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153)화 (153/164)

153화. 새로운 시작점

2021.08.19.

"멈춰 있던 괴물들이 인간으로 변했다고?"

"일단 무슨 영문인지 몰라 치료실로 옮겨두었는데, 아무래도 비전하께서라면 이유를 아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마 프라임이 사라졌기 때문일 거야."

기나긴 실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결국 시작은 프라임이었다. 그의 소멸이 괴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었다.

"프라임이 사라졌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야. 이제 프라임은 존재하지 않아."

대신관이 죽으면서 힘을 되찾았지만, 이미 프라임의 몸은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결국 그는 되찾은 힘을 견뎌내지 못했다. 알리시아는 프라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힘을 다루는 방법을 깨닫지 못했다면, 자신 역시 프라임과 같은 결말을 맞았을 것이었다.

"어쨌든 그들이 다시 괴물이 될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꼭 다행인 것만은 아니지."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와 가제프 사이로 끼어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한 번 괴물로 낙인 찍힌 자들이야. 그들을 보는 시선이 좋을 리 없지."

"……."

"이유가 어떻든 간에 손에 피를 묻힌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어."

한순간이나마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무너졌다. 알리시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히려 손에 힘을 줬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잖아요. 과거만이 그 사람 인생의 전부는 아닌 걸요."

카벨레누스는 자신을 잡고 있는 작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건 영영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는 어떤 순간에도 손을 잡아주는 이가 있었다.

"……그래. 그게 꼭 전부는 아니지."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알리시아 역시 그를 따라 웃었다. 맞잡은 서로의 손은 무엇보다 든든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두고 볼 게 아니라면, 대비를 해야겠군."

"어떤 대비 말씀입니까?"

"괴물로 변했던 건 그들만이 아니지 않나."

"……."

"……."

일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카벨레누스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들에 피식 웃었다.

"그런 눈으로 안 봐도 돼. 나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거든."

"……."

"괜찮으니 보고해."

카벨레누스의 재촉에 가제프는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뗐다.

"전하의 예상대로 여론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전하께서 변하는 모습을 본 데다가 실험체들이 벌인 일도 있으니까요. 지금이야 다들 눈치를 보며 쉬쉬하지만, 사태가 진정되면 한 번쯤은 말이 나올 겁니다."

"불안한 거겠지. 이대로라면 괴물이 차기 황제가 될 수도 있는 거잖나."

"전하께서는 실험의 피해자일 뿐입니다."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지."

카벨레누스는 창을 통해 엉망이 된 수도를 바라봤다. 목적을 위해선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내가 해온 일들을 부정할 생각은 없어. 상황이 어찌 되었든 간에 내 손으로 선택해서 쌓은 업보잖나."

"전하……."

"책임져야 할 자들은 죽었지만, 모든 걸 밝힐 수 있는 자는 남아 있지."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돌려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말없이 카벨레누스의 손을 단단히 잡아줄 뿐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끝이 난다면 그게 맞겠지."

"……."

"오래전에 미처 끝맺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있고."

카벨레누스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날처럼 쉬쉬하며 모든 걸 끝낼 순 없었다. 썩은 살은 완전히 도려내야 했다. 거기서부터가 새로운 시작점이었다.

16638397973303.jpg

* * *

"신전의 폐쇄라뇨! 저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건 신성 모독입니다!"

"왜 말이 안 되지?"

"프라임 교단은 제국이 건립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역사를 함께 해왔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가 아닙니다."

"이번 사태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빈센트는 뻔뻔스럽게 고개를 세웠다. 그는 죽은 헤르만을 대신해 신전 측에서 급히 내세운 새 대신관이었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발견된 괴물의 시신이 선대 대신관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나 보군."

"선대 대신관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을 가지고 신전 전체가 책임을 물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그 시신이 진짜 선대 신관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꼬리를 자르시겠다?"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솔직히 이번 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전하시지 않습니까."

빈센트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쾅쾅 쳤다. 가라앉은 사내의 시선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저희 신전은 구조대를 보내 상황에 대비하고자 했습니다."

"어설픈 구조대였지. 고위 사제나, 성기사들 없이 그저 생색내기에 불과한 구조대 말이야."

"저희의 노력을 폄하하시려는 겁니까?"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지."

카벨레누스는 앞에 있던 서류를 빈센트에게 던졌다.

"그간 신전이 벌인 부당한 이득에 대해 정리한 기록일세."

"이건 다 선대 대신관의-."

"이것도 선대에게 넘길 참인가? 하긴 그것도 괜찮겠군. 죽은 이는 말이 없는 법이니 말이야."

카벨레누스는 느긋하게 턱 끝을 매만졌다. 빈센트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짐승 같은 사내의 시선이 응시하고 있는 건 빈센트의 목이었다.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현실을 잘 보라고 충고해주는 거지. 나는 이제 아쉬울 게 없거든. 내가 실험체였다는 건 이제 다들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차피 황제는 되지 못할 것 같으니, 같이 죽자는 겁니까?"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

고개를 끄덕이는 카벨레누스에 빈센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번 일로 헤르만을 잃은 건 안타까우나, 그렇다고 살 궁리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황위를 계승해야 할 카벨레누스는 괴물이었으니까. 그를 향한 반감된 여론을 모아 공격하나거나, 그와 협상을 해 다시금 권력을 되찾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카벨레누스는 자신이 괴물이었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고 케케묵은 옛날이야기까지 끄집어내며 황실과 신전을 고발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대로면 정말 끝입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눌러놨다 해도 계속해서 말이 나올 겁니다. 사람들이 괴물 황제를 원할 리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말을 바꿔서-."

"나는 한 번 정한 일을 쉬이 바꾸지 않아."

"전하."

"내가 뭐 때문에 스스로가 실험체였다는 걸 인정했다고 생각하나. 단지 그대들과의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카벨레누스가 거만하게 웃었다. 지금 정권을 유지하는 건, 카벨레누스를 필두로 한 세력이었다. 카벨레누스가 실험체라는 걸 밝혔음에도 다들 눈치만 살살 보고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저희가 가만히 두고만 있을 것 같습니까? 전하께서 이렇게 나오신다면 저희도 그에 따른 반격을 할 겁니다."

무력만이 힘은 아니었다. 헤르만이 없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쌓아놓은 신앙심이라는 이름의 믿음은 프라임 교단이 가진 가장 큰 힘이었다.

"그마저도 내가 황위를 계승하지 않으면 상관없는 문제 아닌가."

"뭐라고……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위를 계승하지 않겠다고요?"

"방계이긴 하지만, 선대 황제가 미처 죽이지 못한 황족이 하나 있지."

"……."

카벨레누스는 깍지낀 손을 배 위에 올려놓은 채 상체를 등받이에 기댔다. 애당초 사내는 처음부터 황위에는 관심 없었다.

"차기 황제는 내가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네 말대로 사람들이 괴물 황제를 반길 리 없지 않나."

"허수아비를 만드시겠다는 겁니까?"

"아니. 그딴 귀찮은 짓을 할 리 없지."

"그러면……."

"나는 내가 가진 황족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모든 것을 반납할 생각이야."

그 말을 끝으로 카벨레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당초 오늘 빈센트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건 설득이나, 거래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물론 그 전에 새로이 맞이할 주인을 위한 청소를 끝내놓을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야."

카벨레누스의 검이 테이블에 꽂혔다. 빈센트는 반동으로 떨리는 검을 바라보며 몸을 달달 떨었다. 카벨레누스의 입술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는 다가올 사냥철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 * *

"설마 전하께서 황위 계승을 거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나는 어렴풋이 눈치챘었는데."

"눈치채셨다고요?"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카벨레누스는 모든 일을 정리한 후에 죽을 생각이었다면서."

"아……."

"내가 아는 카벨레누스는 죽기 전에 모든 걸 깔끔히 마무리했을 거야. 자신이 죽게 된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을 테니까."

카벨레누스가 사라지면, 후계자 문제가 부각되고 자연스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될 것이었다. 카벨레누스라면 그런 상황을 대비해 대비책을 마련해놨을 것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황위를 계승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카벨레누스에게 붙은 꼬리표 때문에?"

가제프는 알리시아의 눈치를 살피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괴물의 낙인이 찍힌 이상, 권력을 공고히 하지 않으면 금세 공격 대상이 되고 말 것이었다.

"재건 속도가 빠른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아쉬운 게 사라졌으니, 이제 슬슬 하나둘 배고프단 소리를 낼 때니 말입니다."

"걱정돼?"

"걱정보다 번거로운 거죠. 어지르는 것보다 귀찮은 게 치우는 거 아닙니까."

"자신만만하네."

알리시아가 키득거렸다.

"자신만만하다기보다는 확신이 있는 겁니다. 전하께서 괜히 제게 비 전하의 보좌 노릇을 맡긴 것이 아니죠."

가제프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계속해서 슈바르한을 비워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카벨레누스가 깨어났고 수도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으니, 이제 그만 슈바르한으로 돌아가야할 때였다.

"아쉽진 않으십니까? 전하와 만나신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는데, 또 이별이지 않습니까."

"괜찮아. 어차피 또 볼 거잖아."

"물론 그렇죠."

가제프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때였다. 등 뒤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내가 보였다.

"소맹주?"

"안녕하십니까. 제가 잠든 사이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큽!"

펜리르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혔다.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감아놓은 붕대에서는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네, 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걸요! 오히려 이런 건 영광의……."

펜리르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빤히 올려다보는 여자의 시선에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마음을 접겠다고 다짐했지만 할 수 없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저 얼굴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1663839797331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