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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57)화 (157/164)
  • 157화. 일상

    2021.09.02.

    "엄마, 저기 봐! 물이 정말 많…… 으앗! 저기! 저기! 이상하게 생긴 새가 있어!"

    "목마를 탔으면 얌전히 굴어."

    "그치만 이상하게 생긴 새가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내려서 직접 걸을래?"

    "알았어요. 얌전히 있을게요."

    미카엘은 넉살 좋게 웃으며 아빠에게 몸을 기댔고, 카벨레누스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무거우면 그만 내려놔요. 이제 미카엘도 예전 같지 않잖아요."

    "괜찮아. 아직은 들만해."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미카엘, 너도 아빠 너무 괴롭히지 말고."

    알리시아는 웃으며 미카엘의 입에 설탕 과자를 넣어줬다.

    "나는?"

    "단 거 안 좋아하시잖아요."

    "가끔 당기는 날이 있거든."

    카벨레누스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알리시아는 피식 웃으며 그의 입에도 설탕 과자를 넣어줬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왜, 그래?"

    "익숙한 얼굴을 본 것 같아서요."

    "익숙한 얼굴? 누구?"

    카벨레누스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이름이 바뀌긴 했으나 이곳은 노이슈타인이었다. 알리시아가 알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확인해줄까?"

    "아뇨.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얼굴색이 좋지 않은데."

    "……."

    "누군데 그래? 말하기 싫어?"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전히 알리시아는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리시아."

    "미안해요. 됐으니까, 이만 가요."

    의아했지만,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알리시아를 이길 순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시선 끝에 있던 여자를 확인하는 것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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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바다를 보고 돌아왔을 때에는 시간이 벌써 많이 흘러 있었다. 알리시아는 먼발치에 서서 어둠 속 높이 솟은 성을 멍하니 바라봤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려울 정도로 노이슈타인은 평화로웠다.

    "원래부터 풍요로운 땅이었으니까. 조금만 손보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지역이지."

    "……."

    "복잡한 얼굴이군."

    "여기서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떨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노이슈타인은 좋았던 일보다 끔찍한 일들이 많았던 곳이었다.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어머니와 함께했고, 카벨레누스를 만나기도 했으니까.

    "미안한데, 잠시 여기 머물러도 될까요?"

    "그래. 얼마든지."

    카벨레누스는 곤히 잠든 미카엘을 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 알리시아는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죽은 후, 다른 이들과 섞여 이름 모를 땅에 버려졌다 들었다. 지금으로선 어머니의 시신은커녕, 어느 곳에 어머니가 묻혔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한때 어머니와 함께 머무른 성을 바라보며 애도를 표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였다. 하늘 위로 뭔가 두둥실 떠올랐다. 빛이었다. 환하게 빛나는 등불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홀린 듯 빛무리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감싸는 단단한 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뒤에는 카벨레누스가 서 있었다.

    "남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등불을 피운다고 하더군. 빛을 따라 영혼들이 저승으로 갈 수 있게끔 말이야."

    "……."

    "다소 늦긴 했지만, 이렇게 많이 피웠으니 길을 잃을 일은 없겠지."

    "……."

    "자꾸 이러니까, 미룬 일을 해치우는 것 같긴 하군.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말이지."

    카벨레누스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좋은 걸요. 저는 이런 건 생각도 못 했거든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데."

    자신만만하게 턱을 추켜세우는 카벨레누스에 알리시아의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있죠, 실은 아까 엘레나를 봤어요."

    "엘레나? 그게 누군데?"

    "제 이복 언니요."

    "그럴 리가. 노이슈타인 왕족은……."

    카벨레누스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닫았다. 지난 일이라 해서 과거가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오래전, 자신의 손으로 알리시아의 혈육들을 죽인 바가 있었다.

    "엘레나의 사촌은 그녀와 많이 닮았었어요."

    "대역을 썼다는 거군."

    "아마도요."

    알리시아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엘레나가 죽지 않았을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알리시아가 기억하는 엘레나는 오늘 본 초라한 몰골의 여자가 아니었다.

    "처리해줄까?"

    "아뇨. 그러지 말아요."

    "어째서?"

    "불행해 보였거든요."

    알리시아는 싱긋 웃었다. 바라보고 있었던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엘레나 역시, 알리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그 정도로 되는 건가?"

    "제가 왜 끝까지 엘레나를 고발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실은 엘레나가 그렇게 될 거라는 거 내심 알고 있었어요. 내 이복 언니는 대단한 미인이었지만, 왕의 재목은 아니었거든요. 반란이라는 명분으로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결국 버려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죠."

    "……."

    "잔인하죠?"

    "그런 걸로 잔인을 운운하기엔 상대가 맞지 않지."

    카벨레누스가 낮게 웃었다. 그는 악명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슈바르한 대공이었다. 알리시아는 말없이 카벨레누스의 손을 잡았다. 밤이었음에도 어둡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따뜻한 빛을 머금은 등불이 세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 * * 거친 손끝이 느릿하게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알리시아는 눈을 감은 채 옅은 숨을 뱉었다. 늘 그랬듯 사내의 손은 뜨겁고, 거칠었으며, 동시에 부드러웠다.

    "방해꾼이 없으니 확실히 낫군."

    "미카엘이 그 소리를 들으면 화낼 거예요."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 녀석 때문에 이렇게 입도 제대로 못 맞추는데."

    카벨레누스는 태연히 대꾸하며 손을 아래로 움직였다. 알리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둘러 몸을 뒤로 뺐다.

    "더러워요."

    "안 더러워."

    잡힌 오른발에 알리시아는 감았던 눈을 살짝 뜨고 카벨레누스를 찾았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본심을 드러낸 사내는 굶주린 짐승과도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거 아나? 사막에서는 발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한다고 하던데."

    "발이 사랑의 증표라고요?"

    "신을 신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는 건 침대 위뿐이니까."

    "그리고……."

    사내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발끝을 오므렸다. 단단한 손끝이 복숭아뼈를 간지럽히는 감각이 미묘했다. 괜히 아랫배가 간질간질했다.

    "발이라는 게 의외로 예민한 부위거든."

    보란 듯 발등을 쓸어내린 손이 발목을 스쳐 종아리에 닿았다. 꿀꺽-.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대부분 올려보기만 해야 했던 사내가 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기묘했다. 마치 숭배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간지럽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알리시아는 발끝을 오므리며 입술만 달싹거렸다. 살갗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어느 때보다 은밀하고 집요했다.

    "아뇨, 간지럽다기보다는……."

    알리시아의 두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간지럽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지만, 차마 다음 말을 하진 못했다.

    "그보다 뭐?"

    "말 못 해요. 이런 걸 어떻게 말해요."

    "나는 할 수 있는데."

    카벨레누스가 나른하게 웃었다. 그의 손은 어느덧 발목을 넘어 종아리 안쪽의 여린 살을 탐하고 있었다.

    "그대를 만지고 싶어."

    "이, 이미 만지고 있잖아요."

    알리시아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물들었다. 단단한 손끝이 무릎 아래의 접히는 부분을 쓸 때마다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꽁꽁 감춰진 여린 살은 예민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알잖나."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휘어졌다. 알리시아는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느긋하단 말이 어울릴 정도로 천천히 올라오는 손과 달리, 사내의 눈은 들끓고 있었다.

    "질리지 않으세요?"

    "질려? 뭐가?"

    "항상 같은 눈으로 절 보잖아요."

    "그야, 그럴 수밖에 없잖아."

    이렇게 예쁜데. 카벨레누스가 새하얀 무릎에 입을 맞췄다. 더 새빨개질 수 없을 것 같던 알리시아의 얼굴이 타오를 듯 물들었다. 그게 얼마나 사내를 자극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입술이 성급히 겹쳐졌다. 끝이 단단한 손이 머리카락이 헤집고 집요하게 감정을 드러냈다.

    "하아…… 하아……."

    역시 참을 수 없다. 저런 눈을 하고, 저런 표정을 하고, 또 저렇게 매달리는 여자를 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결혼하자."

    그 말은 거의 충동적으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뱉고 나니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이미 했잖아요."

    "그거 말고. 제대로."

    "……."

    "원래는 돌아가서 청혼할 셈이었어. 자리를 비운 동안, 성을 멋지게 꾸며놓으라고 명령해뒀거든. 그런데 말이야, 지금 보니 멍청했단 생각이 들어."

    "어째서요?"

    "그대가 어여뻐서."

    "……."

    작은 칭찬에도 어쩔 줄 몰라하는 여자가 사랑스럽다.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알리시아의 손을 찾았다.

    "다시 한 번 물어볼게. 나와 결혼해줄래?"

    "……."

    "싫은가?"

    바로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사내의 눈에는 금세 불안감이 서렸다. 알리시아는 답지 않게 떨리는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싫다고 하면 포기할 건가요."

    "내가 그럴 수 있을 리가."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그댈 유혹하겠지."

    그대 역시, 날 원할 수밖에 없게끔. 짐승 같은 사내는 웃었다. 여자는 손을 뻗어 사내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 * * 알리시아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수마가 밀려오지만 늦잠을 잘 순 없었다. 한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미카엘보다 먼저 일어나야 했다.

    "벌써 일어나는 건가."

    "게으름피우다간 미카엘에게 혼날 거예요."

    "미카엘이라면 분명 늦잠 잘걸."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여행지니까, 한시라도 빨리 일어나고 싶을지도……."

    알리시아는 단호히 카벨레누스의 가슴을 밀어내려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의 네 번째 약지에는 못 보던 반지가 껴 있었다.

    "이거 뭐예요?"

    "반지."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다 알면서 모른 척하긴. 알리시아는 눈썹에 힘을 줬다.

    "그대가 자고 있을 때, 몰래 껴두었지."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대의 손가락이 영 허전해 보여서 말이야."

    카벨레누스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자신의 왼손을 내보였다. 그의 손에도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가 껴 있었다.

    "그대는 이런 거 신경 안 쓰지만, 나는 아니라서 말이야."

    카벨레누스가 웃었다. 알리시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창을 타고 넘어온 햇살을 머금은 사내의 금색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따뜻한 색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남들 하는 것처럼 예복도 입고, 결혼식장도 마련해서 정식으로 식을 올리자."

    "네. 그렇게 해요."

    "그리고, 그동안 못했던 것도 좀 하고, 또…… 이런."

    카벨레누스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얼굴을 구겼다. 세 사람만 머무는 저택에서 요란스럽게 뛰어다닐 만한 인물은 한 명뿐이었다. 카벨레누스와 알리시아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급히 옷을 주워입었다.

    "누구 아들인지 몰라도 참 지독한 방해꾼이군."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먼저 나가서 시간 끌 테니, 당신은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아침이 완성되면 부를게."

    "직접 아침을 하게요?"

    "둘이 해보지, 뭐. 케이크도 구웠는데 아침이야 못 하겠어."

    카벨레누스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가다가 이내 멈췄다.

    "왜요? 잊은 거라도 있어요?"

    "물론 있지."

    "뭔데요?"

    촉-.

    "……."

    가볍게 붙었다가 떨어진 입술에 알리시아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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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아침이야."

    "당신도요."

    한 번 더 입을 맞추고서야 카벨레누스는 다시 몸을 돌렸고, 알리시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평온한 아침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일상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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