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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60)화 (160/164)
  • 160화. 그 후의 이야기(3)

    2021.09.13.

    꿈을 꾸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알리시아는 느릿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힘을 사용하는 것이 능숙해졌기 때문일까, 그녀의 세계는 더는 텅 빈 설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알리시아는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시선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난 짐승이 작은 꼬리를 열심히 흔들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늑대, 아니. 그보다는 강아지 같은데……."

    알리시아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녀는 예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몸을 낮춰 아기 늑대와 시선을 맞췄다. 새까만 털에 황금색 눈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기 늑대는 그녀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끔 했다.

    "안녕."

    "……."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참 맑다. 알리시아는 싱긋 웃으며 선뜻 손을 내밀었다. 늑대는 빤히 알리시아를 보다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예쁘네."

    꿈속이라,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만큼은 명확하게 느껴졌다. 알리시아는 애교 부리듯 손바닥에 뺨을 비비는 어린 늑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아이가 들을 수 있게끔 귀에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만나서 반가워, 우리 예쁜 아가."

    * * *

    "일어났어?"

    "……."

    "곤히 자는 것 같아서 일부러 안 깨웠는데, 몸은 괜찮아? 어제 결혼식부터 이것저것 무리해서 피곤했을 텐데."

    "……."

    "정 피곤하면 더 자."

    카벨레누스는 웃으며 알리시아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알리시아는 멍하니 눈만 깜박거릴 뿐이었다.

    "알리시아?"

    이상함을 감지한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의 뺨을 감쌌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숨을 삼켰다.

    "무슨 일 있었어?"

    "꿈을 꿨어요."

    "꿈?"

    "늑대를 만났어요."

    "마물들이 또 그대의 무의식에 들어간 거야?"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찡그려지자, 알리시아는 서둘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물이 아니라, 아기 늑대요."

    "아기 늑대?"

    "미카엘을 가졌을 때도 비슷한 꿈을 꿨었어요."

    "그 말은……."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아이가 생긴 것 같아요."

    "……."

    "당신 머리카락 색처럼 새까만 털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걸로 봐선 아무래도……."

    알리시아는 하던 말을 멈추고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이러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목에 팔을 둘러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기뻐해도 돼요."

    "……."

    "우리 아이잖아요."

    "……."

    "미카엘이 그랬던 것처럼요."

    아들의 이름에 카벨레누스의 눈빛이 곧아졌고, 알리시아의 입가에도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나는 아직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괜찮아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아이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줄 자신은 있거든요."

    "……."

    "우리 아이들을 위해 함께 노력해요. 그러면 될 거예요."

    알리시아의 손이 카벨레누스의 뺨에 닿았다. 사내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 * * 입술 사이로 새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알리시아는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내려다보며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오늘따라 날이 좋은 것 같네."

    "이모님이 저희 온다고 신경 써주신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그런가 봐."

    알리시아는 웃었다.

    "여기만 오면 숨이 확 트이는 것 같아."

    "이모님이 좋아할 법한 곳이죠. 이곳에 서면 슈바르한이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어디든 간섭할 수 있거든요."

    "정말 그렇겠다."

    알리시아가 낭랑하게 웃었다. 가제프의 말대로 이곳에서는 슈바르한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모르코 부인이 이걸 좋아하려나."

    "누가 준비한 선물인데요. 당연히 좋아하실 겁니다."

    "그러면 좋겠다."

    알리시아는 웃으며 상자를 뜯었다. 상자 안에는 꼼꼼히 포장된 술병이 들어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고집까지 부려가면서 성에서부터 직접 들고 온 술이었다.

    "안녕. 벌써 한 달 만이지?"

    알리시아는 술을 품에 안은 채, 허공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곳에 있는 사람이라곤 자신과 카벨레누스, 그리고 가제프. 이렇게 셋이 전부였지만, 어쩐지 고개를 돌리면 어디선가 모르코 부인이 나타날 것 같았다.

    "실은 좋은 소식이 있어서 알려주려고 왔어."

    알리시아는 배를 감쌌다. 아직까지는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미카엘의 동생이 생겼어. 그것도 검은 머리에 황금색 눈을 가진 예쁜 아이야. 그리고……."

    알리시아는 잠깐 카벨레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건 카벨레누스도 마찬가지였다.

    "실은 카벨레누스와 아이 이름을 고민해봤는데, 그가 그러더라. 모르코 부인과 우리 어머니의 이름에서 철자를 따서 짓는 게 어떻겠냐고."

    "철자라니……."

    가제프는 자신도 모르게 카벨레누스와 알리시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름에서 철자를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건, 가족에게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남자아이였으면 경의 이름을 땄을 텐데, 여자아이거든."

    "그 문제는 셋째 때 다시 고려해보면 되지."

    "아직 둘째도 태어나지도 않았잖아요."

    "계획이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

    카벨레누스는 뻔뻔스럽게 웃었고, 가제프의 눈가에는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고였다. 알리시아는 상반된 둘의 모습을 보며 가지고 온 술병을 고쳐 쥐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술병을 따 바닥에 내려놓았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공기 중에 퍼졌지만, 바람과 뒤섞여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숙성된 술에 남아 있는 나무향이 진하게 느껴져 모르코 부인을 떠올리게 했다. 알리시아는 눈가를 적신 채,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메르시아라고 해. 우리 아이의 이름. 모르코 부인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어."

    그 순간, 바람이 분 건 단지 우연이었을까. 알리시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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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아침부터 등산이라니 고생이 많군."

    "저는 등산도 아니죠. 펠시가 도와줬잖아요."

    알리시아는 제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올라갈 엄두가 쉬이 나지 않은 산에 올라갈 수 있었던 건 펠시의 도움이 컸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괜히 감기라도 걸리면 힘들잖나. 약도……."

    카벨레누스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그는 약에 관해선 할 말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미카엘도 일어났겠죠?"

    카벨레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알리시아가 눈치껏 말을 돌렸다.

    "지금 시간까지 안 일어나면 게으른 거지."

    "아이들은 잠이 많은 편이니까요."

    알리시아는 펠시를 돌아봤다. 마물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장소에 있어도 쉽게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아까 일어났다.]

    "다행히 일어났네요."

    "그럼 같이 식사를 하면 되겠군."

    "그러면 되겠네요. 넷이 같이 먹으면……."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가 절 보는 시선에 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왜 그래?"

    "별 건 아니고, 미카엘이 밖에 있나 봐요. 제가 미카엘을 데리고 갈 테니 먼저 가 있을래요?"

    "내가 다녀올게."

    "저 혼자 걷고 싶어서 그래요. 먼저 가 있어요."

    알리시아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싱긋 웃었다. 그녀가 저렇게 나오면 카벨레누스로서는 더 설득할 명분이 없었다.

    "얼른 와. 기다릴 테니까."

    "물론이에요."

    * * *

    "엄마!"

    알리시아를 발견한 미카엘이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알리시아는 품에 안기는 아들을 끌어안으면서도 그 뒤에 선 멜타 공작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슈바르한 대공비 전하시군요. 맞지요?"

    "네. 맞아요."

    알리시아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카엘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멜타 공작께선 오늘 수도로 떠나시지 않나요?"

    "오후에 떠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바쁘시겠네요. 먼 길을 오셨으니 짐이 한두 개가 아닐 테니까요."

    명백한 축객령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무뚝뚝한 노신사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알리시아는 이마를 찌푸리며 미카엘의 얼굴을 제 품으로 감췄다.

    "아이가 참 순하더군요."

    "아이가 사탕 주는 사람을 싫어하기란 어렵죠."

    "단 걸 좋아한다고 하길래요."

    알리시아의 시선이 닿은 방향을 알아차린 멜타 공작이 가볍게 사탕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색색의 사탕은 멜타 공작과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었다.

    '슈바르한에서 만들어진 사탕이 아니야.'

    알리시아는 헛숨을 뱉었다. 슈바르한에서 따로 구한 사탕이 아니라면, 수도에서 따로 챙겨온 것일 것이었다. 그 말인즉슨, 멜타 공작이 처음부터 미카엘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이의 간식은 제가 챙기고 있어요. 단 걸 좋아한다는 걸 알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충치가 생기거든요."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저……."

    멜타 공작이 말끝을 흐렸다. 알리시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그와 카벨레누스는 꽤 많이 닮아 있었다.

    "할 말이 있으시면 하세요."

    "아닙니다. 할 말 같은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신 이런 일은 없게 해주세요."

    "……."

    카벨레누스를 닮은 이에게 나쁜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카벨레누스의 몸에 남은 흉터들을 기억했다. 멜타 공작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카벨레누스의 인생도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이가 말하길, 결국 원망도 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더군요."

    "……."

    "카벨레누스에게 있어서 공작은 무수히 많은 타인일 뿐이에요, 아니. 어쩌면 타인보다 못할 수도 있겠죠. 그러니 공작께서도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

    알리시아는 멜타 공작을 노려보다가 이내 주먹을 꽉 쥐었다. 더 못된 말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미카엘이 있었다. 화가 나도 여기서 멈춰야 했다.

    "저희 결혼식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 인사드릴 테니, 부디 조심히 돌아가세요."

    "알겠습니다. 다만, 이건 가져가 주셨으면 합니다."

    멜타 공작이 들고 있던 사탕 봉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사탕 봉지를 노려볼 뿐이었다.

    "죄송해요. 뭐가 들어갔는지 모를 사탕을 저희 아이에게 먹일 순 없거든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사탕 가게에서 사 온 겁니다. 해가 될 만한 건 없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

    "만약 공작께서 다가간 사람이 그이였다면, 저도 이렇게까지 기분 나쁘진 않았을 거예요. 그랬다면, 적어도 사과할 마음은 있다는 거잖아요."

    알리시아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차라리 카벨레누스에게 잘못했다 사과했으면 이렇게까지 괘씸하진 않았을 텐데. 카벨레누스가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미카엘의 환심을 사려고 한 멜타 공작의 태도는 불쾌함을 자극했을 뿐이었다. 그런 이가 내민 선물을 좋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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