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와결혼하는법-2화 (2/18)

2장

엘렌 피츠휴는 자신을 놀려 대는 남자를 피하려고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갔다. 그의 은근한 태도는 꽤 낯선 것이지만 그렇다고 속아넘어갈 그녀가 아니었다. 조프리 드 부르그는 남자다. 그러니까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나타난 남자는 지금껏 보아 온 어떤 남자보다 더욱 남자다웠다. 그는 아버지보다 체구가 컸다. 조프리 드 부르그쯤이면 월터 에이브리를 어린애 공 굴리듯 할 것 같았다.

빌어먹을 놈의 드 부르그 집안. 빌어먹을 왕. 이 세상 남자들은 다 빌어먹으라구 그래! 엘렌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남자들에 대항해 싸우다 이제야 겨우 나만의 뭔가를 갖게 되었는데 내게서 다시 그걸 빼앗으려고 해! 절대 안 되지.

드 부르그 형제들이 도착한 것은 물론 알고 있었다. 알고 방에 들어가 숨었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물러갈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장본인이 직접 방까지 올 줄은 몰랐다. 순간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자가 문을 때려 부수거나 쪼개 버릴 줄 알았지 설마 노크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것도 정중하게.

엘렌은 눈을 깜빡거렸다. 조프리 드 부르그의 행동이 영문모를 행동이긴 하지만 머리 속에 딴 생각이 끼여드는 것이 싫었다. 그 자가 올라오는 바람에 모두 가버릴 때까지 기다리려던 처음의 계획은 실패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본때를 보여 주면 모두들 꽁무니를 빼겠지.....

그녀는 자신에 차서 홀로 들어서다가 우뚝 멈추어 섰다. 발이 얼어붙었다. 조프리라는 남자 말로는 다섯 명이라고 했는데 세어 보니 여섯 명이었다. 모두들 조프리라는 남자와 잘못 볼래야 잘못 볼 수 없을 만큼 비슷했다. 그리고 한결같이 체구가 크고 머리가 검었다. 조프리라는 사내보다 더 큰 남자도 있었다. 또한 모두 똑같이 호기심과 혐오감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익숙한 그 눈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반사 작용을 취했다.

“뭘 보는 거야?” 그녀가 소리쳤다. “당장 꺼져, 다른 한 녀석도 같이 데리고! 결혼식 따위는 없어!” 그녀는 그들의 발치에 침을 뱉었다. 여섯 쌍의 눈길이 일제히 침이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자 고소했다.

하지만 그 눈들은 곧 그녀에게 돌아왔다. 엘렌은 한 걸음 물러섰다. 체구가 가장 큰 사내는 정말 야만스러워 보였다. 당장 잡아 죽이기라도 할 듯한 얼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키 큰 사내도 뭔가 투덜거리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엘렌은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이제는 인생의 한 부분으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녀는 남자들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팔에 누군가의 손이 얹히는 걸 느끼고도 꿈쩍하지 않았다.

조프리가 달래려고 내려온 것이 틀림없다. 다른 남자들이 주먹을 무기로 쓴다면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차분한 눈동자가 무기였다. 그녀는 그의 손을 떨쳐 버리며 뒤로 물러서서 칼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어떤 사태가 일어나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프리는 그녀의 위협적인 자세를 모른 척하면서 형제들을 소개했다.

“피츠휴 양, 나의 맏형이자 웨섹스의 영주 던스탄을 소개하오.”

그의 말에 체구가 엄청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래, 이 작자가 웨섹스의 늑대로군! 엘렌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늑대란 별명이 정말 어울려. 그녀는 아버지의 오랜 숙적이던 남자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그가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게 아닌가......

던스탄은 이를 악물고 인사했다. “피츠휴 양, 안녕하시오?”

엘렌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건 또 무슨 수작들이람. 왜들 공손하게 예의를 차리는 거지? 그녀는 놀라 조프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전부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엘렌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했다. “당신이 누군지 상관없어요, 드 부르그. 얼른 동생들이나 데리고 내 집에서 사라져 줘요, 모두 다!” 그녀가 소리쳤다. “여긴 당신네들이 있을 곳이 아니에요, 이 하이에나 같은 인종들아!”

늑대가 뭐라고 투덜거리다가 한 대 칠 듯이 앞으로 나섰다. 엘렌은 싸우든지 도망칠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조프리의 한 마디가 늑대를 멈춰 세웠다. “던스탄 형.” 조프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장래 신부의 행동을 용서해 줘.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그러니까.”

엘렌은 돌아서서 입을 딱 벌렸다. 이 자가 정말 제 정신이야? 내가 자신의 형제들을 모욕했는데도 못 들은 척하다니! 왜 역겨워하면서 달아나지 않는 걸까? 왜 모두들 꽁무니를 빼면서 도망가지 않을까? 면전에 대고 욕을 퍼붓고 있는데도 끄떡없는 남자들을 보자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이 자들이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은 왕의 어리석은 명령 때문이겠지. 그녀는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이 자들은 내 땅을 바라고 있어. 드 부르그 가문처럼 돈 많고 세력 있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애처롭도록 조그만 땅에 신경쓰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긴 남자들이란 땅과 여자에 눈 먼 동물들이니까.

“당신이 내 형제들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걸 보니 한시라도 빨리 식을 올리고 싶은 것 같군. 신부를 불러다가 당장 끝내도록 합시다.” 조프리는 엘렌이 욕설을 뱉는 것을 무시하고 팔을 내밀었다.

엘렌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심이든 아니든 누군가 정중하게 자신을 대해 준 것이 언제였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 속이 어지러워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의 유혹적인 공손한 손길을 무시했다.

조프리는 팔을 내민 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엘렌은 그가 왜 이 일을 맡았는지 궁금해져서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윤나는 밤갈색 머리며 따스하고 깊숙한 눈동자,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꼭 닮았으면서도 어딘가 부드럽고 깨끗해 보이는 얼굴윤곽.....

그녀는 그가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잘생겼다는 것을 알고 흠칫 놀랐다. 설마 내가..... 저 남자의 잘생긴 용모에 넋이 나갈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제까지 나를 여자로 취급한 사람도 없었거니와 여자로서의 감정을 느낀 사람도 없는데.....

그녀는 조프리를 돌아보았다. “왜 당신이죠?”

그는 싱긋 웃었다. 그러자 희고 고른 이가 드러났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비 뽑기로 정했소.” 그는 씁쓰름한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그가 솔직히 인정하는 것을 보고 안심했지만 생존 본능이 그녀의 안도감을 일그러뜨렸다. 생존 본능은 그녀에게 이 사내야말로 위험하다고, 험악해 보이는 다른 형제들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존재라고 알려 주고 있었다. 그녀는 막다른 구석에 몰린 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는 팔을 내밀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녀는 다시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건장한 기사들이었다. 여차하면 폭력이라도 휘두를 자들이었다. 보기보다 어리석지도 않았다. 게다가 쉽게 물러날 것 같지도 않았다.

좋아, 그럼 나도 같이 배짱으로 나가 주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계획을 짤 시간이 필요했다. 그 동안은 이들에게 장단을 맞춰 줄 도리밖에 없었다. 그녀는 쏠리고 있는 형제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칼손잡이에서 손을 떼어 그것을 조프리의 소매에 얹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떨렸다. 여러 해 만에 처음이었다.

조프리는 장래 아내가 홀 안을 초조하게 오가는 모습을 앉아서 지켜보았다. 연금술사가 금을 녹이는 용액에 불이 붙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이런 걸까? 언제 불이 붙을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 그런데 엘렌 피츠휴 같은 강력한 발화성 물질이 너무 오랫동안 잠잠하자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형제들 앞에서 고분고분 말을 들었을 때는 놀라워서 경계심까지 들었다. 그녀는 너무 쉽게 항복해 들어왔다. 그게 이상했다. 형제 가운데 가장 참을성 많다고 자부하던 그도 지금은 저도 모르게 초조해져 빌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불붙기 전에 얼른 식을 끝내게 해달라고. 그런데 신부가 도착하지 않았다.

기다리느라 긴장한 온몸이 단단히 굳어 버렸다. 집사가 나간 게 벌써 언제인데..... 형제들은 초조하게 몸을 뒤틀며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망할 놈의 신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조프리는 중얼거리다가 문득 불길한 의심이 들어 천천히 자신의 장래 아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쪽에 등을 돌리고 높은 유리창 밖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그녀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몸을 굽혀 속삭였다.    “그자를 어떻게 한 거요?”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홱 돌아섰다. 손이 순식간에 단도 손잡이로 향했다. 그 놈의 단도. 조프리는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단도를 빼앗고 싶었지만 그런 위험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참으라고 스스로를 닦달하면서 그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드 부르그?” 그녀가 으르렁거리며 그에게서 물러섰다.

“신부 말이오. 신부를 어떻게 했소?”

“하긴 뭘 해요!”

“당신이 이 결혼을 피하려고 아무 죄 없는 신부한테 무슨 짓을 했다면....”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날 때릴 거예요? 아니면 죽일 거예요?” 그녀가 소리치자 모두들 돌아보았다.

조프리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프리는 두 손바닥으로 눈 위를 문질러 덮쳐 오는 두통을 물리치려고 했다. 엘렌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디 아파요, 드 부르그?” 그녀가 사악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내가 아프지 않게 할 약을 지어 주지! 난 약초 만드는 데 아주 솜씨가 좋거든요.”

“그러시겠지.” 조프리는 대답하면서 그녀를 예쁘다고 생각한 자신이 제정신이었는지 의아해했다. 헝클어진 머리칼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이제 막 두꺼비와 독버섯을 넣어 약을 만들려는 마녀 같았다. 조프리는 마치 악몽을 꾸는 심정이었다.

“이건 아직 시작이라구! 그러니까 기회 있을 때 도망쳐요.” 그녀가 경고했다.

조프리는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지만 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봐요, 이 어리석은 아가씨. 내가 아니라 다른 형제가 오면 대접이 좀 나을 거라고 생각하면 자, 어디 마음대로 골라 보시오!” 그는 커다란 식탁 주변에 둘러앉은 형제들을 손짓해 보였다.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간 말이었다. 조프리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기묘한 불안을 느꼈다. 그래도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다른 형제라면 좋겠소?” 그가 흥분해서 속삭이고는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모두들 멋지고 강한 사나이들이다. 그는 그녀에게 어떤 남자가 가장 좋을지 생각해보았다. 니콜라스는 너무 어리고 던스탄은 이미 결혼했다. 그럼 무사 태평한 성격의 로빈은 어떨까? 내성적인 성격의 레이놀드는? 그는 엘렌을 노려보면서 얼른 대답하라는 얼굴을 해보였다. 빨리 결론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기다리는 것이 고소한지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심술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다 싫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 말에 조프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처 몰랐는데 그 동안 그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당신도 싫고!”

“나도 마찬가지요!” 조프리는 돌아서서 가슴에 팔짱을 끼었다. 하지만 어린애처럼 성을 낸 것을 곧 후회했다. 그녀 수준으로 떨어지기는 싫었다. 아버지는 나를 속좁고 옹졸한 남자가 아니라 명예를 아는 사내로, 고귀한 기사로 길렀는데.....

그가 엘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고 있는데 서얼이 들어왔다. 이제야 왔군! 집사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는 몸을 폈다. 하지만 밝아졌던 기분은 집사가 혼자라는 것을 알고 다시 흐려졌다. 집사는 아까 나갈 때보다 더 겁먹은 얼굴이었다.

“신부는 어디 있지?” 조프리가 물었다.

서얼이 절망적으로 두 손을 휘저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요, 영주님!”

형제들이 낮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집사를 바라보았다. “결혼식을 집전해야 하는 걸 모르고 있나?”

“아뇨, 알고 있습니다, 영주님. 영주님이 우리 아가씨와 결혼하실 거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습죠. 영주님이 언제 도착하실지는 모르고 있었지만요. 그런데 신부가 사라졌어요! 하인들한테 은둔하면서 단식과 기도를 하러 갔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조프리는 놀라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통의 중심지인 듯한 콧마루를 누르면서 억지로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그 하인은 신부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던가?”

서얼은 고개를 내저으며 벌을 받을까 두려운 듯 뒤로 물러섰다. 새삼스럽지만 조프리는 서얼이 전주인한테서 어떤 취급을 받았기에 저러나 싶은 궁금증이 들었다. 죽고 난 지금도 저렇게 하인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피츠휴는 성질이 사나운 인간이었음이 틀림없다.

“사이먼 형, 병사들을 데리고 나가서 찾아봐 줘.” 조프리가 부탁했다. 사이먼은 평소 같으면 얼씨구나 하고 나설 사람인데도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매서운 눈초리로 엘렌을 노려보았다. 네가 신부를 죽이고 시체를 감추지 않았느냐는 눈초리였다. 조프리는 한숨을 쉬었다.

“사이먼, 졸개들을 모아서 신부를 찾아봐.” 던스탄이 뜻밖에도 조프리를 도와주었다.

“그 편이 웨섹스로 돌아가서 앨드윈 신부를 데려오는 것보다 빠르고 쉽겠어.”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엘렌을 쏘아보았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운명이라는 경고를 던진 셈이었다. 이 마을에만 신부가 있는 게 아니야.

“아, 그러지.” 사이먼이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내가 도와줄게.” 로빈이 일어섰다. “나도 형의 영지 안을 둘러보고 싶었어.” 조프리는 엘렌이 홱 돌아보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사이먼 옆에 로빈과 니콜라스가 다가서는 것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이먼만 가고 너희들은 여기 있어.” 던스탄이 말하면서 엘렌을 돌아보았다. 조프리는 몸이 굳었다. 던스탄은 나 혼자서는 저 여자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그녀를 상대로 지금까지 이만큼 버텨온 것도 부드럽게 말을 건네고 조리 있게 행동했기 때문인데. 다른 형제들처럼 성질을 부리고 칼을 휘둘렀다면 어땠을까? 그는 분노가 솟았다. 내가 아내한테서 내 몸뚱이 하나 보호하지 못할 어린애인줄 아나?

그는 날이 선 소리가 입술까지 치밀어오르는 것을 애써 참으면서 던스탄을 노려보았다.

“일행이 많으면 더 빨리 찾을거야.” 그는 억지로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던스탄은 거북한 얼굴이면서도 조프리의 눈길을 마주했다.

“모두 너무 쉽게 흩어지면 못 써. 저 여자가 함정을 파놓았을지도 모르잖아.”

함정? 조프리는 천천히 엘렌을 돌아보았다. 엘렌은 악의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교한 표정이 손에 잡힐 듯 했다. “설마 병사들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조프리는 던스탄에게 물었다.

“난 요즘 아무도 안 믿는다, 조프. 적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피츠휴는 이미 죽었어. 그와 형의 싸움도 몇 달 전에 이미 끝났고.” 조프리가 대꾸했다. 지금 이 성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에 엘렌의 아버지 휘하에서 던스탄과 싸웠지만 엘렌이 월터 에이버리를 살해해서 그 싸움은 끝이 났다. 그 뒤로 그녀는 웨섹스를 상대로 한 전쟁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홀 안에서 던스탄과 그 동생까지 한꺼번에 죽일 생각이라면 몰라도. 조프리는 미처 그것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불현듯 의혹이 밀려왔다. 이번 결혼식으로 엘렌이 복수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너무 순진한 처사다.

평소 박식한 것을 자랑삼던 조프리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술독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의력이 산만한 스티븐도 이번 사태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복병이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단 말인가?

“지금 남은 병사로는 대단한 위협이 못 될지 모르지, 조프.” 던스탄이 얼른 달랬다. “하지만 나라면 조심하겠어.”

“그래, 물론.” 조프리는 분개가 치솟는 것을 눌렀다. 던스탄은 친하던 친구의 배신을 겪고 나서 경계심을 배웠다. 아주 쓴 경험이었다. 형이 지나치게 신중하다고 탓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아까 엘렌이 형제들을 맞던 태도나 신부가 사라진 것을 보면 모두 심상치 않았다.

조프리는 천천히 엘렌에게 돌아섰다. 그녀는 얼굴을 가린 머리칼 너머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그 머리를 홱 걷어올리고 싶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두 손을 옆구리에 붙이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에게만 말소리가 들릴 만큼.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소, 피츠휴 양? 웨섹스를 차지하려구?”

“난 아버지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요.” 그녀가 낮게 쏘아붙였다. “날 혼자 내버려두기만 바랄 뿐이에요!”

“그건 아직 불가능하오. 하지만 신부를 찾아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당신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소.”

“거짓말 말아요, 드 부르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속지 않아요.”

“그렇다면 식이 끝나고 두고 보시오.” 조프리가 대꾸했다. 그녀가 놀라 눈을 깜빡거리는 것을 보고 그는 싱긋 웃었다. 그녀의 황갈색 눈동자가 보일 듯 말 듯 커졌다. 그 표정을 보자 던스탄이 의심하는 것처럼 간교한 술수나 부리는 여자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자, 어서, 사이먼 형.” 그는 아까보다 자신 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가서 신부를 데려와.”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피츠휴 양이 얼른 결혼하고 싶어 초조하신 모양이니까.”

찾으러 간 일행이 돌아올 즈음에는 저녁 식사 준비가 되고 황혼이 짙어지고 있었다. 니콜라스가 일행을 앞장서서 달려오며 희소식을 전했다. “찾았어, 조프 형. 동굴 속에 숨어 있었어!”

“동굴?” 조프리가 놀라 물었다. 무엇 때문에 따뜻한 집을 놔두고 춥고 음침한 동굴 속에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성직자들이란 모를 데가 많았다. 수도승이나 수사들은 자신 같은 사람은 절대 지킬 수 없는 고행의 맹세들을 하곤 한다. 침묵과 순결의 고행 같은 것. 조프리는 구석에서 뾰로통해 있는 엘렌을 돌아보았다.

“동굴이었어.” 사이먼이 나섰다. “암벽 밑으로 굴이 여러 개 있더구나.”

“그 동굴을 택한 건 동굴 위에서 내려온 종유석 때문인 것 같아. 자세히 보니 십자가 모양이었어.”

“자, 나오시오.” 사이먼이 뒤에 따르던 일행에게 돌아서서 말한 뒤 몸을 비키자 로빈과 불안스러운 얼굴을 한 서얼 사이에 신부 복장을 한 키 크고 여윈 남자가 보였다.

“에드레드 신부야.” 로빈이 호기심에 넘쳐 신부를 바라보았다.

“에드레드 신부.....” 조프리는 그의 이름을 따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이런 때에 칩거하는 고행을 택하셨습니까? 우리는 신부님이 없으면 안 되는데.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식을 집행해 주십시오.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게다가 먼길을 와서 모두 피곤하거든요.”

“식이라뇨?” 신부가 물었다. 그의 진지한 표정만 아니라면 알면서 일부러 짓궂게 묻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프리는 한숨을 쉬었다. “결혼식이요. 피츠휴 양과 제가 결혼해야 합니다.”

“안 됩니다.” 신부가 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한순간 모두들 경악했고,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이어 홀 안이 콩볶듯 요란해졌다. 드 부르그 형제들 모두 한꺼번에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신중한 레이놀드가 가슴에 성호를 긋는 것이 보이고, 스티븐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프리는 형제들의 반응을 모두 무시하고 신부에게 말했다. “피츠휴 양과의 결혼식을 신부님이 집행해 줘야 합니다.” 조프리는 천천히 힘주어 말하면서 신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동자는 투명할 만큼 엷은 푸른색이어서 가뜩이나 묘한 인상의 신부를 더 묘하게 만들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저 신비한 듯한 분위기 때문에 피츠휴가 그에게만은 잔인하게 굴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도 소용없다.

“이 결혼에 대해 알고 있으시겠죠?”

신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난 이 아가씨를 어떤 남자하고도 맺어 줄 수 없습니다.”

조프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엘렌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적어도 이빨은 건강하군. 그는 한가로운 생각을 하다가 다시 신부를 돌아보았다. “왜요, 이유가 뭡니까?”

“왜냐구요? 왜냐구 물으시는 건가요?” 신부의 드높은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격렬한 비명 소리에 드 부르그 형제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사탄의 자식이기 때문이죠. 남자하고는 절대 맺어질 수 없는.”

저도 모르게 조프리의 입이 딱 벌어졌다.

“여자들이란 모두 선천적으로 악마입니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이에요. 악마의 하수인이라구요! 지난번에 저 아가씨를 신부로 맞은 기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십니까? 먼저 간 사람들이 남긴 교훈을 잘 새겨야 합니다! 신의 중재를 통해서만이 이 아가씨는 죄악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조프리는 놀라 엘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자 신부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한 순간 그는 그녀가 에드레드를 사주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의기양양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흐뭇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리고 에드레드 신부의 눈빛으로 신부가 정말로 확고하게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프리는 한숨을 쉬고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다른 신부로 교체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당장은 그가 필요했다. “신부님이 주저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번 결혼은 왕이 직접 명령하신 겁니다.”

던스탄이 초조한 걸음으로 앞에 나섰다. “웨섹스의 남작으로서, 그리고 에드워드 왕의 명령을 받들 것을 맹세한 기사로서 당신에게 이 결혼식을 주재하도록 명령하겠다.”

에드레드는 얼굴이 새파래졌지만 조프리는 신부가 그래도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생겼다. 마침내 던스탄이 칼에 손을 댔다. 그리고 드 부르그 형제 다섯 명이 그 뒤에 늘어서는 것을 보고 신부는 마른침을 삼켰다. 악마니 뭐니 하는 엉뚱한 소리도 목숨 앞에서는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미리 경고하겠습니다. 이 결혼은 파멸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악마의 딸과 사통하면 당신 영혼도 마찬가지로 파멸하게 됩니다, 조프리 드 부르그.”

조프리는 오랫동안 다지고 다졌던 자신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이 이런 식이니 엘렌이 저렇게 신랄하고 미움 가득 찬 성격이 된 것도 당연하지. 조프리는 이웃 영토에 침입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그녀의 아버지는 둘째치고라도 그녀가 저런 신부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자라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프리는 뛰쳐나가 신부의 웃옷을 움켜잡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아니지. 경고는 내가 하겠습니다. 당신이 성직자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더 이상 내 아내의 험담을 하면 추방시켜 버리겠습니다. 알아들으셨겠죠?”

신부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시작합시다.” 조프리가 말하면서 신부의 옷을 놓았다. 그러고는 미친 사람 보듯 하는 엘렌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성직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엘렌을 욕되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이곳의 책임자이니까. 이곳은 앞으로 변할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서며 심호흡을 하다가 흠칫 놀랐다.

깨끗했다. 머리는 비록 헝클어져 있었지만 그녀에게서는 깨끗한 냄새가 났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체취가 톡 쏘는 듯한 머스크 향에 뒤섞여 흘러들었다. 이토록 짜릿한 향을 느껴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숱많은 그녀의 머리채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손만 대면 만질 수도 있고, 두 손으로 움켜쥘 수도 있었다. 처음에 생각한 대로 흐릿한 갈색이 아니라 연한 색과 짙은 색이 뒤섞인 갈색이었는데 생강빛이 곁들여져 머릿결은 더욱 건강해 보였다.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조프리는 그녀의 머리에서 차마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홱 돌아섰다. “뭘 보고 있는 거예요?” 그녀가 쏘아붙이는데 에드레드가 결혼식 순서를 읊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는 횃불 아래서 머리칼 속에 감춘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신부의 말처럼 악마 같았다. 조프리는 잠깐 혹했던 기분이 사그러들었다.

신부의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려 퍼지자 마치 공기가 떨리는 듯했다. 증인을 서고 있는 형제들을 흘끗 보자 모두 우울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다른 형제들보다 용기 있는 남자라는 생각이 모처럼 들었다. 자신의 무지를 벗겨내 준 해박한 지식에 고맙다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용감한 남자라 해도 낡은 홀 안을 둘러보면 - 밖에는 어둠이 몰려들고 집안에는 불길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을 보면 - 괜스레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조프리는 형과 동생들이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그리는 것을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결혼 첫날밤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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