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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63)화 (163/164)

163화. 그 후의 이야기(6)

2021.09.23.

"상태는 어떻지?"

"치료는 무사히 끝났지만, 워낙 노령이시라서요. 버티실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그런가."

카벨레누스는 잠든 멜타 공작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철혈공작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나약해 보였다.

"일단 수도에 연락부터 해둘까요?"

"멜타 공작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연락해둬."

"네?"

"어차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아닌가."

가제프는 조심스럽게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무표정한 상관의 얼굴만 봐선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바로 연락해. 시신을 수도로 보내주겠다고 말이야."

"……."

"다시 한 번 말해줘야 하나?"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가제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멜타 공작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나, 반대로 그가 카벨레누스에게 잘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카벨레누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가제프에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저 카벨레누스의 선택을 존중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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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카벨레누스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멜타 공작을 바라봤다. 창백하게 질린 노인의 얼굴을 보더라도 연민은 느껴지지 않았다. 애당초 두 사람은 얼굴 몇 번 보지 못한, 살갑지 않은 관계였다. 그럼에도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건, 얼굴 하나가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이제는 흐릿해진 기억 속 어머니의 얼굴이. 뒤늦게 안 사실이나, 멜타 공작도 자신처럼 쌍꺼풀 없이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닮은 것은 오히려 자신 쪽이었다.

"……."

카벨레누스는 쓰게 웃었다. 핏줄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알 수 없지만, 피를 타고 이어진 흔적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사실이 묘하게 족쇄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멜타 공작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신은 정말로 존재했나."

"……."

몽롱한 눈은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카벨레누스는 인상을 쓴 채로 몸을 돌렸다. 사람을 부를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멜타 공작의 손이 성급하게 그의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신께서 내 부름을 들어준 모양입니다."

"……."

"이럴 거면, 진작 신께 빌어볼 것을."

멜타 공작이 중얼거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카벨레누스는 자신을 잡고 있는 손을 밀어내려다가 멈췄다.

"죄송했습니다."

"……."

"늦었다는 거 알지만, 이렇게 되니 역시 이 생각만이 들더군요. 사과했어야 했다고."

"……."

카벨레누스는 말없이 멜타 공작을 내려봤다. 얼마나 힘을 준 건지, 멜타 공작의 손등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 * *

"왜 그렇게 넋을 잃고 있어요."

"딱히."

"혹시, 그 사람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알리시아가 걱정스럽게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카벨레누스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내게 사과하더군."

"사과요?"

"깨어나 정신도 못 차리고 있던 주제에 날 보면서 사과를 하더군. 스스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심경에 변화라도 생긴 모양이야."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어요?"

"모른 척했어."

"왜요?"

"죽기 전에 하는 사과라. 의도가 뻔하잖아. 자기 마음 편해보자고 하는 거지."

카벨레누스는 덤덤히 대답하며 마저 알리시아의 다리를 주물렀다. 아직 제대로 배가 부르진 않았지만, 카벨레누스는 벌써부터 임신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괜찮다 말해도 미카엘을 가졌을 때, 못 해준 것들이 자꾸만 생각났으니까.

"어쩌면,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담아둬?"

카벨레누스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전쟁 때, 당신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번에 애꿎은 미카엘에게 접근하는 것 같아서 화를 냈었는데, 나중에 미카엘이 알려주더라고요. 할아버지가 아빠와 사탕을 나눠 먹으라 했다고요."

"……."

"그 이야기를 듣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공작은 미카엘을 통해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게 아닐까 하고요."

"그래서 나 보고 사과를 받아주라는 거야?"

"아뇨. 그럴 리가요."

알리시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바로 말을 이었다.

"사과를 받고, 말고는 피해자가 선택할 문제죠. 누구도 강요할 순 없어요. 하지만 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는 것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

"용서할 필요 없지만, 사과는 제대로 받아야 하잖아요."

알리시아는 다정히 카벨레누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 * *

"고령이라 회복이 불가능할 거라 하던데,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시군요."

"……."

"일부러 수도에는 시신을 발견했다고 알려두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이번 일을 벌인 자들의 윤곽이 드러날 테니까요."

"배려해주셨군요."

"배려라기보다는 당신이 사라지면 일이 번거로워질 것을 아는 것뿐이죠."

카벨레누스는 벽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회복하면 바로 돌아가실 수 있게 조치해두죠. 떠날 준비가 되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후엔 굳이 인사는 필요 없겠지요. 사람을 붙여드릴 테니, 적당히 있다가 가십시오."

카벨레누스는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뗐다. 모른 척하려 해도 얼굴에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워 방에 머무는 시간이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이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꿈을 꾼 것 같았습니다."

"……."

"하지만, 꿈이 아니었지요."

"……."

"압니다. 제가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게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지."

멜타 공작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선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내 자부심과도 같은 아이였습니다. 잘못된 방식이었지만, 당시의 제게는 그것이 사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제 딸도 그렇게 살길 바랐습니다."

"……."

"그래서 더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최고가 되길 바랐는데, 약한 소리를 하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언제나 절 실망시키지 않던 아이가 자꾸만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습니다."

"……."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나약하다 비난하고, 한심하다 비아냥댔습니다. 상처 입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또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는데."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멜타 공작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딸이 죽고, 그 아이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알았습니다. 실은 제 딸은 단 한 번도 황후의 삶을 원하지 않았다는 걸.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걸 꿈꿨다는 걸요."

"……."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

"내심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지금껏 완벽하다 여겨왔던 가치관이 무너진다는 것을요. 그래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금 멜타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

"죄송했습니다. 그때, 혼자 있던 전하의 손을 외면해서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카벨레누스는 여전히 뒤돌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사과를 받아줄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사과를 받는다 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쉽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카벨레누스는 몸을 돌렸다.

"전부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압니다."

"솔직히 이젠 기억도 안 나는 일이고, 굳이 머리 굴려 가며 지난 일을 회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당신에겐 소중한 딸이었을지 몰라도, 내겐 썩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으니까요."

"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었다. 예전이라면, 별생각이 없었을지 몰랐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 또한 잘못을 저질렀고 만회할 기회를 부여받았었으니까.

"아내가 말하길,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후회를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저 또한 그랬죠."

"……."

"솔직히 당신에 대한 별다른 악감정은 없어서 용서를 운운하기도 애매하나, 사과를 받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군요."

카벨레누스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깊은 한숨을 뱉었다. 마주친 노인의 눈은 젖어 있었다.

"솔직히 살가운 사이가 될 자신은 없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제 가족들에게 해가 될 것 같다면 가차 없이 해낼 겁니다."

"……."

"그런데도 상관없다면 가끔 정도는 찾아와도 상관없습니다."

꼿꼿하던 노인의 허리가 굽어졌다. 언제나 당당하던 어깨는 초라할 정도로 웅크려진 채였다. * * *

"방금 봤어? 아기가 움직였어!"

"동생이 얼른 미카엘을 보고 싶은가 봐."

"진짜?"

"그래서 미카엘이 동화책을 읽어주면 반응하잖아."

"앗, 그러면 다른 동화책도 읽어줄래! 기다려봐!"

신나서 문 쪽으로 달려나간 미카엘의 눈이 커졌다. 미카엘이 손을 대기도 전에 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아빠!"

"어디 가려고."

"아기가 동화책을 좋아해서 새 동화책을 가져오려고요."

"언제는 동생 싫다면서."

"내가 언제요! 나는 그런 적 없거든요!"

"그래. 그렇겠지."

카벨레누스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카엘은 양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은 채 아빠의 뒤를 쫓았다. 카벨레누스의 품에 들린 상자 속 내용물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게 뭐예요?"

"선물."

"무슨 선물이요?"

"궁금하면 뜯어봐."

카벨레누스는 테이블에 상자를 내려놨다. 미카엘은 콧노래를 부르며 잽싸게 상자를 열었다.

"사탕이다!"

"당신이 사 온 거예요?"

"아니. 오늘 수도에서 온 거야."

"수도요?"

"구해준 보답이라더군."

"선물을 보낼 정도면 수도가 많이 안정화되었나 보네요."

"그 정도도 못 해내면, 멜타 공작이라는 이름이 우스워지지."

미카엘이 상자에 홀린 사이, 카벨레누스는 재빨리 알리시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와! 장난감도 있…… 어? 여기 아빠 이름 적혀 있는데?"

"내 이름?"

"응! 이것봐! 여기 적혀 있잖아. 카벨레누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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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이 한껏 뿌듯한 얼굴로 장난감 병정의 발바닥을 가리켰다. 아이는 이제 능숙하게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나 보고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놀라는 건가."

카벨레누스는 어이없어 하며 턱을 괬다. 장난이라 하기엔 상자에 적힌 장난감들은 전부 카벨레누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럼 이거 다 아빠 거예요?"

"나는 필요 없으니까, 전부 너 가져."

"진짜요?"

"그래."

순순히 떨어진 허락에 미카엘의 얼굴이 환해졌다. 알리시아는 테이블에 쌓인 장난감을 빤히 보다가 이내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장난감들은 전부 깨끗했지만, 자세히 보면 어쩔 수 없이 오래된 티가 났다. 오래전에 사뒀을 확률이 컸다.

"생각보다 오래된 감정이었나 봐요."

"어울리지 않은 짓을 하는 거지."

카벨레누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미묘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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