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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52)화 (152/164)

152화. 사랑해요

2021.08.16.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다. 알리시아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금안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보고 싶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잘 잤어요?"

"…….."

"카벨레누스."

알리시아는 두 팔을 벌리려다가 잡힌 손을 발견했다. 그녀의 한 손은 카벨레누스의 두 손에 감싸져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남은 손을 뻗었다.

"많이 걱정했어요?"

"걱정? 그런 말로는 부족하지."

카벨레누스가 거친 숨을 뱉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그대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할까 두려웠어."

"약속했잖아요. 곁에 있겠다고."

알리시아의 손끝이 부드럽게 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카벨레누스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알리시아를 힘없이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어떻게 당신을 잊었는지 모르겠어."

"계속해서 기억이 덧씌워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럴 만해요."

"그래도 잊지 말았어야 했어."

"기억해냈으면 된 거예요."

"그대 덕분에 기억할 수 있었던 것뿐이지. 만약, 그대가 없었다면……."

카벨레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유화는 그림을 망쳐도 물감으로 덮어서 계속 그릴 수 있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그리다 보면 캔버스가 무척 두꺼워져요. 잘 감춘 것처럼 보여도 결국 티가 날 수밖에 없는 거죠."

"……."

"저는 좀 더 빨리 깨어나게 만들어준 것뿐이에요."

"……."

"그러니까,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그보다 다른 말이 더 좋은 걸요."

알리시아는 키득거리며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무리 완벽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한들, 현실보다는 못했다. 손안에 가득 찬 온기는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랑해요."

"……."

카벨레누스의 숨이 멎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럴수록 알리시아는 잔뜩 굳어버린 사내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당기고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이렇게 직접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이렇게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당신이 날 사랑하는 걸 느끼는 것처럼 당신도 그럴 거라는 걸 생각했고."

"……."

"이상하게 그 짧은 말을 뱉는 게 새삼스레 부끄러워서 못 했는데."

"……."

"당신과 떨어져 있으니까, 그 말을 많이 하지 못한 게 후회되더라고요."

알리시아가 멋쩍게 웃었다. 고작 짧은 말인데, 그게 뭐라고 아직도 뱉는 게 부끄러웠다. 뺨에서 느껴지는 열기로 보아 분명 카벨레누스에게 보이는 자신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것이었다.

"……그대는 항상 내 예상과 엇나가."

"그래서 싫어요?"

아니. 좋아. 짧은 답과 함께, 그대로 입술이 삼켜졌다. 제대로 맞물리지 못해 몇 번이고 뒤엉킨 손가락처럼 조급한 입맞춤이었다.

"하아……."

집요한 사내에 결국 거친 숨이 흘러나온다. 알리시아는 살짝 멀어진, 하지만 고스란히 숨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새카만 어둠이 완연히 내려왔음에도 황금색 눈동자는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선명하게 빛나는 사내의 두 눈동자는 노골적이다 싶을 만큼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굶주린 짐승 같은 사내가 바라는 바는 명백했다.

"말주변 없는 내가 고작 몇 마디 말로 감정을 표현하는 건 불가능해."

"……."

"하지만 꼭 말해야 한다면, 그리고 굳이 내 감정과 비슷한 것을 찾아야 한다면 결국 그 말이 되겠지."

사랑해. 사내가 웃었다. 눈앞의 여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꼭꼭 씹어 먹고서야 만족할 것 같은 짐승의 얼굴을 하고선. 하지만, 정작 여자의 미움을 받을까 억지로 본능을 억누르고 뒤로 물러나면서. 결국 알리시아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프라임은 소멸되었어요. 그리고, 그의 피를 가진 당신은 더는 마물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죠."

"……."

"당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오롯이 당신 거예요."

"……."

"당신이 옳았어요. 마물의 피가 있든, 없든 간에 당신은 날 똑같이 바라보잖아요."

알리시아는 기꺼이 사내를 끌어안고 목에 얼굴을 묻었다. 사내의 체온은 보통 사람의 것보다 높아 닿아 있는 것만으로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뭐든 듣지."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꽤나 많을 거예요. 전쟁이 끝난 후라 다들 바쁘거든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러니까, 지금만큼은 우리에게 양보해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다정하게 등을 다독여주고 있었지만, 잔뜩 굳은 사내의 얼굴은 그가 억지로 참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 당신을 원해요."

"……."

"당신이 원하는 것만큼이나."

"……그대가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그런 소리는 못 할 텐데."

사내가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알리시아는 대답 대신, 카벨레누스의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잡은 손을 통해 떨림이 느껴졌다.

"그만해, 알리시아."

카벨레누스가 쓰게 웃으며 멀어졌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괜찮아요."

"……."

"이제 제가 당신보다 더 강할 걸요."

"……."

"진짠데."

알리시아는 잡은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을 줬다. 단단한 사내의 팔은 알리시아가 그의 팔을 지지대 삼아 일어나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보기엔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왜요?"

"목이 너무 가늘잖아."

"그러고요?"

"전체적으로 너무 말랐지.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아."

애써 이성을 붙잡기 위해 찾은 핑계였는데, 시선이 움직일수록 되려 초조해진다. 카벨레누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머릿속을 빙빙 도는 생각은 방금 깨어난 여자를 보고 떠올릴 만한 행위가 아니었다.

"괜찮아요."

"알리시아, 제발."

"저는 당신을 믿어요."

"……."

"당신이 날 위험하게 만들 리 없잖아요."

알리시아의 손이 카벨레누스의 목덜미를 쓸었다. 사내의 몸을 본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손길에 움찔하는 반응을 보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물론 당신이 싫다면-."

"싫을 리 없잖아."

불쑥 다가온 사내의 얼굴에 알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카벨레누스는 자신을 도발할 때는 언제고, 맹수에게 잡힌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여자를 보며 긴 숨을 토했다.

"멈추려면 여기서 멈춰야 해."

"멈추는 건 당신이 아니라, 내 몫이에요."

"……."

"멈추지 말아요. 말했잖아요. 나도 당신을 원한다고."

알리시아는 눈을 감고 손을 뻗었다. 시야가 차단되자, 손가락 사이 여린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더욱 선명했다. 애당초 사내는 여자를 이길 수 없었다.

"……힘들면, 바로 말해."

입술이 몇 번이고 겹쳐졌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입맞춤은 그가 참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결국 알리시아는 도로 눈을 떴다.

"왜? 그만할까?"

그만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과 달리, 사내의 손은 너무 쉽게 물러났다. 알리시아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아예 카벨레누스의 양 손목을 잡았다. 사내의 손목은 굵어서 두 손으로 잡아도 다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겁나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

"당신이 안 하면, 내가 하면 되니까."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두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 곧장 그의 벌어진 옷깃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알리시아."

"나는 그날을 후회하지 않아요."

"……."

"우리는 그냥 사랑하는 것뿐이잖아요. 그게 잘못된 건가요?"

알리시아가 호기롭게 카벨레누스의 단추를 쥐었다. 카벨레누스는 잔뜩 힘이 들어간 여자의 손을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여자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멈추지 않았다. 손이 미끄러져 엇나간다 해도 알리시아는 꿋꿋이 단추를 풀어나갔다. 결국 백기를 드는 건 사내 쪽이었다. 아무리 잘 포장하려 해도 사내의 본심은 순진무구할 수 없었으니까. 결국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손등 위로 겹쳐진 손이 유난히도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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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러니, 짐승보다 못한 것 같군."

카벨레누스는 쓰게 웃으면서 알리시아를 내려봤다. 상기된 얼굴을 한 여자는 어여뻤다.

"후회해요?"

"후회하지 않아서 더 짐승 같이 느껴져."

카벨레누스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알리시아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에게서는 풀 내음이 났다. 예전, 한적한 시골에서 보냈던 시간처럼 평화로운 냄새였다.

"이러고 있으니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군."

미처 시트로 가려지지 못한 새하얀 몸이 사랑스럽다. 카벨레누스는 결국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드러난 어깨에 자잘한 입맞춤을 쏟아냈다. 입술에 닿은 살결은 녹을 듯 부드러웠다.

"그래도 일어나야 해요."

알리시아가 애써 엄하게 말했지만, 잠긴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말꼬리가 늘어져 퍽 귀엽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옅게 웃으며 잔뜩 흐트러진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붉은 기가 강한 머리카락은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색이 선명해 보였다.

"그런 말 들어본 적 있나?"

"무슨 말이요?"

"붉은색은 유혹의 색이라고."

카벨레누스는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피부에 슬쩍 손가락을 눌러봤다. 이성을 차리기에는 눈앞의 풍경이 너무나 달콤했다.

"이제 아침이에요. 사람이 올 거예요."

"아직 오진 않았지."

"어제는 그렇게 뺐으면서."

"그대가 내 생각보다 강하다는 걸 깨달아서 말이지."

카벨레누스는 보란 듯 알리시아의 손목 안쪽에 입을 맞췄다. 알리시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미간을 찡그릴 뿐이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유혹에 흔들리는 건 사내만이 아니었다.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불 밖을 나가면 복잡한 일투성일 텐데, 조금만 더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나."

"다들 일하고 있잖아요. 이제 그만 일어나야죠."

"잠깐이면 돼, 아주 잠깐."

몸을 붙여온 카벨레누스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느긋하게, 그러나 교묘하게 알리시아의 목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위를 향하고 있었다. 애당초 모든 것을 토해내기에는 짧은 밤이었다. 거친 숨이 오고 가고 끝없이 원하고, 탐미했음에도 원하는 바를 채우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사내는 항상 여자에게 굶주려 있었다.

"우리,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잖아. 좀 더 당신이 내 옆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

"……."

"정말 잠깐이면 돼."

알리시아가 옅은 숨을 삼켰다. 이성으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게 어려웠다. 카벨레누스만 알리시아에게 약한 게 아니었다. 그녀 역시, 사내에게 약했다.

"그렇다면-."

똑똑-.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들린 노크 소리에 노골적으로 알리시아의 목선을 어루만지던 사내의 손이 멈췄고, 동시에 알리시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거봐요. 사람이 올 거라고 했잖아요."

"모른 척하면 금방 지나갈 거야."

"이렇게 찾아올 거면 급한 일일 텐데, 그건 절대 안 돼요."

알리시아가 다급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카벨레누스는 허망한 표정으로 텅 빈 자신의 품을 바라봤지만, 돌아오는 건 셔츠뿐이었다.

"입어요, 얼른."

"……."

"안 입을 거예요?"

알리시아의 눈초리에 카벨레누스는 한숨을 푹 쉬며 셔츠를 주워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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