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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55)화 (155/164)
  • 155화. 마지막 소원

    2021.08.26.

    "미안해, 미카엘."

    알리시아가 어설프게 웃었다.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달려가 입을 맞췄지만, 정원에는 둘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정말로 미안해."

    다리를 굽혀 미카엘과 시선까지 맞췄지만 소용없었다. 한 번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아이의 볼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결국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당신도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나는 딱히 미안하진 않는데."

    "카벨레누스."

    "솔직히 그렇잖아. 우리가 못할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그럴 수도 있지. 오래간만의 재회잖아."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카벨레누스의 태도에 미카엘의 양 볼이 더 크게 부풀었다. 카벨레누스는 불만 가득한 아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못 보던 사이, 키가 많이 컸군."

    "……."

    "오랜만에 본 건데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카벨레누스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자, 미카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일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서."

    "그렇게 강한 척을 했으면서 왜 그렇게 오래 걸려요."

    "다신 안 가. 이제 정말 끝났거든."

    "거짓말."

    미카엘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진짠데."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가 한 것처럼 몸을 낮춰 미카엘과 시선을 맞췄다. 그 사이 젖살이 조금 빠진 건지, 미카엘의 눈매는 예전보다 또렷해져 있었다.

    "조금 더 있으면 날 더 닮겠군."

    "그건 싫은데요."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아들이 아빠를 닮는 건 당연한 거니까."

    "……."

    미카엘의 동공이 흔들렸다. 카벨레누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입을 뗐다.

    "연습했다면서, 아빠라고 부르는 거."

    "그, 그건……."

    "슬슬 연습한 성과를 확인해볼 때가 아닌가."

    "그, 그 전에 소원은요? 나랑 약속했잖아요. 소원 들어주면 말해주기로요."

    계속 연습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고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카엘은 두 주먹을 꼭 쥔 채 마른 침을 삼켰다.

    "그건 이미 준비해뒀지."

    "진짜요?"

    "조금 이따가 보여줄게."

    "그럼 나도 이따가 할래요."

    미카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도하게 고개를 바짝 들었다. 카벨레누스는 그런 아이를 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왜, 재촉 안 해요?"

    "어차피 계속 같이 있을 거잖아. 천천히 해."

    "……."

    아이의 눈이 빤히 절 올려다본다.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미카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지만, 훌쩍 자란 미카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쉬운 마음이 커졌다. 이왕이면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이제 계속 우리랑 같이 있을 거예요? 어디에도 안 가고?"

    "아니. 가긴 할 거야."

    "……."

    "네가 그랬잖아. 바다 보고 싶다고. 그러니 한 번 보러 가야지."

    어떻게 하면 표정이 저토록 단숨에 휙휙 바뀌는 걸까. 짧은 순간, 빠르게 바뀌는 미카엘의 표정에 카벨레누스는 결국 또 한 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프라임이 사라진 후부터 미비하던 감정이 좀 더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예전보다는 수월해졌다.

    "우리 진짜 바다 보러 가요?"

    "네가 원한다면."

    카벨레누스의 손등이 미카엘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애써 아닌 척하려 했지만 아이의 두 귀는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갈래요."

    꼼지락거리는 꼬막손이 카벨레누스의 옷자락을 쥐었다. 미카엘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고개를 들고 카벨레누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다 같이 바다에 가고 싶어요."

    "그래."

    "엄마랑, 나, 그리고……."

    "그리고?"

    "아, 아빠랑 같이요."

    미카엘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개졌다. 카벨레누스는 멍하니 어린 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순간에도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옷자락을 쥔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아빠. 마지막 말은 너무 작아 거의 들리지도 않았지만, 카벨레누스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하……."

    과연 이럴 때에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카벨레누스는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이내 어린 아들을 끌어안았다. 품 안의 온기는 이제 낯설지 않았다. 그저 기꺼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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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어땠어요? 처음으로 아빠라는 소리를 들은 기분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기쁘더군."

    "진짜요?"

    "이런 날 눈치 없이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자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미카엘을 향했다. 미카엘은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배실배실 웃으며 자고 있었다.

    "당신이 돌아온 게 기뻐서 그런 거예요."

    "그걸 아니까, 쫓아내질 못하는 거지."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카벨레누스의 눈은 다정했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잖아요."

    "물론 가끔은 좋지. 정말 가끔만."

    자연스레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알리시아는 뺨을 어루만지는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래서 미카엘이 무슨 소원을 빈 거예요?"

    "미카엘이 말 안 해줬나 보지?"

    "남자들만의 비밀이라고 절대 말 안 해줘서 조금 섭섭했죠."

    알리시아는 장난스럽게 한숨을 푹 쉬었다.

    "의외로 입이 무거운 구석도 있었나 보군."

    "그래서 둘만의 비밀이 뭐였어요?"

    "비밀."

    카벨레누스가 짓궂게 웃었다.

    "네?"

    "남자들만의 비밀이라고 했잖아."

    "진짜 안 알려줄 거예요?"

    알리시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비밀이니까."

    "……."

    "궁금해도 조금만 참아줘. 곧 그대도 알게 될 테니까."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숙여 튀어나온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해지잖아요."

    "원래 인내는 쓴 법이지."

    "카벨레누스."

    "느긋하게 기다려봐. 어차피 앞으로 우리에게 시간은 많잖아."

    입맞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한소리를 하려다가 이마부터 눈, 코, 입에 잘게 쏟아지는 키스에 결국 웃음을 토했다.

    "내가 당신에게 약하다는 걸 알고 있는 거 눈치챘군요?"

    "내가 원래 적응은 빠른 편이거든."

    마디 굵은 손이 손가락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틈 없이 손가락 사이를 꽉 채우는 손은 안정감을 선사했다.

    "오늘은 이러고 자자."

    "이러고요?"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잖아."

    카벨레누스가 웃었다. 그의 눈은 더는 어둠 속에서 빛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더라도 알았다. 사내의 눈은 항상 변함없이 자신을 향해 있을 거라는 걸. 알리시아는 잡고 있는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맞잡은 손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내일은 다 같이 아침을 먹어요."

    "미카엘이 늦잠을 자지 않는다면 가능하겠지."

    "우웅……."

    "하여간, 빠지질 않지."

    잠결에도 자신의 이름에 반응하는 미카엘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졌다.

    "밤이 너무 늦었네요. 얼른 자요."

    "먼저 자."

    "왜요?"

    "나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거든."

    이상한 일이었다. 불가능한 전장에서 승리했을 때도, 모두가 영웅이라 칭송해도, 그리고 어머니의 오랜 염원을 이뤘을 때조차 기쁘지 않는데, 똑 닮은 모자를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났다.

    "조금 더 그대와 미카엘의 얼굴을 보고 싶어.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러고 있는 게 어쩐지 현실감이 없게 느껴져서 말이야."

    "천천히 하자면서요."

    "……."

    "얼굴 볼 일은 앞으로 많을 테니 얼른 자요. 이러다가 미카엘이 아니라, 당신이 늦잠을 자겠는걸요."

    "그런가."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알리시아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카벨레누스와 눈을 맞췄다. 둘의 눈에 비치는 건 서로뿐이었다.

    "잘 자요."

    "그대도."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새가 쪼듯 가벼운 버드 키스는 잠깐이었지만, 입술을 통해 서로에게 번진 미소는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 * *

    "딱히 손 볼 건 없군. 잘 하고 있어."

    "비 전하 덕분이지요."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집무실을 살폈다. 그의 부재로 오랫동안 알리시아에게 맡겼던 집무실에서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귀족들은?"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비 전하의 개혁을 달가워할 뿐이지요."

    "의외로군."

    카벨레누스가 실험체였다는 사실이 불거지면서, 더불어 마물을 부리는 알리시아의 문제도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회의장에 있던 귀족들은 알리시아의 힘을 공론화시키긴커녕,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저희 측 눈치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도 생각했었는데, 쭉 살펴본 결과 그런 건 아닌 것 같더군요."

    "그럼 뭐지?"

    "그냥 비 전하가 마음에 든 것 같습니다."

    가제프가 멋쩍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

    "이곳은 슈바르한이니까요.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되는 이곳에서 인정받은 전사는 존경받기 마련이죠."

    "그 늙은이들이 알리시아를 전사라고 받아들였다는 건가?"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기억하는 슈바르한의 귀족 대표들은 다들 하나 같이 꼬장꼬장한 늙은이들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융통성이 있을 리 없었다. 차라리 시커먼 속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일리 있게 들렸다.

    "아무래도 비 전하께서 회의장에서 보여주셨던 모습이 오히려 호감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비 전하께선 그들의 불만을 정확하게 잡아내시기도 하셨으니까요."

    "배가 부르니 불만도 나오는 거지."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들의 생각은 반대더군요."

    "반대?"

    카벨레누스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저는 비 전하께서 그들에게 업무를 배정한다 했을 때, 당연히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작 제안을 했을 때, 거절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

    "실제 업무에서도 최선을 다하기도 했고 말입니다."

    "……."

    "그들의 불만은 스스로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벨레누스 덕분에 슈바르한은 풍요로워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찬양하고 존경했다. 하지만 그 중에도 불만을 가진 이들은 존재했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쉬운 청년들과 달리, 오랫동안 설원에서 악착같이 삶을 이어온 자들은 바뀐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카벨레누스 위주로 돌아가던 행정도, 세월 앞에 점점 더 쇠약해지는 육신도 전부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녀가 나보다 훨씬 나은 것 같군."

    "방식이 다른 것이죠. 전하께서는 넓게 보시고, 비 전하께서는 섬세하게 보시는 거니까요."

    "……."

    "두 분은 좋은 짝이 되실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카벨레누스는 텅 빈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사정상 약식으로 식은 미루고 결혼 서약서만 먼저 작성해 혼인한 터라 둘은 함께 맞춘 반지 하나 없었다.

    "준비는 잘 되어가나?"

    "분부하신 대로 완벽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안 그러면 우리 아들에게 한 소리를 듣거든."

    아들이라는 단어가 아직은 입에 딱 붙진 않지만, 나쁘진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당돌하게 소원을 요구하던 미카엘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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