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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54)화 (154/164)
  • 154화. 겹쳐지는 입술은

    2021.08.23.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잠들어 계셔서요. 일이 끝나면 다시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뵙게 되네요."

    "멋진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소맹주께서 그렇게 되신 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잖아요."

    알리시아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펜리르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로아킨의 소맹주가 내려선 안 되는 판단이었습니다. 저는 많은 이들을 짊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요."

    "……."

    "그런데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

    "시도도 하지 않고 뒤늦게 후회했던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당황해 급하게 나온 말이었지만 그만큼 진심이었다. 펜리르는 초조한 시선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달싹거리는 입술과 다르게, 이성은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름 마음 정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죽을 뻔하고 나니 괜히…….'

    펜리르는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여자의 눈동자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이제 와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쯤은 말해보고 싶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제대로 끝을 보고서야 복잡한 마음이 비로소 정리가 될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그, 그게 몸은 괜찮으신가 해서요."

    펜리르가 어설프게 웃었다. 조금만 더 모난 모습으로 컸으면 좋았을 텐데 여자는 너무 예뻤다. 그가 기억했던 투박한 원석이 아닌, 잘 세공된 보석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걱정은 감사하나, 제가 보기엔 저보다 소맹주의 몸을 걱정해야 할 것 같은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빛나는 보석이 탐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지만 보석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애당초 원석을 세공한 건 자신이 아니었다. 펜리르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다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시면 연락해주십시오.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는 세상에 무조건적인 호의는 없다고 생각해요."

    "……."

    "이유가 있는 호의는 받을 수 없어요."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강약이 뚜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펜리르는 그제야 미소 짓는 걸 포기했다.

    "……아무래도 제 사심이 그렇게 티가 났나 봅니다."

    반듯했던 펜리르의 어깨가 미세하게 아래로 쳐졌다. 알리시아는 잘 웃어주는 편이나 곁을 쉽게 내주진 않았다. 그녀는 슬플 정도로 선을 잘 지켰다.

    "저는 소맹주께서 왜 절 마음에 두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희가 만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잖아요."

    "저는……."

    "다만, 소맹주의 마음이 오래전 일 때문이었다면 저는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알리시아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져 호선을 그렸다.

    "……어째서요?"

    "예전에 그러셨죠. 제가 소맹주의 정혼자를 닮았다고."

    "……."

    "소맹주께서 그 말을 하실 때, 제가 소맹주의 얼굴에서 읽었던 건 죄책감이었거든요."

    "……."

    펜리르의 목울대가 울렸다. 표정 관리를 잘 하고 있다고 자부해왔건만, 눈앞의 여자 앞에서만큼은 평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만 서면 예전 힘 없었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예전에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아이를 돕긴커녕, 두고 도망쳤죠. 그래서, 저는……."

    "그거면 됐어요."

    "네? 하지만……."

    "그땐 소맹주도 힘없는 아이였잖아요. 충분히 그럴 만했어요. 죄책감 갖지 않아도 돼요."

    알리시아의 미소에 펜리르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대로 이야기하지도 못했는데 다 안다는 시선에 목이 멨다.

    "절 기억해주고, 또 제게 사과해줘서 고마워요."

    "……."

    "그 시절의 누구도 제게 사과하지 않았거든요. 정작 사과해야 하는 건 소맹주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었는데 말이에요."

    "……."

    펜리르는 멍하니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변함없이 조곤조곤하게 뱉어내는 그녀의 낯은 평온했다. 그래서 알았다. 그녀는 더는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저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소맹주의 마음을 받을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고요."

    "……네, 알고 있습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진 않을게요. 과거가 있기에 지금이 있고, 사람마다 흉터처럼 지워지지 않은 기억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저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고 있어요."

    "……."

    "그리고, 현재가 쌓이면 과거가 되죠."

    앞으로 저는 지난 과거일 뿐이에요. 풍성한 속눈썹으로 감싸진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여자의 눈은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어여뻤다. 물론 여자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겠지만. 펜리르는 쓰게 웃었다. 첫 실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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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열린 창문을 타고 스며든 바람이 뺨을 스쳤다. 알리시아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슈바르한은 항상 눈으로 덮여 있어 계절감이 뚜렷하지 않았지만, 벌써 그사이에 계절이 서너 번 바뀌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가제프가 따뜻한 차를 건넸다. 알리시아는 차를 받아들며 싱긋 웃었다.

    "일을 계속해도 할 일이 많은걸."

    "그렇기에 사람을 더 뽑은 게 아닙니까."

    "조직 체계를 만들긴 했지만, 아직 실험 단계잖아. 보완할 점이 없는지 확인해야지."

    알리시아는 그 말을 하면서도 서류를 검토했다.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알리시아를 보는 건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단위 하나도 헷갈려 매번 도움을 받아야 했던 상사의 업무 속도는 이제 가제프보다 훨씬 빨라져 있었다.

    "아, 그렇지. 날씨는 어때?"

    "미세하긴 하나, 점점 더 날이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시간이 흐르면 슈바르한은 문헌에 나오는 낙원처럼 변할지도 모릅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지."

    알리시아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프라임에게 물려받은 건 신의 힘만이 아니었다. 프라임과 신, 둘의 기억 역시 스며들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니 힘들긴 하겠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차츰 기후에 적응하면 괜찮을 거야."

    "비 전하께선 아깝지 않으십니까?"

    "응? 뭐가?"

    "뭐든 할 수 있는 힘이잖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면 안 되는 힘이지."

    알리시아는 제 옆에 앉은 펠시를 보며 웃었다. 신은 죽었지만, 그의 힘은 거름이 되어 세상을 유지했다. 풍요로웠던 땅이 얼거나 메말라간 건 거름으로 쓰여야 할 신의 힘을 거둬갔기 때문이었다.

    "절대적인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면 그 순간만 편할 뿐이야. 가만히 있어도 신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굳이 뭔가를 할 필요는 없잖아."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러니 신은 죽은 거야. 그렇게 끝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

    "역시, 이상한가?"

    "아뇨. 그것보다는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예전 생각?"

    가제프의 시선이 펠시에게 닿았다. 알리시아 외에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눈을 한 짐승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알리시아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전에 그러셨죠, 신은 어디서나 우리를 보고 있고,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할 뿐이라고."

    "그걸 기억하고 있어?"

    "네. 개인적으로 꽤나 인상 깊었던 이야기거든요. 그 전까지 제가 알던 신은 간절히 믿으면 뭐든 이뤄주는 자였으니까요."

    "그게 신이라는 이름과는 잘 어울리는 모습이긴 하지."

    "그렇다 해도, 저는 비 전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속 신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가제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능한 신이 좋다고?"

    "뭐든 다 쉽게 이루어지면 그만큼 쉽게 생각하게 되니까요. 아무런 발전도, 감흥도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신의 충실한 종이 될 뿐이죠."

    "……."

    "현명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사실 많이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했거든."

    "실험체 때문이군요."

    "맞아."

    알리시아는 잘게 심호흡을 했다. 실험체는 생명을 소진해서 강한 힘을 얻었다. 대부분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린다 해도 완전히 구할 순 없었다. 살아남은 건 일부였다.

    "죽은 자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어. 힘을 쓴다면 저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결국 나는 그들의 장례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

    "그들이 되살아나면 잠시는 기쁠지 몰라도 모든 게 망가질 거라는 걸 알았거든. 다들 내게 의지하게 될 테고, 또다시 신을 찾고, 죽음을 쉽게 여기겠지. 그러다가 내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혼란이 찾아올 테고, 그 중에선 어떻게서든 과거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생길 거야."

    "……."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그러니 나는 이 힘을 죽은 땅을 위한 거름으로만 쓰려고 해."

    알리시아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밖에선 마물들과 뛰어놀고 있는 미카엘이 보였다.

    "언젠간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이 선택이 옳다고 믿어."

    "……."

    "나는 내 아이에게 신이 모든 이유가 되는 세상보단 아이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갈 수 있는 세상을 주고 싶거든."

    알리시아는 마주친 시선에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창밖에서는 엄마의 시선을 알아챈 미카엘이 신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알리시아의 동공이 커졌다. 알리시아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이의 등 뒤로 걸어오는 사내가 보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 더 망설일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알리시아는 그대로 밖으로 달려나갔다.

    "하아…… 하아……."

    달리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몸은 금세 숨이 찼다. 하지만 내달리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카벨레누스가 있었다.

    "알리시아."

    알리시아를 발견한 카벨레누스가 웃었다. 알리시아는 곧장 달려가 두 팔을 벌렸다. 다급한 마음에 걸음이 엇나가 몸이 휘청거렸지만,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차가운 눈 대신, 재빨리 뻗어진 사내의 팔이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사내의 몸은 변함없이 단단하고 뜨거웠다.

    "조심해야지. 넘어지면 어쩌려고."

    "……."

    "다녀왔어."

    카벨레누스의 손이 알리시아의 얼굴을 감쌌다. 알리시아는 금방이라도 차오를 것 같은 눈물을 참아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항상 보고 싶고, 또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잘 돌아왔어요."

    "그래. 돌아왔지."

    내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카벨레누스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머리카락이 엉켜 들었다. 알리시아는 뺨을 스치는 거친 촉감에 웃으며 카벨레누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겹쳐지는 입술은 이미 충분히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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