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놓치면 후회할 거야
2021.08.09.
"적갈색 머리의 여자요?"
"갈색 머리이긴 하나, 붉은 기가 아주 짙어. 멀리서 보면 붉은 머리라고 착각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카벨레누스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날 달려나가 밖을 확인했지만 적갈색 머리의 여자를 찾진 못했다. 그녀를 가까이서 봤을 리 없었다.
"……역시, 이상해."
"이상하다고요? 혹시, 첩자입니까?"
"그런 거 아니야."
"네?"
동그랗게 뜬 가제프의 눈에 카벨레누스는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화를 냈다는 걸 깨달았다.
"긴말하지 않을 테니까, 일단 여자부터 찾아."
"알겠습니다."
"……다치게 하진 말고."
"네?"
가제프는 눈을 두어 번 끔벅거렸다. 방금 자신이 상관의 말을 잘 들은 건지 의심스러웠다.
"다치게 하지 말라는 건……."
"비쩍 마른 여자야. 불필요한 제압은 필요하지 않아."
"네. 유념하겠습니다."
일단 대답은 했지만, 가제프는 곧장 방을 나서기보다는 한참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아는 상관은 굳이 저런 말을 덧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하, 혹시……."
"……."
가제프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카벨레누스는 더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잔뜩 인상을 쓴 채, 창문 너머를 집요히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요즘 바빠요? 얼굴 보기가 힘드네요."
"……."
"카벨레누스."
여자의 손이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들기고서야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창밖으로는 짙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며칠 전 마주쳤던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순간적으로 들어간 힘에 카벨레누스의 턱 근육이 불룩 튀어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사람이 불러도 몰라요."
"……."
"왜 그렇게 봐요?"
여자의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살포시 보였다. 늘 그렇듯 익숙한 얼굴이었다. 구김살 하나 없이 해맑은 미소가 잘 어울렸고, 그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
"오늘따라 정말로 이상하네요, 당신.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이상해서."
"뭐가요?"
감정이 변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자신은 여자가 웃는 게 좋았다. 말간 웃음을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우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답답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노골적인 유혹을 몇 번이나 받아왔음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고민이 있다면 뭐든 말해요. 내가 들어줄게요."
"고민?"
"나는 당신의 아내잖아요."
여자가 사내의 가슴에 슬쩍 기대며 몸을 붙여왔다. 카벨레누스는 잠깐 여자를 내려봤다가 이내 다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다시 적갈색 머리의 여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봐야겠어."
"간다고요? 어딜요?"
부드러운 손이 다급히 사내를 잡았다. 순진무구한 눈을 굴리는 여자에 카벨레누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가지 말아요."
"……."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제발, 가지 말아요."
여자가 울먹거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처연한 얼굴이었다.
"계속 함께해준다면서요."
아내는 그려놓은 듯 완벽한 미인이었다. 그래서 울음으로 일그러진 얼굴조차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런 걸 원한다면, 관상용 그림을 들이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건……. 카벨레누스의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창밖의 여자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이성으로는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는 이곳에 있었으니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내를 달래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만 했다. 하지만 창문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미안하다뇨.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야기는 나중에 들을게."
"그래서, 나를 두고 가겠다고요? 절대 안 돼요! 당신은 날 두고 못 가요!"
"알-."
거칠게 옷을 당기는 여자에 카벨레누스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여자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
"약속했잖아요! 항상 내 옆에 있어주기로! 이번에는 날 혼자 두지 않기로!"
퍽퍽, 가슴을 때리는 주먹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멍청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여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확실한 건, 아내의 이름을 모르는 남편은 없었다. 그리고……. 카벨레누스는 거칠게 이마를 짚었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다 못해 속이 메슥거렸다. 뭔가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확연히 떠오르지 않았다. 쏟아진 퍼즐 조각처럼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우리 지금껏 잘 지냈잖아요."
"……."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모든 걸 잃지 말아요. 당신이 원하는 건 이곳에 있는 걸요."
젖은 눈을 한 여자가 처연하게 웃었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차마 예전처럼 그녀의 눈가를 닦아줄 수 없었다. 차갑다, 뜨겁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카벨레누스의 동공이 떨렸다.
"……당신 머리, 언제부터 금발이었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금발은 아니잖아. 오히려……."
카벨레누스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스스로가 미친 것 같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한 번 꼬리를 물기 시작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야. 나는 당신이 염색한 모습을 본 적이 없거든. 그런데, 자꾸만 당신 머리카락 색이 푸른색이었던 것만 같아."
"……."
"심지어 검은 머리였던 적도 있었던 것 같고."
"……."
"붉은 기가 강한 갈색 머리였던 적도 있었던 것 같지."
마치 저 여자처럼. 카벨레누스가 허탈한 숨을 뱉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 쩌억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카벨레누스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았다. 천장이, 아니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 * *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카벨레누스는 멍하니 주변을 살폈다. 이상한 공간이었다. 사방은 어두웠지만, 희끄무레한 덩어리들이 둥둥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
가만히 덩어리를 바라보던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덩어리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아내라고 생각했던 여자와 함께하는 영상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덩어리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 안에 담긴 영상들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이곳에는 무엇이 진짜 자신이 겪은 일인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기억들이 존재했다.
"여기는 도대체……."
"환상이죠."
"……."
등 뒤에서 낯선, 하지만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벨레누스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덧 그의 등 뒤에는 적갈색 머리의 여자가 서 있었다.
"……."
"안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적갈색 머리의 여자는 태연히 말을 걸었다. 카벨레누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여자를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미안해요. 너무 늦게 왔죠."
"……당신은 누구지? 날 아나?"
"단순히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알고 있죠."
여자는 웃었고, 카벨레누스의 눈가는 떨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적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하는데."
"아뇨. 당신은 알고 있어요."
"안다고?"
"당신이 날 모를 리 없잖아요."
여자의 미소가 진해졌다.
"나는 당신 이름도 몰라."
"괜찮아요.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거든요."
"알리시아."
"……."
"그게 내 이름이에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성은 뭐지?"
"폰 슈바르한 블랑셰."
"내가 그런 장난이 통하는 상대로 보이나?"
카벨레누스가 짧게 경고했다. 목을 긁어내는 소리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닮아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움츠러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웃을 뿐이었다. 카벨레누스의 이마 주름이 깊어졌다.
"그 성을 쓸 수 있는 건, 단 두 명뿐이야. 나와 그녀."
"그녀가 누군데요?"
"슈바르한 대공비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 말이에요?"
"……."
다 안다는 시선이 거슬려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곰곰이 떠올려봐도 아내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꽉 다물린 사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카벨레누스."
"나는 그대에게 내 이름을 허락한 적 없어."
"그럼 당신도 날 이름으로 불러요. 그러면 공평해지잖아요."
"당신, 진짜-."
"실은 공평한 것보다, 내가 당신이 불러주는 내 이름을 좋아하는 거지만."
카벨레누스의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불쑥 내밀어진 알리시아의 손이 얼굴에 닿아 있었다.
"……당신, 도대체 뭐야."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실은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알리시아의 손을 거절하지 않은 건 자신이었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요."
"……안다고?"
카벨레누스의 잇새로 억눌린 숨이 흘러나왔다. 뺨을 스치는 감각이 기묘했다. 알리시아의 손은 보통 귀족 영애와 달리, 다소 거칠었다. 하지만 되려 그 사실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처음에는 현실과 크게 다른 바 없었겠죠. 이곳이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게끔이요."
"……."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할 때쯤 기억을 조금씩 바꿨겠죠. 현실을 영영 잊고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말이에요. 하지만 그건 결국 환상일 뿐이에요."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벨레누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낮춰 여자의 시야를 맞추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를 똑바로 봐요. 그리고,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뭐였는지 떠올려봐요."
"……."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요."
두 사람의 거리가 좀 더 좁혀졌다. 알리시아는 부드러운 손길로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기억을 잃어도 카벨레누스는 자신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설득한다면, 그를 환상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때였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나 말고 다른 여자가 있었던 거예요?"
알리시아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금발의 여자에 눈을 크게 떴다. 위험했다. 아직 카벨레누스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자신보다는 자신을 대체하던 여자를 더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묻고 있잖아요. 당신, 지금 뭐 하는 거냐고."
"……."
"카벨레누스!"
"……."
대답 없는 카벨레누스에 여자가 연거푸 그를 불렀지만, 카벨레누스는 미동도 없었다. 핏줄이 바짝 선 사내의 눈은 오롯이 알리시아만을 담고 있었다.
"왜 돌아보지 않아요?"
"당신이 그랬잖아. 이건 환상이라고."
"무슨 근거로 날 믿는 거예요?"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빠졌다. 카벨레누스는 멀어지는 온기에 자신도 모르게 팔을 움직였다. 어느샌가 잡고 있는 쪽은 반대가 되어 있었다.
"잘 모르겠어. 그대가 어떤 존재인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전부."
"……."
"그런데, 우습게도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
지금 여기서 당신을 놓치면 후회할 거야. 사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