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같이 다녀오자
2021.08.30.
"난 이게 훨씬 더 좋아요."
"이게 더 좋다고? 진심이야?"
"네!"
한 번쯤은 고민을 해줘도 좋으련만.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린 채,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리본을 바라봤다. 혹시나 미카엘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반짝이는 두 눈은 너무나 확고했다.
"가제프, 네 생각은 어때?"
"네?"
"네가 보기에도 이게 나은가?"
"그게……."
가제프는 말없이 멋쩍게 웃기만 했다. 눈치 빠른 부관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간에 눈총을 받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게 낫죠?"
"그것보단 이게 낫지 않아?"
"비 전하께서는 뭐든 좋아하실 겁니다. 어느 쪽이든 두 분께서 정성껏 고르신 것이니까요."
"보는 눈이 없군."
"실망이에요, 삼촌."
최대한 신경 써 절충안을 내놓았는데, 돌아오는 건 냉담한 반응뿐이다. 가제프는 이럴 때만 똑 닮은 부자를 보며 슬쩍 뒷걸음질 쳤다.
"알리시아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
"아니거든요. 좋아하거든요."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군."
"그야, 내가 아빠보다 엄마를 훨씬 더 잘 아니까요."
미카엘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쭉 폈다. 다른 건 몰라도 엄마에 관한 일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네가 뭘 아는데?"
"엄마는 황금색 싫어해요."
"이젠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알리시아는 내 눈을 좋아하거든. 금색을 싫어할 수 없지."
"그건 아빠 착각이거든요. 그치?"
미카엘은 펠시를 향해 눈을 빛냈다. 하지만 미카엘의 기대와 달리, 펠시는 단호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금안을 가진 건 카벨레누스만이 아니었다.
"거봐, 아니라잖아."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번졌다. 미카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린애 이겨서 좋아요?"
"응. 좋은데."
"……."
"농담이야."
카벨레누스의 손이 미카엘의 머리를 꾹 눌렀다. 적당히 하려 해도 표현이 풍부한 아들은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그냥 둘 다 쓰는 걸로 해. 어차피 포장할 상자는 많거든."
"이거 말고 더 있어요?"
"네가 지쳐서 포기할 정도로 있지."
"난 포기 안 해요."
미카엘의 두 볼이 부풀었다.
"그런 말을 하려면 리본 묶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 같지만 말이야."
"그러는 아빠는 잘 해요?"
"뭐, 일단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인 것과 달리, 포장을 끝내지 못한 건 카벨레누스도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카벨레누스는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만들 수 있는 건 군용 매듭 정도였다. 카벨레누스는 잠시 리본 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제프."
"네, 전하."
다행스럽게도 카벨레누스에게는 유능한 부관이 있었다. 가제프는 눈치껏 다가와 포장을 도왔다.
"삼촌, 진짜 잘 하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이 정도는 나도 해."
카벨레누스는 막 포장한 상자를 가제프가 포장한 상자에 올렸다. 잠시 머뭇거렸을 뿐이지, 애당초 카벨레누스는 요령이 좋은 편이었다.
"도와줄까?"
"아뇨. 혼자 할 수 있어요."
미카엘은 눈에 바짝 힘을 주고 다시 상자에 집중했다. 두 어른이 쌓아 올린 상자는 아이의 승부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끝끝내 아이의 손에서 포장된 상자를 만들어냈다.
"잘 하네."
"당연하죠! 기대해요! 내가 가장 많이 포장할 테니까요!"
"그럼 이왕 하는 김에 누가 먼저 더 많이 하는지 시합할래?"
카벨레누스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미카엘은 이에 지지 않으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내가 이길 텐데요."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두 부자 사이에 불꽃이 일렁거렸다.
* * *
"이대로 결혼식은 생략하실 겁니까?"
"응.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지 않을까라니. 비 전하께서는 서운하시지도 않으신 겁니까?"
"혼인 서약은 이미 했는걸."
"혼인 서약과 결혼식은 엄연히 다르죠."
별생각 없이 대답했을 뿐인데, 바라보는 시선들이 애틋해졌다. 알리시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가신들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썩 좋지 않은 첫 만남과 달리, 논 후작을 필두로 한 슈바르한의 고위 귀족들은 알리시아에게 호의적이었다.
"그건 사정이 좋지 않았을 때 이야기고 지금이야 다르지 않습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슈바르한 대공 부부의 탄생인데 마땅히 훌륭한 자리에서 축하를 해야지요."
"맞습니다. 솔직히 저희나 되어야 비 전하를 알 뿐, 아직 전하께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자들이 수두룩한 걸요."
"꼭 모두가 알아야 결혼인 건 아니잖아."
"그래도 로망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글쎄. 나는 그런 쪽으로는 둔해서."
알리시아는 쏟아지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서류에 서명만 하면 오늘의 업무는 끝이었다.
"아니면, 혹시 전하께서 눈치라도 주시는 겁니까? 재정적인 압박을 해온다거나, 막 그런……."
"전하께서 자기 결혼식 비용을 아까워하는 그런 소인배셨던 겁니까?"
"전하께서 그럴 리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게 사람 마음인데."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줘."
수군거리는 귀족들에 알리시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로선 귀족들이 오늘 한 회의보다 자신의 결혼식 문제에 열띤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은 카벨레누스의 씀씀이와는 상관없어. 그냥 내가 딱히 신경 쓰지 않을 뿐이야."
"딱히 신경이 안 쓰인다뇨! 당연히 신경 쓰셔야죠!"
"정 필요하다 싶으면 나중에 하면 돼. 어차피 지금은 시기도 좋지 않잖아."
황위를 포기했음에도 아직까지는 카벨레누스에게 관심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굳이 눈에 띌 만한 행동을 해봤자 좋을 건 없었다.
"수도 놈들이 떠드는 게 이곳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다. 이곳은 슈바르한인 걸요."
"맞습니다. 슈바르한에는 슈바르한만의 규칙이 있는 법입니다."
"정 마음에 안 드시면 군대라도 준비할까요?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혀를 뽑아버리면 그만이지 않습니다."
귀족들이 앞다투어 말을 쏟아냈다. 어떻게서든 알리시아의 입에서 결혼식을 하겠다는 소리를 끌어낼 심산이었다. 똑똑-. 그때였다.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회의 다 끝났어?"
문틈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 채 미카엘이 수줍게 웃었다.
"아이고야, 우리 꼬마 도련님 오셨군요."
"이리 와 앉으십시오. 마침 제가 도련님 드리려고 쿠키 좀 챙겨왔거든요."
"군것질거리는 저도 챙겨왔습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귀족들은 자신의 의자를 두들기며 미카엘을 유혹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건 알리시아만이 아니었다. 휑한 성과 어울리지 않은, 살가운 아이는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고 있었다.
"나, 들어가도 돼요?"
"그럼요."
"당연하죠."
"얼른 들어오십쇼."
모두의 환호 속 미카엘은 당당히 안으로 들어와 알리시아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웬일이야, 미카엘. 오늘은 아빠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알리시아가 두 팔을 벌리자마자, 미카엘은 기다렸다는 듯 폭 안겨 왔다.
"있지, 엄마. 아빠가 케이크 굽는 데에 실패했어."
"그래서 엄마한테 도움받으러 왔어?"
"엄마가 안 도와주면, 오늘 간식은 소금 케이크가 될 것 같거든."
미카엘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에게 간식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소금 케이크를 만들면 안 되지. 알았어. 엄마가 얼른 가서 해결해줄게."
알리시아는 다정히 미카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제 아이는 예전처럼 번쩍 안아 들 수 없을 정도로 훌쩍 커버렸지만, 사랑스러운 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 * *
"얼른 와! 이쪽이야!"
"미카엘. 재촉하지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가. 그러다가 넘어지겠어."
케이크가 그렇게 좋은 건지, 손을 당기는 미카엘에 알리시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카벨레누스가 돌아온 후, 미카엘은 확실히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이번에는 이쪽이야."
"이쪽이라고? 여긴 주방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
"아냐. 맞아. 여기야."
미카엘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알리시아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미카엘을 따라 걸음을 맞췄다. 무엇보다 유난히도 미카엘의 기분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 왔다! 여기야!"
"여기는……."
알리시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미카엘이 안내한 곳은 주방이 아니었다.
"네 방에는 왜 온 거야?"
"그게 말이야, 여기에 굉장한 비밀을 감춰놨거든."
"비밀?"
"궁금하면 열어봐."
자신도 충분히 열 수 있으면서 미카엘은 알리시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결국 아들의 재촉을 이기지 못한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쥐었다.
"카벨레누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알리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생각보다 늦었네."
"여기서 뭐 해요. 거기에 이 상자들은 뭐고……."
알리시아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찡그렸다. 방의 정중앙에는 완벽한 케이크가 있었다.
"미카엘의 소원이 이거였어요?"
그제야 미카엘이 말한 케이크가 핑계였다는 걸 깨달은 알리시아가 헛숨을 뱉었다. 카벨레누스는 생크림 위에 삐뚤빼뚤하게 적힌 '엄마 사랑해요'라는 문구를 보며 눈매를 휘었다.
"정확히는 다 함께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다는 거였지."
"……."
"지난 생일 때, 다 준비해놓고도 축하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야."
"그땐 사정이 그랬던 것뿐이잖아요. 여러모로 바쁜 시기였던데다가 내 몸도 안 좋았으니까요.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미카엘의 생일도……."
알리시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자신의 생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미카엘의 생일이 어영부영 넘어갔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두 배로 챙겨달라고 하던데?"
"두 배요?"
"실제 내가 준비한 건, 그 이상이지만."
카벨레누스가 방 안 가득 쌓여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는 알리시아의 나이만큼 쌓여 있었다.
"못 챙긴 건 지금이라도 챙겨야지."
"……."
"미카엘이랑 같이 선물을 고르고 포장까지 함께했어."
"가제프 삼촌도 도와줬어."
미카엘은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쭉 내밀었다. 알리시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자와 손때 묻은 선물 상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는 울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눈가가 시큰거렸다.
"왜 그래, 엄마? 이거 싫어?"
"싫긴. 그럴 리 없잖아."
"그런데 왜 울어?"
"기뻐서."
"기뻐? 진짜?"
"응. 너무 기뻐."
알리시아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미카엘의 성화로 생일을 챙기게 되었을 뿐, 알리시아에겐 생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 그녀가 태어난 것이 축복이 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선물 뜯어봐도 돼?"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알리시아가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응! 당연하지!"
엄마의 반응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미카엘은 재빨리 선물 상자 하나를 집어 알리시아에게 건넸다.
"이거 미카엘이 한 거지?"
"맞아. 내가 했어."
엉성하게 묶인 리본은 가볍게 당겼을 뿐인데도 쉽게 풀어졌다. 알리시아는 쌓인 선물 상자의 포장을 일일이 벗겨가며 전부 상자를 열어봤다. 상자 안에 든 선물은 다양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보기만 해도 목이 무거울 것 같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부터 아름다운 드레스, 어설픈 초상화, 심지어 동글동글한 모양이 예쁜 조약돌이 담긴 상자도 있었다. 그리고……. 알리시아의 손이 멈칫했다. 상자 안에는 지도가 들어 있었다.
"바다 보러 가기로 했잖아."
"바다는 많아요. 굳이 이곳까지 갈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손자 얼굴 정도는 보여드려야지."
"……."
알리시아의 동공이 눈에 띌 정도로 심하게 흔들렸다.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 사내 앞에선 감출 수 있는 게 없었다. 알리시아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리워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곳에서 나쁜 감정만 있었던 건 아니잖아."
"……."
"같이 다녀오자."
카벨레누스는 몸을 낮춰 알리시아와 시선을 맞췄다. 알리시아는 가만히 카벨레누스를 응시하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