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037 마녀와 결혼하는 법
The de Burgh Bride
데보라 시먼스
적과의 동침.
조프리 드 부르그는 왕의 명령에 따라 엘렌 피츠휴를 신부로 맞아야 했다.
첫 남편을 신혼의 침상에서 죽여버린 여자를. 엘렌은 그녀대로 날카로운 단도의 광채가
조프리의 부드러운 유혹과 달콤한 거짓말을 막아줄 수 있기만을 바라며.......
1장
조프리 드 부르그는 공포로 말문이 막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짧은 제비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형제들의 반응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 안도의 한숨 소리, 그리고 위로하는 듯한 웅얼거리는 말소리 등등. 하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고 손에 쥔 제비만 바라보았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드 부르그 가 형제 가운데서 하필 자신이 그 제비를 집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졌어. 이제 피츠휴와 결혼해야 해.
고개를 든 조프리는 아버지의 근심 어린 눈길과 마주쳤다. 캠피온 백작은 하필 가장 학자다운 아들이 망나니로 악명 높은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사실에 놀랐을지도 모르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프리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울러 자부심도 엿보였다. 조프리라면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믿음과 그 믿음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책임감이 어느 때보다 무겁게 조프리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 무게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드 부르그 가의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엘렌 피츠휴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에드워드 왕의 명령이 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의무를 다해야만 한다. 왕을 위해서, 아버지와 형제들을 위해서.
조프리는 몸을 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내가 맡겠습니다.”
축하 인사는 없었다. 조프리가 자신의 신부감을 마음에 들어하리란 망상을 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테니까. 다른 형제들도 평소 같으면 놀리고 야단법석이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 말도 없었다. 형제들은 겁을 모르는 전사들이면서도 모두 이만 가보겠다는 말을 중얼거린 뒤 각자의 방으로 달아났다. 조프리도 그들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데 겁먹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방을 나가는 형제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앉아라.” 아버지가 가까운 의자를 고갯짓하며 말했다.
조프리는 자리에 앉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난 네가 아니라 사이먼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애는 성격이 너무 불같아서 아마 결혼식이 끝나기도 전에 큰일을 저질렀을 게다.” 캠피온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프리는 아버지의 농담에 싱긋 웃었다. 둘째 사이먼은 성격이 무척 격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이먼이라면 피츠휴 같은 여자를 쉽게 길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협상에 능숙한 네가 이 임무를 맡은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넌 나를 가장 많이 닮았으니까 뭐든 잘하리라 믿는다.”
조프리는 깜짝 놀라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평소 아들들에 대한 사랑을 거리낌없이 보여 주었지만 지나친 칭찬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이런 칭찬을 하시다니...
“너는 다른 형제들처럼 강할 뿐 아니라 지혜까지 갖추고 있으니 아내 될 여자를 상대할 때 전사다운 팔과 더불어 머리와 가슴을 사용하도록 해라.” 백작이 충고했다.
“그 여자에 대한 소문만 믿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너도 알겠지만 그런 소문들이란 과장되기가 일쑤니까. 그러니 결혼할 때는 부디 열린 마음으로 해라. 드 부르그 형제 가운데서 내 충고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조프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엘렌 피츠휴가 소문과 다른 여자일 수도 있다는 희망은 별로 품지 않았다. 엘렌 피츠휴는 불같은 성미에 상스러운 말버릇, 그리고 행실이 제멋대로라고 소문난 여자였다. 그녀는 첫 남편을 첫날밤의 침상에서 죽여 버렸다. 왕이 그녀를 용서한 것은 그 결혼식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정이야 어떻든 그녀의 잔인한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남자라면 누구나 멈칫한다. 특히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될 남자라면 더더욱.
캠피온 백작은 아들의 생각을 읽었는지 헛기침을 했다. “이제부터 네가 지닌 건전한 상식과 동정심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해라. 그리고.....” 캠피온이 경고했다. “등 뒤를 조심해라.”
조프리는 손에 든 책을 가방 속에 줄지어 있는 다른 책들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는 캠피온 성에 있는 누구보다 책이 많았다. 심지어 아버지보다도. 드 부르그 가문 사람 가운데 조프리만 유랑 학자한테서 학문을 익혔다. 지식을 향한 갈증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는 유랑 학자가 떠난 뒤에도 지식에 대한 갈증을 누르지 못해서 틈만 나면 책을 샀다.
그는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깜짝 놀랐다. 형제들 모두 온종일 슬금슬금 나를 피했는데.... 그는 자신을 만나길 꺼려하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드 부르그 형제들은 모두 용감하고 강인했다. 그래서 어떤 큰일이 생기면 늘 한데 뭉치곤 했다. 하지만 엘렌 피츠휴는 달랐다. 그들은 그녀를 어떻게 대적해야 좋을지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이 결혼은 칼이나 도끼를 가지고 싸울 수 있는 전투도 아니고,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물리칠 상대도 아니었다.
“들어와.” 그는 하인이 짐싸는 것을 도우러 왔나 보다고 생각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놀랍게도 입구에 서있는 사람은 맏형인 던스탄이었다. 조프리는 던스탄이 요란하게 코웃음치는 것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던스탄에게는 퉁명스러운 말이나 표정과는 달리 부드러운 감정이 숨어 있었다. 던스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왔다. 무척이나 어색한 표정이었다. 조프리는 쓴 미소를 지으며 스티븐이 던져 놓은 옷가지들을 치우고 던스탄에게 자리를 권했다.
던스탄은 커다른 옷궤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진지한 얼굴로 조프리를 바라보았다.
“다른 동생이 제비를 뽑았으면 했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사이먼도 괜찮겠지.”
아버지가 한 말을 그대로 하자 조프리는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어깨만 들썩이고 말았다.
“걱정마, 형. 잘할 테니까.” 그는 말하면서 얇은 모직 튜닉(남자용 짧은 웃옷)을 개켰다.
“젠장, 조프. 난.....” 던스탄은 다시 험한 욕설을 중얼거렸다. “내 책임이야. 내가 그녀의 아버지를 죽였잖아.”
조프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똑바로 형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 자가 형에게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이잖아. 그녀의 아버지는 매우 욕심 사나운 작자였어. 형의 성과 땅을 빼앗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렸잖아. 그 작자는 형이 마리온을 바래다 주러 가는 걸 방해하고 형의 부하들을 죽였어. 게다가 형을 지하 감방에 가두었어. 그런데 그 일을 다 잊어버린 거야?”
던스탄의 턱이 굳어졌다. “아니. 하지만 날 배신하고 피츠휴에게 간 건 내 부하 월터 에이버리였잖아. 게다가 그의 딸과 결혼까지 했지.”
“다행이지. 월터가 형한테 계속 싸움을 걸어오기 전에 엘렌 피츠휴가 끝장을 내주었으니.”조프리는 형의 눈길을 피했다. 자신의 말이 모두 사실이지만 너무 깊이 파고들고 싶지가 않았다. 악녀의 다음번 남편이 될 상황에선 더욱 싫었다.
“맙소사, 조프리. 그때 너희들이 도와주러 와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하지만 그 일로 내 동생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건 바라지 않아. 왕의 명령 따위 못들은 척 하면 되잖아!” 던스탄은 투덜거렸다.
조프리는 계속 짐을 싸면서 말했다. “이건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두 집안의 싸움을 끝맺어 주려는 왕의 깊은 뜻이 담겨 있어. 그리고 결혼시키는 거야말로 두 집안의 평화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야.”
“물론 그렇지. 하지만 하필 조프 네가.....” 던스탄이 탄식했다.
조프리는 흘끗 형을 보면서 대꾸하고 싶은 말을 눌렀다. 그리고 아무리 살인자라지만 여자를 두려워할 정도로 자신을 무시하는 형을 도전적으로 바라보았다.
던스탄은 민망한 얼굴로 조프리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유감인 건 네가 사랑 없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점이야.”
조프리는 일하던 손을 멈추었다. 던스탄의 솔직한 말에 화가 풀렸다. 형제 가운데 그런 걱정을 할 사람은 던스탄 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런 낭만적인 소리에 코방귀나 뀔 것이 분명했다.
던스탄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소리를 들으면 가장 요란하고 가장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비록 서둘러 한 결혼이긴 하지만 던스탄은 아내에 대한 감정을 솔직히 인정했다.
마리온...... 조프리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형수 마리온과 자신이 곧 결혼할 흉폭한 여자를 비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저절로 비교가 되었다. 던스탄의 성 웨섹스에 머물던 때가 생생히 기억났다. 형과 형수를 지켜보면서도 질투는 나지 않았지만 자신도 그런 사랑을 누릴 기회가 생기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이제 그럴 기회는 사라졌다. 조프리는 말없이 다시 짐을 쌌다. 형이 방을 나가 주길 바랐지만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혀가 굳어 버린 듯했다. 가슴이 무겁고 답답했다. 그런 말을 꺼낸 형이 원망스러웠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음울한 미래가 눈앞에 펼쳐졌다.
크리스마스가 순식간에 지나가고, 캠피온 백작을 뺀 나머지 가족들은 웨섹스를 향해 출발했다. 백작은 감기에 걸려 뒤에 남았다. 조프리는 아버지가 형제들의 설득으로 성에 남기로 결정하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모두들 아버지를 자신들보다 조금 더 나이 든 형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조프리는 아버지의 몸이 전보다 둔해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드 부르그 가 일행은 차가운 빗줄기를 맞으면서 진흙탕 속을 일 주일이나 간 뒤에야 웨섹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일행은 격렬하게 항의하는 마리온을 남겨 두고 또다시 길을 떠났다. 임신한 마리온이 여행길에 나서는 걸 던스탄이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조프리는 피츠휴의 장원(성보다 조금 작은 규모의 저택) 근처 마을을 지나면서 궁상맞은 집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평소 낙천적인 기질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가난했다. 그가 다스릴 백성들은 가난했다.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흠칫하면서 심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엘렌 피츠휴의 아버지는 전쟁에 모든 재산을 쏟아붓고 주민들의 복지에는 신경쓰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장원에 다가갈수록 피츠휴에 대한 경멸감이 더해졌다.
허름한 움막집들을 보면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조프리는 형제들이 놀란 눈으로 흘끔흘끔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요즘에야 재정 상태가 좋아진 던스탄만이 마을의 지저분한 꼴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조프리는 저도 모르게 형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웨섹스의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던스탄은 오래 전에 집을 떠났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다지 가깝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던스탄에게 강한 유대감이 생겼다. 이런 유대감은 나의 새 인생을 좀더 쉽게 해줄거야. 던스탄은 형이기도 하지만 곧 이웃 영주가 될 테니까.
하지만 앞으로의 인생을 생각하면 별다른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이미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피츠휴의 태만으로 망가진 마을의 복지를 재건해야 했다.
일행이 장원의 외벽을 통과하는 동안 조프리는 영지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논밭과 일터, 그리고 마구간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오래된 벽들은 허물어 버리고, 영지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땅을 넓혀 주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조프리는 한숨을 쉬면서 장원을 바라보았다. 장원은 생각보다 컸다. 환영할 일이었다. 적어도 비좁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에서 살지는 않아도 되니까.
장원의 입구에 도착하자 집사가 마중을 나왔다. 키가 작고 머리가 벗어진 남자가 긴장한 얼굴로 정중히 허리를 굽실거렸다.
하지만 집사가 아무리 큰 절을 한다고 해도 장원의 여주인이 마중 나오지 않은 무례를 얼버무릴 수는 없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손님이 방문할 때는 문까지 마중 나오는 것이 관습인데 이 여주인은 드 부르그 가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일행이 집사의 안내를 받아 홀 안으로 들어섰을 때도 여전히 여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홀은 무척 넓었지만 깨끗하지가 않았다. 조프리는 홀 안에서 풍기는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겨울철이라 문을 닫고 살기 때문에 이런 냄새는 아주 빠르게 집 안으로 퍼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바닥에 깔린 골풀(골풀과의 여러해살이 풀)들은 썩고 있었고 벽은 검댕과 때로 얼룩져 있었다.
여자가 집안에 있으면서 집안 꼴을 이렇게 해놓다니....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여자일까? 그런 생각을 하자 자신이 맞을 수수께끼의 신부를 둘러싼 다른 의문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목욕은 하고 사는 여자일까? 머리 속에서 곧 끔찍한 여전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온몸에 무기를 두른 키 크고 난폭한 여전사.... 그는 몸을 떨며 어떤 여자든 대범하게 대처하자고 마음을 다졌다.
조프리는 나직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막연히 뭔가 기대하며 서 있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형제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래 이 장원의 주인으로서 자신들을 환영해 주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그 생각에 그는 흠칫했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나서기 좋아하는 형제들에게 모든 일의 결정을 맡겨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을 꾸려 나가는 일에 대해서는 그도 아버지나 다른 형제들만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형제들은 장부 정리나 하인 다루는 일에는 인내심이 없었다. 그는 앞으로 나서서 겁먹은 집사에게 소리쳤다.
“가서 맥주를 가져오고 파티 준비를 하게. 그리고 여주인을 모셔 오고...”
“마실 것은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영주님.” 집사는 절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피츠휴 아가씨는.....지금 오실 수가 없습니다. 영주님께 나중에 다시 오시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조프리는 그녀의 무례한 행동에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도 이런 무례는 수도 없을 것이다. 다른 형제들도 모두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이먼의 얼굴은 험악하게 굳어졌고, 던스탄은 턱근육을 씰룩거렸고, 스티븐의 핸섬한 얼굴은 성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등뒤에서 형제들이 입은 갑옷 미늘(갑옷에 단, 비늘 모양의 가죽 조각이나 쇳조각)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프리는 얼른 가엾은 집사의 중재에 나섰다. 집사의 잘못이 아니잖은가.
“그래, 지금 어디 계시지?”
집사는 어쩔 줄 몰라하며 홀 뒤쪽에 있는 계단을 바라보았다가 조프리를 둘러싼 위풍 당당한 기사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 꼴을 본 조프리는 앞날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젖었다.
“자신의 방에 있나보군.” 그는 억지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래서 내려오게 해야겠어.”
“조프, 혼자 올라가지마. 독화살을 겨누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사이먼이 경고했다.
조프리의 머리 속에서도 사이먼과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직접 그녀를 볼 때까지는 장래의 아내를 무작정 죄인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집이 된 이곳에서 불안에 떨며 숨어 지낼 생각도 없었다. 그는 형의 경고를 무시하고 집사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방이 따로 있겠지?”
“네, 주인님. 계단 끝에서 오른쪽으로요.” 집사가 말하고는 잽싸게 달아났다.
조프리는 구불구불 휘어지는 계단을 오르면서 한 손을 칼자루에 놓았다. 이보다 더 심한 상황도 많이 만났는데 왜 그렇게 겁을 먹는 거야. 그는 속으로 자신을 격려했다. 하지만 악마 같은 여자가 무장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더구나 그녀는 결혼을 바라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첫 번째 결혼식 소문이 떠올랐다. 배신자 월터 에이브리는 그녀의 유산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제정신 박힌 여자라면 드 부르그 가문하고 손잡는 일을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그는 영주의 침실로 보이는 곳을 지나 작은 문으로 다가가서 가만히 노크했다.
“꺼져!” 거칠고 목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낮고 쉰 소리가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엘렌 피츠휴일까? 조프리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해 다시 노크했다.
“꺼지라니까. 그리고 방해하지마!”
조프리는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노크했다. 조프리는 싱긋 웃었다. 여자는 그를 집사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계속 두드리면 그녀가 뛰쳐나올지도 모르겠군. 그는 계속 노크했다. 그녀의 고함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무거운 문을 뒤흔들면서 벌컥 열렸다. 조프리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 발로 문을 차서 닫았다.
그리고 문을 뒤로 해서 그녀가 도망갈 길을 차단하고 방에 숨어 있을지 모를 적들을 마주했다. 혹시 하인이나 군사, 경비병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방은 자그마했다. 작은 침대와 옷궤만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그리고 집안에 들어설 때와는 달리 방은 깔끔하고 깨끗했다. 그렇다면 엘렌 피츠휴에게는 이 방을 다른 곳보다 깨끗하게 청소해 주는 몸종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가 그 몸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주인은 어디 있소?” 그는 자신을 마주한 여자에게 물었다.
“여주인?” 여자가 소리쳤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내가 피츠휴란 말이에요. 그리고 난 아무한테나 대답하지 않아요! 자, 얼른 꺼져 버려. 당신 심장에 내 이름을 칼로 새기기 전에!” 그녀는 웃웃에서 살짝 빠져 나온 단도 손잡이를 움켜쥐면서 말했다. 조프리는 자신이 결혼할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치고는 큰 키였지만 아마존 여전사처럼 크지는 않았다. 그리고 날씬했다. 하지만 엉덩이까지 내려온 헝클어진 긴 머리 때문에 평가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슨 색깔인지 알 수 없는 머리칼은 빗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몰골을 하고 얼굴을 덮고 있었다. 흉터 있는 얼굴을 가리려는 것처럼.
조프리는 칼을 잡은 그녀의 손에 눈길을 주면서 최악의 사태를 각오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고 깨끗했다. 손톱도 고르고 엷은 색이었다. 적어도 목욕은 하고 사는군. 조프리는 그 사실에 위안을 받으면서 숱많은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순간 그는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문드러진 데도 없고 흉터도 없었다. 흉터로 얼룩지거나 추악하기는커녕......엘렌 피츠휴는.....너무도 예쁜 얼굴이었다. 물론 자신을 노려보며 불을 뿜고 있는 호박색 눈동자는 고양이 눈처럼 험악했다. 하지만 다른 데는 조금도 험악하지 않았다. 피부는 엷은 황금빛이었고 광대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입술은 작고 아름다워서 지금 그녀가 퍼붓고 있는 욕설하고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이 요란하게 뛰었다. 그는 억지로 눈을 떼고 놀란 얼굴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이 여자가 정말 사람들이 그처럼 두려워하고 싫어하던 여자란 말인가? 그녀는 못난이도 아니었고 괴물 같은 여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입은 거칠지만 그저 단순한 여자였다.
“대체 누구기에 감히 날 쳐다보면서 입만 벌리고 있는 거예요? 만일 드 부르그라는 승냥이 떼거지들 심부름으로 온 거라면 당장 꺼져요!” 그녀가 소리쳤다.
“늑대요.” 조프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신부가 소문난 대로 끔찍한 추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아직도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조프리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어 넘겨서 호기심 생기는 그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고 싶었다.
엘렌 피츠휴는 조프리를 제정신인가 의심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드 부르그 형제들이 늑대라는 거요. 그 집안의 문장은 승냥이가 아니라 늑대요.” 조프리가 나지막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나랑 상관없는 집안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돌아가서 내가 침을 뱉더라고 전해요!”
“그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오. 그 형제들 가운데는 성질이 거친 사람들이 있으니까.” 조프리가 충고했다. “자, 가서 여주인 역할을 하시오. 그럼 모두 곧 갈 거요.”
“하!”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가게 한다는 거예요?”
“그건 아주 쉽소.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모두 갈 거라고 장담하겠소.”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성가신 형제들을 내쫓고 싶었다. 종종 간섭이 지나쳐서 문제인 형제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이 집과 여주인을 장악하고 싶었다.
“결혼식! 하, 그만 웃겨요! 난 아무하고도 결혼 안 할 거예요. 더구나 드 부르그 집안과는!”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그는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내가 그렇게 혐오스럽소?” 나직하게 물었다.
이런 사납고 난폭한 여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해야 옳은데도 그는 저도 모르게 마음을 졸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자들과 시시덕거리는 것이 취미인 동생 스티븐처럼 매끄러운 말솜씨도 없었고, 여자를 유혹하는 수단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부러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유혹의 기술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으로 다가왔다. 여자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특히 이 평범하지 않은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면.
엘렌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지만 곧 표정을 숨기고 예쁜 윤곽을 무섭게 일그러뜨렸다. “당신이? 당신이 드 부르그 사람이란 말예요?”
“조프리요.” 그는 느닷없는 욕심이 생겼다. 그녀의 입술로 자신의 이름을 듣고 싶다는.
하지만 그녀는 대신 욕설을 쏟아놓았다. 입이 거칠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사이먼이라도 감탄할 만한 솜씨였다. “그래, 이런 수를 쓰리란 걸 진작 눈치채야 했어!” 그녀는 으르렁거리면서 허리에 찬 험악해 보이는 단도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조프리는 그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이마를 찡그렸다. 예쁜 얼굴 뒤에 원래는 음험하고 난폭한 본성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긴 뭐 놀랄 일도 아니지. 그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예쁜 용모를 보고 잠깐 긴장이 풀렸지만 이 여자의 본성을 망각하지 말아야지. 엘렌 피츠휴는 절대로 보통 여자가 아니니까.
“내가 전에 한 번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었겠죠.” 그녀는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녀가 단도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는 것을 보면서 조프리는 다시금 그녀의 눈이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당신도 그 사람하고 같은 운명을 겪고 싶어요?”
조프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그녀의 지성에 호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단정한 용모와는 달리 엘렌 피츠휴는 야생 동물인지도 모른다. 냉혈하고 사악한 야생 동물.
“날 죽여도 당신이 얻을게 없소, 엘렌 피츠휴. 저 밑에 날 대신할 형제가 다섯이나 있으니까 포기하는 게 좋을 거요.”
그녀를 달래려는 부드러운 말이 오히려 더욱 성미를 돋운 것 같았다. “포기하라구! 난 포기라는 걸 모르는 여자예요, 드 부르그! 미리 경고해야 공평하겠죠, 영주님.” 그녀는 그의 작위를 비아냥거리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턱을 내리고 헝클어진 머리 너머로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럼 결혼해 보시죠, 어디. 당장 후회하게 될 테니까.”
그녀는 그를 거칠게 밀어버리고 문을 열어젖뜨렸다. 조프리는 벽에 등을 기댔다. 마상 창겨루기 시합에 한나절 참가하고 온 사람처럼 피곤했다. 하지만 이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할 절차가 아직 남아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거친 입버릇과 난폭한 행동 때문에 꽤 시달릴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날 죽이려고 할까?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가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헝클어진 긴 머리채가 흔들렸다.
저 머리칼이 담요처럼 남자를 덮어 줄 테지. 조프리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벽에서 몸을 뗐다. 숙녀로 대접해 줄 여자가 아니라 제정신이 아닌 살인자니까 조심해, 조프리.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도 그녀를 보면 어딘가 찜찜한 데가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로 얼굴을 숨기려 드는 것이며 결벽증이다 싶을 정도로 깔끔한 방, 그리고 쫓기는 듯한 표정의 황갈색 눈동자.....그 모두가 그녀의 드높은 악명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눈빛은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한순간 학자 특유의 사고력으로 곰곰 문제를 짚어 보던 그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짜증을 내며 그녀를 쫓아나갔다.
아무리 사악하고 난폭한 여자라 해도 아래층에서 기다리는 늑대들에게 산채로 던져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