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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62)화 (162/164)

162화. 그 후의 이야기(5)

2021.09.20.

"움직이면 안 돼요. 가만히 있어요."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지?"

"조금만 더요."

"그 말은 아까도 들은 것 같은데."

"맞아. 엄마, 아까도 그랬어."

미카엘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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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시아는 불만을 토하면서도 애써 자세를 유지하는 부자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조금만 더 참아봐요. 금방 끝나요."

"생각보다 버겁군, 모델이라는 건."

알리시아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유려한 선이 그어지고, 카벨레누스와 그의 무릎에 앉은 미카엘의 모습이 캔버스에 담겼다.

"이렇게 보니 둘이 진짜 닮은 거 알아요?"

"그래도 나는 엄마를 더 닮았어."

미카엘은 새초롬하게 고개를 저으려다가 황급히 다시 자세를 고쳤다. 엄마는 좋았지만, 엄마의 그림 모델이 되는 건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이제 두 사람 모두 움직여도 돼요."

"진짜?"

"응. 다 그렸어."

"나, 엄마 그림 볼래! 내가 가장 먼저 볼 거야!"

미카엘이 먼저 폴짝 뛰어 카벨레누스의 무릎에서 내려와 알리시아를 향해 달려갔다. 카벨레누스는 혀를 차면서도 미카엘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역시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잘 그려."

"그래?"

"응! 엄마가 최고야!"

미카엘은 두 팔을 벌려 알리시아에게 폭 안겼다. 엄마는 더는 부쩍 큰 자신을 안아 올리진 못했지만, 포옹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잘 그렸군."

"한동안 붓을 놓고 지내서 손이 둔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에 알리시아는 웃었다.

"설령 둔해졌다 해도 나보단 낫겠지. 나는 영 재능이 없는 것 같거든."

"그럼 그리는 것 대신, 모델을 많이 해주세요."

"모델?"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흐릿해지기 마련이지만, 그림은 변하지 않잖아요."

알리시아는 천천히 스케치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같은 사람임에도 지금의 스케치 속의 카벨레누스는 오래전 그렸던 그의 그림과는 차이가 있었다. 시간은 항상 흐르고 있었다.

"못해도 매년 한 번 이상은 우리 가족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함께 확인하면서 추억할 수 있게끔요."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완벽하진 않군."

"어째서요?"

"이 그림에는 그대가 없잖아."

"아."

카벨레누스가 가볍게 캔버스 끝을 두들겼다.

"이왕 기록을 남길 거라면, 셋이 있는 그림이 좋지."

"그게 좋겠네요."

알리시아는 펜을 들어 스케치에 자신이 있을 자리를 표시해두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캔버스가 훨씬 더 찬 느낌이 들었다.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나?"

"지금은 위치만 표시해놓은 거고 실제로 그릴 때에는 거울을 보고 그려야죠. 자화상은 별로 그려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없긴 하지만요."

"정 힘들겠다 싶으면 괜찮은 화가라도 알아보지."

"아뇨. 힘들어도 제 손으로 그리고 싶어요."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이 무척 다정하다. 알리시아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부 그리고 싶어요."

"그림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야겠군."

"클라우드 경에게 휴가라도 주시면 더 좋고요."

"요즘 가제프와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 같은데."

"지금 질투하시는 거예요?"

"그건 늘 하고 있지. 그저 참을 뿐."

카벨레누스가 허리를 굽혀 알리시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고사리손이 잽싸게 옷자락에 달라붙었다.

"엄마, 나도 뽀뽀! 뽀뽀!"

"봐. 지금도 잘 참고 있잖아."

카벨레누스는 피식 웃으며 미카엘의 머리카락을 멋대로 헝클어트렸다. 미카엘이 두 팔을 버둥거리며 반항했지만, 짧은 팔로는 어림도 없었다. 미카엘은 양 눈썹을 추켜올리며 이를 드러냈다.

"두고 봐요. 내가 더 커지면-."

똑똑-. 문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문을 열고 나타난 건, 가제프였다.

"드래곤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네?"

"아냐. 그래서 무슨 일이지?"

"수도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서신?"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 * * 집무실 문이 닫혔다. 카벨레누스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방해꾼이 없으니 편히 말해봐. 뭐가 문제지?"

"두 분의 결혼식에 참석한 수도 귀족 중 아직도 수도로 돌아오지 않은 귀족이 있다고 행방을 묻더군요."

"귀환 중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결혼식을 치른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슈바르한과 수도가 멀긴 해도 지금쯤이면 왕복하고도 한참 남았을 시간이었다.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우연이거나, 혹은 타의거나."

"아무리 경호를 잘한다 해도 수도보단 약할 테니, 적에게는 기회겠지. 그래서, 실종된 귀족이 누구지?"

"그게……."

가제프는 미간을 찡그렸다가 다시 입을 뗐다.

"멜타 공작이십니다."

"다른 자도 아니고, 그자가?"

"저도 그게 이상해 따로 알아봤는데, 아무래도 내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분?"

"새 황제에 대한 불만이 있었나 봅니다."

"더 자세히 말해봐."

카벨레누스의 눈이 얄팍하게 가늘어졌다. 가제프는 빠르게 한숨을 푹 쉰 후, 보고를 이어갔다.

"전하께서 황제가 되시길 바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황제보다는 괴물 쪽이 낫다는 건가?"

"전하께서 괴물이라는 여론이 나온 것도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전하께서 지금껏 해오신 업적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전하의 부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코앞만 보고 전전긍긍하느라 그렇지."

카벨레누스는 턱을 괬다. 자신이라고 해서 무작정 황위를 떠넘기고 온 게 아니었다. 지금은 미숙하게 보일지언정, 새 황제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능력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데다가 열정도 넘쳤다. 변화를 맞이하게 된 제국에게는 어울리는 군주상이었다.

"멜타 공작을 처리한 것도 그 때문이겠군."

"지금으로선 정말로 처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럴 확률이 큽니다."

멜타 공작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새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의 기반이 약해지고, 카벨레누스에게도 수도 정치에 개입할 여지가 생겨버린다.

"내가 외조부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어쩌려고."

"멜타 공작의 밑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두 분의 관계가 어떤지는 뻔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내게 자랑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내 복수를 해줬다면서 말이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수도 일에는 개입하고 싶진 않지만, 일단 확인은 해봐야겠지."

카벨레누스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찾으실 겁니까?"

"어쩔 수 없지. 그자가 없으면 수도는 다시 시끄러워질 테고, 자꾸만 날 끌어들이려고 할 테니 말이야."

카벨레누스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혀를 찼다. 수도에 머무는 시간은 황제의 고문으로 일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했다. 번거로운 일을 감당하면서까지 수도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수색대를 꾸려 멜타 공작의 신변을 확보할 수 있게끔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네?"

"우리에겐 이미 완벽한 수색대가 있잖나."

카벨레누스는 팔짱을 꼈다. 어느덧 집무실에는 풍성한 털을 자랑하는 짐승이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 * *

"이러다간 정말 죽겠군."

멜타 공작은 쓰게 웃으며 상처를 눌렀다. 옷으로 대충 지혈해두긴 했지만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곳은 설원 한 가운데였다. 부상을 입은 몸은 무리하게 움직일 수 없었고 설령 움직인다 해도 방향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보온 효과가 있는 마차에 머물며, 챙겨온 식량과 물만 축내며 버틸 뿐이었다.

"……."

마지막을 직감해서일까, 괜히 옛 생각이 난다. 멜타 공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을 보며 쓰게 웃었다. 지금껏 수도 없이 전쟁을 치렀다. 다들 겁을 먹고 제 몸 지키기에 급급할 때, 자신은 누구보다 앞장서 싸웠다. 죽을 뻔했던 날도 많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악착같이 검을 잡으며 기어코 살아남아 오래되었다는 것이 가장 자랑이었던 멜타 가문을 제국 최고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니 그렇다고 착각했다. 그는 '최고'가 좋았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었다. 일부러 허약한 황자를 골라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고, 딸과 결혼시켜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 역시 최고로 남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한 번도 실패해본 적 없던 그는 자신의 계획과 빗나간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네가 죽은 날도 이런 날이었는데."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도 맑았다. 멜타 공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아직도 딸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평생 그의 입맛에 맞게 최고로 살아왔던 딸이었다. 훌륭한 황후가 될 것이라 예상했고, 그만큼 이성적으로 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딸은 자신의 남편을 사랑했다. 받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집착했고, 질투했으며, 그렇게 무너져갔다. 하지만 그는 딸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고작 사랑 때문에 우는 딸이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멜타 공작은 더는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강도 높은 비난은 딸의 입을 틀어막았다. 딸은 더는 그를 찾지 않았다. 대신, 아이를 가졌다.

"……."

멜타 공작의 잇새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쌓는 건 한참이었는데,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딸은 남편의 입맛대로 이용당했다. 딸은 배 속 아이가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는 증거라 여겼고, 기꺼이 아버지의 수족들을 쳐내고 남편의 기반을 다져줬다. 정작 모든 일을 끝냈을 때, 딸에게 주어진 건 사랑 아닌 배신이었지만. 그때부터였다. 딸은 완전히 미쳤다. 그리고 비극 역시, 시작됐다. 멜타 공작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처참한 몰골을 한 딸의 주검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분노였다. 하지만 복수해야 하는 대상은 이미 없었다. 그날의 비극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 아이뿐이었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 증오해 마지않는 원수의 상징을 가진 아이.

"우스운 일이지. 이제 와서 어쩌겠다고. 하나……."

멜타 공작의 눈 초점이 흔들렸다. 미련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을 지울 수 없었다. 아이의 반쪽은 원수의 것이나, 다른 반쪽은 딸의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 늦은 후였다. 하지만……. 멜타 공작의 손에 서서히 힘이 빠졌다. 정신력으로 겨우 버텼지만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정말 끝인가.'

흐릿해지는 정신 속, 멜타 공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약해진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믿지도 않았던 신을 찾고 있었다. 신이 있다면, 그래서 지금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면. 단 한 번만 기회를 주시길. 그때였다.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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