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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51)화 (151/164)
  • 151화. 깨어나야 할 시간

    2021.08.12.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내가 짓고 있는 표정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고백보다는 협박을 하고 있다고 오해할 만도 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게 참 좋았다. 기억이 없어도 카벨레누스는 달라지지 않았다. 얼굴의 솜털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고도 열띤 시선으로 자신을 좇고 있었다.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나는-."

    촉-.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춘 알리시아가 싱긋 웃었다.

    "도망 안 가요."

    "……."

    "내가 왜 도망을 가겠어요. 당신이 여기 있는데."

    자신보다 한참 큰 사내인데, 누그러진 표정이 퍽 귀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알리시아는 단숨에 기세가 죽은 카벨레누스에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돌아가?"

    "말했잖아요. 당신이 있어야 하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그럼, 당신은?"

    카벨레누스가 조급히 얼굴을 내밀었다. 불쑥 다가온 사내의 얼굴에 숨이 그대로 입술에 쏟아졌다.

    "당신을 두고 갈 생각은 없어."

    "굳이 그렇게 눈에 불을 켜지 않아도, 난 당신 옆에 있을 거예요."

    "……."

    "두려워 말아요.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니까. 원래 아침은 꿈에서 깨어나야 맞이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이제 그만 일어날 시간이에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현실을 자각한 후부터 카벨레누스의 모습은 서서히 흐릿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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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카벨레누스가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알리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냥 지켜보기만 하네."

    [내 목적은 이자가 아니니까.]

    프라임은 보란 듯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들겼다. 그는 카벨레누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벨레누스를 흉내 내도 소용없어."

    [그럼 이쪽은?]

    이번에는 미카엘이다. 프라임은 턱밑에 두 손을 받친 채로 생글생글 웃었다.

    "내 아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이건? 이것도 별로인가.]

    몇 번이고 모습을 바꿔도 알리시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프라임은 알리시아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처음처럼 카벨레누스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대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흉내 낸 것뿐이잖아."

    […….]

    "굳이 누군가를 흉내 내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추하다.]

    "진짜 네 모습이?"

    프라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리시아는 피식 웃었다.

    "나는 이미 마물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

    [그것과는 다르다.]

    "뭐가 다른데?"

    [나는…….]

    프라임은 알리시아의 눈을 피해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싶다면?"

    […….]

    "진짜, 널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알리시아는 선뜻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프라임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애써 감추려 해도 프라임의 두 눈은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들어주지 않을 거야?"

    [……아니.]

    결국 프라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프라임은 결심하듯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이런 모습이었구나, 너는"

    알리시아는 점점 형태가 일그러지는 프라임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숨을 뱉었다. 마물은 기본적으로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프라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흉측한 모습을 떠나 갈기갈기 찢긴 몸은 어떻게 형태를 유지하는지조차 의문일 정도로 엉망이었다.

    [감추려하지 않아도 된다. 내 모습이 끔찍하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솔직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해."

    […….]

    "하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잖아. 이런 모습이 된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알리시아는 망설임없이 프라임에게 다가갔고, 프라임은 반대로 뒤로 물러섰다. 찢긴 얼굴로는 표정을 지을 수 없었지만, 요동치는 금색 눈동자는 충분히 놀란 눈치였다.

    "이런 몸이라서, 날 이곳으로 부른 거지?“

    […….]

    "처음에는 네가 두려웠어.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알겠더라고. 너는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는 거."

    프라임은 카벨레누스를 통제하고 있었다. 연결을 끊기 위해 억지로 끼어든 알리시아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프라임은 알리시아가 카벨레누스에게 접근하는 걸 막지 않았다.

    [말했잖나. 내 목적은 그 사내가 아니었다고.]

    "그러기에는 나는 지금이라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걸."

    알리시아가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카벨레누스가 사라진 이후부터 이곳은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아침이 오면 자연스럽게 꿈에서 깨어나듯,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카벨레누스가 깨어난다면 곧 사라질 것이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줘. 어차피 우리에겐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잖아."

    [……확인이 필요했다.]

    "확인?"

    [그 사내를 통해 본 그대는 늘 행복하지만은 않았으니까.]

    "……."

    [뭐든 시작이 가장 어려운 법이지. 지금에야 달라져 보인다 해도 한 번 그런 모습을 보인 이상, 언제 그자가 예전으로 돌아갈지는 모르는 거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확신하지 마라. 내가 만든 환상은 사내의 무의식을 반영한 거다. 그대 때문에 벗어나긴 했지만, 결국 그가 원하던 삶은 이런 거였다.]

    프라임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무의식을 반영한다는 게, 꼭 이상적인 세계를 그려낸다고는 볼 수 없잖아."

    알리시아는 빠르게 심호흡을 했다. 무의식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밑바닥을 감추고 있기 마련이었다. 제멋대로 사람의 속내를 헤집어 그려낸 모습이 꼭 좋은 모습이라곤 할 수 없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두려워하거나, 혹은 강렬했던 기억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알리시아가 여전히 8년 전, 설원의 꿈을 꾸는 것처럼.

    "카벨레누스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을 봤어."

    알리시아의 손이 둥둥 떠다니는 덩어리에 닿았다. 덩어리에서는 여전히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실제로 일어나진 않았던 일들을 직접 겪은 것처럼 경험했지."

    [그러면서 그자는 그대를 잊었다. 만약 그대가 없었다면 그자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내가 없어도 벗어났을 거야."

    알리시아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네가 아무리 주도권을 빼앗아도 의식의 진짜 주인은 카벨레누스니까. 자연스럽게 그의 속내가 드러날 수밖에 없잖아."

    [속내?]

    "네 환상이 카벨레누스의 이상을 표현했을 뿐이라면, 그가 만족해야 하는 거잖아.“

    […….]

    "그런데, 내가 지켜본 그는 만족하고 있지 않았어."

    얼핏 보면 세계는 카벨레누스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만족하는 게 아니라면, 뭐지?]

    "후회지."

    [후회?]

    "다들 살면서 후회해보잖아. 그리고, 후회의 끝에는 항상 그런 말이 붙지."

    만약에. 뒷말을 덧붙인 알리시아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사람은 누구나 후회를 하고 거기에 사로잡히지.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결국 후회는 과거의 것이잖아."

    […….]

    "바로 알아차리긴 어려웠겠지만, 내가 아는 그라면 분명 깨달았을 거야. 후회했던 일을 아무리 좋게 바꾸고, 최선의 결과를 낸다 해도 그건 결국 과거가 반복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알았다. 그는 단순히 후회만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노력하고 싶어 했어. 내게, 그리고 우리 아이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야."

    […….]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이 과거에 계속 머물러 있을 리 없잖아."

    신뢰가 흔들린 적도 있었다. 카벨레누스를 믿을 수 없어 계속해서 의심했던 적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런 시간이 있어서 지금이 있었다. 비 온 뒤, 굳는 땅처럼 관계는 더 단단해졌다. 후회는 과거에 발목 잡히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그대는 하나도 안 변했다.]

    "나는 네가 아는 신이 아니야."

    [하지만 많이 닮았다. 느낌이 그렇다.]

    "……."

    [……나, 사실 알고 있었다. 나의 신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거.]

    프라임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신은 항상 인간을 지켜봤고 그들에게 너그러웠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들을 질투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의 신이 인간을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걸. 프라임은 가만히 알리시아를 내려다봤다. 한참 내려봐야 하는 작은 여자는 이제 신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알리시아.]

    "……."

    알리시아의 두 눈이 커졌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 마물은 프라임이 처음이었다.

    [대신관은 죽었고, 날 억압하던 속박도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껏 내가 모아온 신의 힘도 돌아왔지.]

    "……."

    [나는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할 거다. 이제 나는 낡고 오래된 것에 불과할 뿐이니까.]

    프라임이 느릿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오래된 고목을 연상케 하는 짐승의 두 눈은 지금껏 알리시아가 봐온 금안 중 깊었다. 새삼스럽게 눈앞의 짐승이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이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는 원래 그대에게 모든 것을 넘길 셈이었다. 지금으로선 그대가 가장 신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니까.]

    "……."

    [하지만 그대는 신이 아니다.]

    "……."

    [아니. 그보다는 그럴 수 없다는 게 맞겠지. 그대에게 중요한 건 힘이 아니었으니까.]

    프라임의 앞발이 내밀어졌다.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잡았다. 짐승, 그것도 넝마처럼 엉망이 된 앞발은 보는 것조차 징그러웠음에도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다.

    [그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지금으로선 이 힘을 맡을 사람은 그대밖에 없다.]

    "알고 있어."

    [하지만 잊지 마라. 내가 그대에게 힘을 넘기는 건, 그대가 신이 되길 바라서가 아니라는 걸.]

    "……."

    [내 볼일은 끝났으니 이제 그만 가도 좋다.]

    프라임의 앞발이 먼저 알리시아의 손을 빠져나갔다.

    "……그럼, 당신은?"

    [여기서 끝이겠지.]

    "……."

    [망설이지 마라. 그대에겐 기다리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마지막을 지켜봐줄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있어."

    알리시아는 프라임의 앞발에 손을 올렸다. 프라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결국 웃었다.

    [……역시, 그대는 나의 신을 많이 닮았다.]

    "……."

    [그래서, 나는 그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평생을 신을 되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늙은 짐승은 진심으로 신을 닮은 여자의 행복을 바랐다. 결국, 그녀가 바라던 행복은 신이 바라보던 풍경과 흡사하다는 걸 이제야 인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서야 피로가 밀려왔다. 드디어 오랫동안 자지 못한 잠을 청할 시간이었다.

    […….]

    짐승이 완전히 숨을 거두기까진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웅크린 짐승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녀가 잡고 있던 앞발을 시작으로 조각난 몸이 다시 붙으며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기뻐 보이네."

    알리시아는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 프라임을 마지막으로 쓰다듬었다. 이제 프라임은 더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괴물이 아니었다. 신화 속 그려지던 모습 그대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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