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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61)화 (161/164)
  • 161화. 그 후의 이야기(4)

    2021.09.16.

    "이번에 공작께서 도와주신 걸 보고, 혹시 오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번 일로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지네요."

    "……."

    "사과하실 거면 사과하고, 아닐 거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어쭙잖은 태도는 오히려 사람의 기분만 상하게 만드니까요."

    알리시아는 그 말을 끝으로 미카엘의 손을 잡고 걸어갔고, 멜타 공작은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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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 할아버지가 나쁜 짓이라도 했어?"

    "맞아. 나쁜 짓을 했어."

    "엄마한테?"

    "아니, 아빠한테."

    "아빠?"

    미카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이가 본 아빠는 나쁜 짓을 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왜? 안 믿겨?"

    "응. 아빠는 강하잖아."

    "아빠도 처음부터 강한 사람은 아니었어."

    "으음……."

    미카엘은 엄마의 손을 잡고 남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짓을 당하는 아빠의 모습은 떠올리기 힘들지만, 엄마가 틀린 말을 할 리는 없었다. 아이에게 있어서 엄마는 절대적인 신과도 같았다.

    "그럼 할아버지는 나쁜 사람이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아빠한테 나쁜 짓을 했다면서. 그럼 나쁜 사람이잖아."

    미카엘은 눈에 힘을 바짝 줬다. 아빠가 짓궂게 굴 때마다 미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당하는 건 싫었다.

    "할아버지가 아빠에게 나쁜 짓을 한 건 맞지만, 왜 그랬는지는 말하지 않았거든."

    "그게 중요해?"

    "좋은 의도가 꼭 좋은 결과가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미안. 우리 아드님에게는 어려운 말이었나 봐."

    "안 어려워. 그냥 조금 이해가 안 될 뿐이야."

    어렵다고 인정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미카엘은 애써 아는 척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리시아는 그런 아들이 퍽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있지, 미카엘."

    "응. 엄마."

    "미카엘은 동생이 생기면 어떨 것 같아?"

    "동생?"

    "응. 귀여운 동생."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인데, 미카엘의 걸음이 멈췄다. 알리시아를 올려다보는 미카엘은 예상과 달리, 잔뜩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동생 싫어."

    "싫어?"

    "응. 싫어."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알리시아는 당황해 눈을 껌벅거렸다. * *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근에서 복병이 나타났군."

    "웃지 말아요."

    "알았어. 안 웃을게."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를 끌어안았다. 알리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카벨레누스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전 당연히 미카엘이 동생을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

    "예전에 둘이서 살 때, 근처에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때 무척 좋아했거든요."

    "걘 진짜 동생이 아니니 그런 거겠지. 엄마를 빼앗길 일이 없잖아."

    "절 빼앗긴다고요?"

    알리시아가 얼굴을 빼꼼 들었다.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이잖아. 당연히 엄마의 관심을 앗아가는 존재가 생기는 걸 달갑게 생각할 수 없겠지."

    "하지만 미카엘은 당신과도 잘 지내고, 펠시나, 다른 사람들도-."

    "그들과 동생의 존재는 다르지."

    "다르다고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미카엘의 옆에 있는 이들은 전부 미카엘을 예뻐라 하는 어른이고, 미카엘만큼이나 당신과 가까운 사람이 없지. 나조차도 그대와 피를 나눈 것까지는 아니니까."

    "미카엘이 동생을 경쟁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원래 이런 건 새끼들이 더 눈치가 빨라. 작고 여린 개체일수록 더 보호받고 관심받는 걸 알거든. 새끼가 귀엽게 생긴 게 그럴수록 생존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야."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죠? 동생이 생겼다는 걸 말하지 않을 수도 없잖아요."

    지금이야 티가 안 나지만, 슬슬 배가 불러올 테고 대공비의 임신 소식에 다들 관심이 쏠릴 게 될 것이었다.

    "역시, 미리 말해두는 게 좋겠죠? 잘 설명해주면 분명……."

    "벌써부터 엄마가 동생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

    "미카엘은 눈치가 빨라. 이미 동생 이야기를 한 번 들었으니, 충분히 예민해졌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리시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 테니까."

    "어떻게 하려고요?"

    "대화를 나눠야지."

    "대화요?"

    "슬슬 미카엘의 머릿속이 보이기 시작했거든."

    걱정하는 알리시아와 달리, 카벨레누스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 * *

    "더 세게 휘둘러."

    "허억, 헉, 언, 제까지 휘둘, 러야 하는데요?"

    미카엘은 목검을 쥔 채 비틀거렸다. 오늘 목검을 얼마나 휘둘렀는지 이젠 팔이 후들후들했다.

    "앞으로 열 번 더."

    "여, 열 번, 이요?"

    "열다섯 번."

    "이건-."

    "스무 번."

    하나씩 올라가는 카벨레누스의 손가락에 미카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훈련을 할 때의 카벨레누스는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검을 배우는 걸 때려치울 게 아니라면 잔말 말고 따르는 게 나았다.

    "열아, 홉, 스물! 됐죠! 다 한 거 봤죠!"

    "그래. 잘했어."

    카벨레누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카엘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옷이 엉망이 되는 건 싫었지만 주저앉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숨이 차다 못해 폐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전보다 많이 늘었네."

    "진, 허억, 진짜요?"

    "자세도 많이 좋아졌어."

    카벨레누스는 제법 닳은 목검을 보며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미카엘이 검을 배우는 게 썩 달갑지 않았는데, 막상 실력이 쑥쑥 느는 아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뿌듯했다. 제법 그럴싸한 자세를 해내는 미카엘을 볼 때마다 다들 아빠를 닮았다는 소리를 하곤 했으니까.

    "내일은 활을 배워볼래?"

    "활이요?"

    "익숙해지면 같이 사냥을 갈 수도 있으니까."

    "진짜요?"

    미카엘이 재빨리 몸을 일으킨 후, 허겁지겁 심호흡을 했다. 급한 호흡에 폐가 아팠지만 그것보다는 사냥 소리가 더 반가웠다.

    "실제로 사냥을 갈 수 있는 건, 네 실력이 받쳐줄 때의 이야기겠지만."

    "걱정 말아요. 금방 늘 거예요. 다들 그러잖아요. 나보고 천재라고요."

    "그야 당연하지. 네가 누구 아들인데."

    "누구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잘 한 거예요."

    "정확히는 내가 잘 가르친 거지."

    잠깐 튄 불꽃은 카벨레누스가 던진 수건에 쉽게 꺼졌다. 미카엘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네 동생이 생겼어."

    "그게 지금 해야 하는 소리예요?"

    "갑자기 생각나서."

    "……."

    "어차피 알고 있잖아. 아니야?"

    카벨레누스는 덤덤히 물통을 미카엘에게 던졌다. 미카엘은 물통을 능숙하게 받으면서도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맞아요. 알아요."

    "그런데 왜 모른 척해."

    "내가 알면 엄마가 동생 이야기만 할 거잖아요."

    "똑똑한데?"

    "지금 약 올리는 거죠?"

    미카엘의 양 눈썹이 위를 향했다.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미카엘의 옆에 앉았다.

    "여자애야."

    "여자애요?"

    "네 동생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다 아는 법이 있지."

    카벨레누스는 느긋하게 턱을 괬다. 미카엘은 일부러 보란 듯이 고개를 휙 돌린 채 물통에 입을 댔다.

    "동생이 여자애든, 남자애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기사가 되고 싶다면서."

    "기사랑 동생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네 동생은 훌륭한 아가씨가 될 테니까. 멋진 기사가 필요한 아가씨 말이야."

    "……."

    흔들린다. 카벨레누스는 요동치는 아이의 눈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책에서 보니, 태어난 아이는 대충 이 정도 크기라고 하더군."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돼요?"

    "엄청 작지. 게다가 약하기도 무척 약해. 목 하나 혼자 못 가누거든."

    "……."

    "그런데 하필 이곳은 슈바르한이잖아. 다른 지역보다 험준하고 위험하지."

    미카엘의 얼굴이 부쩍 어두워진다. 카벨레누스는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며 훈련장 한쪽을 가리켰다.

    "재작년에 잡은 짐승의 모피야. 마을에서 난동을 부리던 놈을 잡아 온 건데, 저놈을 잡기 위해서 기사 셋이 다쳤어."

    "……."

    "강한 기사들도 그렇게 당하는데, 아이는 어떨 것 같아?"

    "……위험하겠죠."

    미카엘이 더욱 어두워진 낯빛을 하고는 중얼거렸다. 아이의 풍부한 상상력은 이미 모피의 주인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아이는 못 이길 거야."

    "하지만 아빠가 있잖아요."

    쉽게 넘어갈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카엘은 깊어지는 생각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그럴수록 목소리를 낮출 뿐이었다.

    "내가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검을 배울 필요도 없지 않아?"

    "그건……."

    "하긴, 취미로 배우는 거면 상관없긴 하겠군. 약자를 돕는 건 기사의 도리일 뿐이잖아."

    "기사의 도리요?"

    미카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뻔한 수였지만 마음이 들썩거렸다. 아이에게 어려운 단어는 그럴싸하게 들리는 경향이 있었다.

    "기사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 말이야."

    "기사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

    "그런 것도 못 하면서 기사가 꿈이라고 말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안 그래?"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이 들고 있던 물통을 집어 들어 여유롭게 마셨다. 미카엘은 태연해 보이는 카벨레누스를 한참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한 번 생각은 해볼게요."

    "그러던지."

    "대신, 오늘 사탕 하나 더 먹을래요. 물론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고요."

    "씻고 이따가 집무실에 와서 가져가."

    "알았어요."

    미카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바닥에 누웠다. 카벨레누스는 나름 상념에 찬 미카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실제로 보면, 예쁠 거야."

    "그건 또 어떻게 확신해요?"

    "알리시아의 딸이잖아. 알리시아를 닮을 수밖에 없겠지."

    "……."

    그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관점인데. 미카엘의 미간이 좁아졌다. 엄마를 닮은 여동생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상상으로 그려본 동생의 얼굴은 생각보다 나쁜 것 같지 않았다.

    "그럼 동생은 언제 태어나요?"

    "내년에."

    "한참 남았네요."

    미카엘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날짜를 셌다가 얼굴을 구겼다. 동생이 금방 나타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길었다.

    "왜? 기다려져?"

    "그냥 좀 궁금해진 것뿐이에요."

    "그런 것치곤 기대한 표정인데."

    "아니거든요."

    미카엘의 눈에 힘이 들어갔지만, 카벨레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카엘의 머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너무 머리 쓰지 말고 가볍게 생각해."

    "가볍게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이잖아. 생각은 동생을 만나고 난 후부터 해도 늦지 않아."

    "……."

    "막상 만나보면 또 느낌이 다를 수 있거든."

    예전의 자신 역시, 알지 못했으니까.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스럽다 여길 수 있게 될 줄은. 카벨레누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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