가 아픈 것인지 궁금했다. 제발 그랬으면. 그녀는 속으로 그 생각을 하면서 짓궂게 웃었다.

    “이만 방으로 가야겠소, 엘렌.” 그가 말했다.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피곤하면 당신이나 가요, 드 부르그. 난 여기 있을 테니까.”

    “안 되오.”

    엘렌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 낯선 열기가 담겨 있었다. 내 말에 정면으로 반박을 해? 그녀는 쏘아붙이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가 몸을 기울이고 재빨리 속삭였다. “위층에서 우리끼리 계속 얘기합시다. 그때까지는 진짜 부부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소.”

    그녀는 혼란스러워서 눈을 깜빡였다.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보호 본능은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남자도 믿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가 몸을 쭉 펴자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바라보아야 했다. 형제 가운데 가장 큰 키는 아니지만 그래도 매우 크고 근육질이었다. 그녀는 바라보는 눈초리들을 의식하면서 단도를 움켜잡았다. 하인들은 홀 건너쪽에서 흘끔흘끔 바라보았고 드 부르그 형제들은.....뭔가를 기다리면서 지켜보았다.

    “가요!” 마침내 그녀가 대답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든지 다른 형제들이 없는 데서 행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선 단도를 줘요. 갖고 갈 필요가 없으니까.” 조프리가 낮게 말했다. 과연 그답게 달래는 투였다. 영리한 사람이 야생동물이나 말을 길들일 때 쓸 만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넘어갈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면전에 대고 비웃어 주었다.

    “칼을 줘요, 엘렌.” 조프리가 손바닥을 펴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불현듯 그 손을 베어 버리고 싶은 야만스런 충동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내가 왜 이러지? 나도 아버지처럼 되어 가는 걸까? 머리 속에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는데도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뜨겁게 온몸을 달구었다. 늦기 전에 먼저 공격해. 네 몸을 보호해야지.

    그녀가 위태로운 본능과 싸우면서 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바싹 다가섰다. “항복하되 아주 야단스럽게 해요.” 그가 속삭였다. “안 그러면 형제들이 여기까지 쫓아올 거요.”

    엘렌은 눈을 깜빡였다. 한순간 악마적인 충동을 느꼈다. 에드레드 신부가 말한 악마가 정말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곧 사라졌다. 그녀는 숨을 토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좋아, 가져가요! 당신 같은 인간을 다루는 데 칼 따위는 필요없으니까!” 급할 때 쓸 수 있도록 방에 다른 단도들을 숨겨 놓았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지.

    그녀는 칼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단도가 타일을 미끄러지면서 조프리의 발치로 밀려갔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욕을 하거나 하인을 부르는 대신 직접 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칼을 형제들에게 건네 주고 돌아서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 갑시다.”

    엘렌은 깊은숨을 토하고 한참 동안 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크고 굳은살이 박힌 손에서 따스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정말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엘렌은 포기했다. 내가 포기하고 말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침까지라도 버틸 작자들이야! 그녀는 그의 손바닥에 손을 맡기고 그가 이끄는 대로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의 손은 다른 신체 부위처럼 큼지막하고 따스하고 뽀송뽀송했다.

    영주가 쓰는 큰 침실 문을 열자 그녀가 소리쳤다. “여긴 내 방이 아니에요! 손 놓아요, 드 부르그!”

    그는 곧장 손을 놓았다. 그가 너무 고분고분 놓아서 그녀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가 가볍게 어깨를 잡았지만 그녀는 화가 나서 뿌리쳤다.

    “하인들에게 이 방을 준비해 놓으라고 했소.” 그가 속삭였다.

    “싫어요.”

    그는 한숨을 쉬면서 손가락으로 콧마루를 문질렀다. 길고 모양 좋은 코였다. “들어가요.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거짓말! 그녀는 속으로 소리쳤다. 결혼식 날 오순도순 이야기나 하겠다는 당신의 말을 믿으라고?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일단 들어갔다. 다리에 숨겨 놓은 다른 단도를 생각하면서.

    그는 그녀를 따라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녀는 벽 쪽에 등을 대고 서서 필요하면 싸울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무시한 채 육중한 옷궤 위에 앉아 두 손으로 눈을 문지르자 그녀는 내심 놀랐다.

    정적이 방안을 내리눌렀다. 그녀는 그가 먼저 움직이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꼼짝 않고 앉아 있기만 했다. 이윽고 그가 올려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따로 숨겨둔 무기가 있을 텐데....” 그녀는 그의 날카로운 직감에 숨이 막혔다.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칼을 내놓았겠지.” 그가 설명했다.

    내 몸을 수색하려는 걸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몸에 손을 댈까? 분노에 곁들여 뜨겁고 격한 감정이 온몸을 헤집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위협적인 몸짓도 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짙은 갈색 머리가 뒤로 미끄러져 넘어갔다. 그는 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정 칼을 갖고 있고 싶으면 갖고 있어도 좋소. 그리고 내 잠자리는 여기 벽난로 앞으로 정하겠소. 단 당신이 오늘밤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허튼 짓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의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엘렌은 그 눈동자 속에 빠져 버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뒤로 물러서자 거칠거칠한 벽이 등에 닿았다. 그 눈에 깃들인 인내심을 믿기가 싫었다. 착각이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혹시 마술을 배웠나.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살인까지 이어졌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그가 말했다. “하지만 월터 에이버리가 아주 저급한 기사였다는 것은 알고 있소. 돈을 위해서라면 상전도 명예도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지. 물론 그가 죽은 경위는 유감이지만 그걸로 당신을 판단하지는 않겠소.”

    판단해?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쳤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경고해 두겠소.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은 왕의 명령 때문이오. 왕은 당신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거요. 당신은 사나울지는 모르지만 어리석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엘렌. 그러니 결혼하기 싫었다는 구실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면 용서하지 않겠소.”

    엘렌은 할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탄탄한 체구를 일으키더니 방바닥에 자리를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옷을 입고 누워 머리 밑에 팔을 받쳤다.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얼굴이었다. 그의 속눈썹이 스르르 내려갔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속이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 잠재워 놓고 어떻게 해보겠다구? 하! 피츠휴를 우습게 봐도 분수가 있지. 그녀는 침대로 걸어가면서도 잘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내가 잠에 곯아떨어지는 순간 단도를 빼앗고 덮쳐 오겠지. 덮쳐 올 그의 무게를 생각하자 몸이 떨렸다.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얼굴이었다. 그래, 장단 맞춰 주지.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옷을 벗지 않고 매트리스에 누워 두꺼운 털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드레스 밑에 감추어 둔 단도를 만지작거리면서 기다렸다.

    조프리는 곤히 자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온몸에 긴장을 풀려고 애썼다. 숨소리도 차분하게 내려고 했다. 하지만 경계심을 늦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악녀라도 자는 동안에는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 자는 척하고 있는 것뿐이다.

    벽난로 불이 사위었지만 그녀의 칼이 번뜩이는 정도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가오는 소리쯤 미리 알려 줄 것이라고 자신의 귀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긴장이 풀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최악의 상황은 면한 듯했다. 형제들과 엘렌이 격돌하는 사태는 생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둑해지는 방안을 둘러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장원에 도착한 뒤로 여러 가지 일이 생겨 신세 타령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한숨 돌렸다고 생각하자 자신의 처지가 실감났다. 결혼 첫날밤에 방바닥에서 뜬눈으로 지새야 하다니......

    그는 한숨을 쉬면서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따로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함께 하긴 했지만 아내로 삼고 싶을 만한 여자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상형을 떠올리다가 문득 숨이 막혔다.

    에이슬리 드 레이시.

    그 귀족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아름답고 별처럼 환히 빛났다. 게다가 차분하고 지성이 있었으며 말씨는 부드럽고 우아했다. 손에 닿을 수 없는 아가씨였다. 조프리는 그녀의 서늘하고 하얀 팔다리와 얽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장면이 바뀌었다. 자신을 덮었던 긴 금발이 남자를 파묻어 버릴 만큼 풍성하고 윤나는 다양한 빛깔의 갈색 머리로 바뀌었다. 그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몸을 돌리고 영상을 지워 버리려 애썼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조프리는 놀라 잠이 깼다. 곧 정신을 수습하고 속눈썹 밑으로 방안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깜빡 잠이 들었군! 아직까지 목이 붙어 있는 게 다행이야. 새벽 햇살이 작은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고 건너쪽에서 들려오는 낮은 숨소리를 빼면 방안은 적막했다.

    악녀도 잠이 들었단 말인가?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 침대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딱딱한 잠자리 탓에 굳어 버린 근육을 풀고 엘렌이 옷을 걸친 채 자는 침대로 다가갔다.

    이런 첫날밤도 있을까.

    그녀는 아직 자고 있었다. 그녀를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헝클어진 머리채가 담요처럼 주위에 펼쳐져서 그녀가 덮고 있는 털 이불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윤나고 숱많은 머리채에서 값진 이국적 향내가 났다. 아니, 계피향인가?

    그래, 맞아, 계피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유혹적인 머리채를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그녀의 얼굴에 눈을 돌렸다가 흠칫했다. 머리칼이 뒤로 쏠려서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역시 첫인상이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사랑스러웠다.

    짧은 계피색 속눈썹이 부드러운 곡선의 뺨 위로 그늘을 드리우고 뺨은 고집스러운 작은 턱으로 이어졌다. 코는 곧고 입술은 도톰했고 피부는 목덜미까지 티없이 깨끗했다. 매끄러운 피부에 사로잡혀 눈길을 떼지 못하는 조프리의 심장 고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만져 보아도 저렇게 부드러울까? 그의 손가락이 그 해답을 찾고 싶어 안달했다. 부드러운 굴곡을 탐사해 보고 싶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목과 얼굴이 불쑥 솟구쳐 오르지만 않았다면 유혹에 굴복했을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그의 목덜미에 작은 칼날이 닿았다.

    “썩 비켜!” 엘렌이 으르렁거렸다. 그토록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니 조프리는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싶었다.

    “별다른 뜻은 없었소, 엘렌.” 그는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앞으로도 자신의 미래는 이처럼 끊임없는 입씨름과 협박과 소음과 공공연한 추태로 얼룩질 것이 분명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벽 쪽으로 다가앉으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 이토록 그립기는 처음이었다. 그런 곳은 찾을 수 없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조용한 곳을 찾기 전에 먼저 형제들과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내키지 않는 의무였다.

    계단 밑에 거의 이르렀을 즈음에야 그는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형제들에게 간밤의 사정을 눈치채이고 싶지 않아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싶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익녀와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뻔뻔스럽게 나가련다.

    다시 걸음을 떼는데 사이먼의 큰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들렸다.

    “조프리가 영 내려오지 않으면 올라가서 확인해 보자구! 그 계집이 조프리의 목을 베고 나서 창문으로 달아난 게 분명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던스탄이 나섰다. “내가 창문 밑에 파수꾼을 심어 놓았는걸.”

    형의 말을 듣자 조프리는 화가 나서 신음 소리가 새는 것을 겨우 참았다. 내가 이 집 주인인데 파수꾼을 둬야 하다니!

    “그리고 난 밤새 문 밖에서 기다렸어. 형이 명령한 대로.” 니콜라스가 말했다. “비명 소리도 없고 아무 소리도 없었어.”

    스티븐은 코웃음을 쳤다. “당연하지. 설마 그 가엾은 조프 형이 정말로 첫날밤을 치를 줄 알았어? 그렇게 흉한 몰골은 생전 처음 봐. 눈 먼 사내도 그 계집한테는 손대지 않을.....”

    “그만!” 던스탄이 말했다.

    조프리는 형제들이 자신을 생각한답시고 손을 쓴 것도 화가 나고, 스티븐의 모욕적인 말도 화가 났다. 맙소사, 엘렌은 그 정도로 끔찍하진 않다구!

    “정말 불쌍해.” 로빈이 투덜거렸다.

    “그 머리하며!” 스티븐이 말하자 형제들이 신음하는 소리, 맞장구치는 소리가 한데 얽혔다. 조프리는 저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엘렌의 얼굴은 무척 아름답다. 다만 꾸미지 않았을 뿐이다. 머리도 다듬어 주기만 하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왜 다들 눈앞의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지? 조프리는 화가 났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험담을 하는 걸까? 그녀와 말 한 마디도 나눠 보지 않고 말이야. 갑자기 형제들이 참견이나 좋아하고 감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인간으로 보였다. 이만큼 오래 있었으니 쫓아낼 때도 됐어. 그는 각오를 다지면서 홀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쫓아내야지.

    모든 눈동자가 그에게 쏠렸다. 놀란 눈빛을 보니 자신들이 한 말을 들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새색시한테 곤경을 치른 흔적은 없는지 궁금해하는 표정도 보였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머금었다.

    “보다시피 살아 있어. 그리고 난 이제 보모 따위 필요없다구.” 그는 빈정대면서 식탁에 널려 있는 빵과 맥주를 훑어보았다. “이미 아침을 먹었다니 다행이야. 금방 떠날 수 있을 테니까.”

    모두들 놀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가 모두들 던스탄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표정인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조프리도 눈썹을 치켜 뜨고 늑대를 돌아보았다.

    “조프.” 던스탄이 조금 불편한 어조로 말했다. “너도 이곳이 어떤지 보았잖니. 웨섹스 성이 화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보다는 더 넓고 깨끗해. 난 네가 우리와 같이 웨섹스에 가서 머물 줄 알았다.”

    “내 아내는 어떻게 하고?” 조프리는 꼼짝 않고 서서 물었다. 자존심이 뭉개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명예까지 내버릴 수는 없었다.

    던스탄은 어색한 얼굴을 했다. 조프리는 그의 대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들 내가 그녀를 버리고 형 밑에 가서 살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조프리의 돌 같은 표정을 보고 던스탄이 목소리를 높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조프! 신분 낮은 귀족이 자신들보다 높은 영주의 성에 가서 살 수 있어. 넌 내 동생이니까 두말 할 것 없이 환영이야.”

    조프리도 그 점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환영받는 만큼 자신의 아내는 환영받지 못하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던스탄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런 뜻을 풍겼다. 그 이유도 분명히 알고 있다. 던스탄은 아내 마리온을 보호하고 싶은 것이다.

    간밤에 한숨이라도 잔 덕분인지 머리 속이 분명해졌다. 지금까지 엘렌은 소리치고 욕설을 퍼붓고 머리를 빗지 않은 것 말고는 아무런 심한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를 팽개치고 갈 수는 없다. 장원 역시 두고 갈 수 없다. 다른 형제들 눈에는 대수롭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의 장원이다.

    아버지 역시 내가 충실하게 의무를 이행하길 바랄 것이다. 나의 의무는 이곳에 있다. 피츠휴가 백성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고 불같은 아내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나의 의무다.

    조프리는 형제들의 경솔한 처사에 새삼 분노를 느꼈다. 모두들 어떤 도전 앞에서도 피하지 않을 용맹한 사나이들이다. 그런데 왜 난 그러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거지? 짧은 제비를 뽑았을 때 이미 결심한 일이다. 이제 와서 그 제비를 내던질 수는 없다.

    그의 결심을 굳게 해주려는 듯 때마침 엘렌이 달려 내려왔다. 머리가 어제보다 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조프리는 혹시 일부러 더 헝클어 버린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형제들이 그녀를 흉보는 것을 엿들어서인지 그녀의 고집스러운 작은 턱과 노려보는 눈길이 오히려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문득 그녀에 대한 보호 본능이 솟구쳤다. 그는 실망해서 헛기침을 했다. 보호해 줘야 할 여자가 따로 있지...... 그런데도 이 기분은 뭐랄까......

    그는 던스탄을 돌아보았다. “아니. 난 먼저 이곳을 다듬어야해.”

    근처에 있던 엘렌이 그 말을 듣고 당장 나섰다. “굳이 여기 있을 필요는 없어요, 드 부르그.” 힘주어 말했다. “내가 당신 대신 관리할 테니까.”

    “안 되오. 이제 이곳은 나의 장원이오. 내가 모든 것을 보살피겠소.” 조프리가 대꾸했다. 그리고 엘렌이 형제들을 더 자극하기 전에 서둘러 던스탄에게 말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알려 줘. 그때 방문할 테니까.”

    웨섹스의 늑대가 드물게 거북한 얼굴로 의심스러운 듯 엘렌을 바라보았다. “언제 오든 환영한다, 조프. 그걸 알아 줘.”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고마워.” 조프리는 대답하면서 형이 모처럼 애정을 표현한 것에 싱긋 웃었다. 요즘 던스탄은 형제들을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형으로부터 독립해야 해. 나보다 신분이 높은 영주 던스탄이 명령을 내린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한 형제로서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좋아.” 던스탄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 조프리를 지나쳐 엘렌 앞에 섰다. 표정이 차가웠다. “경고하겠소, 제수 씨. 만일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끝까지 당신을 뒤쫓을 거요. 당신이 죽여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조프리는 엘렌이 화를 내기 전에 얼른 나섰다. “던스탄 형, 내 아내를 협박하지 마.” 그러고는 그녀 옆에 섰다. 자신은 엘렌과 한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형제들과 맞서야 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 모두들 깨닫게 해야 한다.

    여섯 명의 얼굴이 그를 돌아보았다.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드 부르그 가문의 장남이자 가장 힘이 세고 권력까지 갖춘 던스탄에게 대든 사람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조프리는 굳세게 버텼다. 지금 분명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

    한참 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엘렌마저 짓누르는 듯한 긴장감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침내 던스탄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프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다른 형제들이 그의 곁을 지나가면서 평소답지 않게 가라앉은 어조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조프리는 형제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다가 하인들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찌푸린 눈길로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문가에는 피츠휴 휘하에서 일하던 기사들이 벽에 기대서 있었다. 우울한 얼굴을 하고 마치 협박하는 듯한 자세였다. 서얼도 겉으로는 굽실대면서 불길한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조프리는 이렇게 빨리 형제들을 보내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의심이 생겼다. 곁에서는 엘렌이 뚜렷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헝클어진 머리 너머에서 상스러운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조프리는 불현듯 깨달았다. 형제들이 가고 나면 주위에는 온통 적뿐이라는 것을.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만만치 않은 적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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