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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49)화 (149/164)
  • 149화. 등을 떠밀어주는 사람

    2021.08.05.

    모르코 부인은 죽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알리시아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알리시아는 아직도 그날의 꿈을 꿨다. 절 등진 모르코 부인의 뒷모습을 잊지 못했다.

    "왜 그러세요?"

    모르코 부인이 웃었다. 알리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똑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몇 번이고 살펴도 눈앞의 모르코 부인은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비 전하?"

    "……."

    모르코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리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깨에 닿은 모르코 부인의 손에는 온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조금도 안 달라졌네."

    알리시아는 쓰게 웃었다. 눈을 의심하리만큼 모르코 부인은 생전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힘이 빠졌다. 모르코 부인은 8년 전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카벨레누스, 미카엘, 가제프까지, 모두들 8년 전과 비교하면 세월이 흐른 티가 났는데, 모르코 부인은 아니었다. 그녀의 시간은 유일하게 8년 전의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왜 쉽지 않을 거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결국 이 세계는 생각대로 움직이는 거잖아. 이뤄질 수 없는 일도 여기선 가능하지. 힘겹게 노력하지 않아도, 그저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이상적인 세계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거야. 정말로 달콤한 유혹이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모르코 부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알리시아는 대답 대신, 두 팔을 벌려 모르코 부인을 끌어안았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되새겨서일까, 이제 모르코 부인에게서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모르코 부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

    "나는 이번에도 부인에게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어."

    아직도 후회를 한다. 그때, 그렇게 모르코 부인을 두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조금이라도 빨리 힘을 되찾았다면 그녀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아무리 후회를 한다 해도 그건 지난 일이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여기서 머물게 되면 참 좋을 거야. 현실에서 일어났던 모든 안 좋은 일들은 전부 잊고, 후회했던 일,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모든 일들이 없던 것이 될 거야."

    "비 전하."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알리시아의 손끝이 떨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살 거야.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과거를 등지고 현재를 살 거야."

    "……."

    "물론 살다 보면, 많은 일이 있겠지. 어쩌면, 지금까지 겪었던 것보다 더 힘든 시간이 찾아와서 지금 이 순간이 간절하게 떠오를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산다는 거잖아. 알리시아는 고개를 들어 모르코 부인을 올려다봤다. 알리시아의 두 눈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부인에겐 정말로 미안해. 내가 없었다면, 부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차마 부인을 만난 걸 후회할 수 없더라. 정말로 좋았거든. 부인과 함께 보낸 모든 순간들이 말이야."

    눈앞의 모르코 부인은 카벨레누스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가짜였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이미 죽은 모르코 부인에게 닿을 순 없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말하고 싶었다.

    "내게 있어서 부인은 최고의 스승이었어."

    알리시아는 마지막으로 두 팔에 힘을 줬다. 그리고 천천히 모르코 부인에게서 멀어졌다. 다시금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리시아의 시선 끝에는 카벨레누스가 있었다. 툭-. 그때였다. 알리시아는 등을 떠미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그녀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텅 빈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 구현되었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가슴이 벅찼다. 알리시아가 기억하는 모르코 부인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라면서 등을 떠밀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안녕, 부인."

    알리시아는 짧은 인사말을 끝으로 다시 등을 돌렸다. 이제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나아가는 뒷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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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뭘 그렇게 봐요?"

    "아니. 날씨가……."

    카벨레누스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확실히 날씨가 좋긴 하네요."

    "……."

    "왜, 그렇게 빤히 바라봐요?"

    "……우리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나?"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어디선가 이런 일을 겪은 것 같아서."

    "이런 일이요?"

    "다른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분명 그때도 그대랑 같이 풍경을 바라봤던 것 같은데……."

    카벨레누스는 말끝을 흐리며 이마를 짚었다. 더 생각하려고 해도 무리였다. 뿌옇게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이 흐릿했다.

    "오늘따라 안 어울린 소리를 하네요. 혹시 꿈이라도 꾼 거예요?"

    "……어쩌면, 그럴지도."

    카벨레누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깊게 생각해봤자 어차피 떠오르는 건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옆에 있었다. 허튼 곳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대낮이니까 얼른 꿈에서 깨시죠.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요."

    여자가 손을 뻗어 카벨레누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카벨레누스는 잠자코 얼굴을 내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어나봐야 알겠지만 모르코 부인의 말로는 여자아이일 것 같대요."

    "여자아이?"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인데, 부푼 배 모양에 따라 아이의 성별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

    "왜 그래요?"

    "남자아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랬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여자를 꼭 빼닮은 남자아이였을 것 같았다.

    "……혹시, 남자아이를 원했던 거예요?"

    여자의 두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카벨레누스는 당황해 급하게 그녀의 손을 쥐었다.

    "원한 건 아니고, 그냥 느낌이 그래서."

    "의외네요. 저는 당신이 딸을 원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절 닮은 아이라면 사랑스러울 거라면서요."

    "그렇겠지."

    카벨레누스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여자의 말대로 그녀를 닮은 아이라면 무척 사랑스러울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어도 떠오르는 건 여자아이가 아닌, 사내아이였다.

    '적갈색 머리에…… 아니. 왜 머리카락 색이 적갈색인 거지?'

    이어진 생각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카벨레누스는 통증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여자는 금발이고 자신은 흑발이었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둘 중 한쪽의 머리카락 색을 닮았어야 했다. 적갈색 머리카락을 떠올리는 건 이상했다.

    "솔직하게 말해봐요. 아이의 성별이 마음에 안 드는 거죠?"

    "아니. 그렇지 않아."

    "아니라는 사람치곤 표정이 좋지 않은 걸요."

    여자의 두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다. 카벨레누스는 당황해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게 아니라, 요즘 따라 자꾸만 머리가 지끈거려서 그래."

    "많이 아픈 거예요?"

    "아냐. 참을 만해.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곧 나아지겠지."

    걱정하는 표정은 보고 싶지 않다.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을 감쌌다. 여자의 녹색 눈동자에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다.

    "……."

    입을 맞출 셈이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입 맞추셔도 돼요."

    여자가 웃었다. 스쳐 지나가도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예쁜 얼굴로 웃으니 더욱 예쁘게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안 해주실 거예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

    스스로가 생각해도 멍청한 변명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절 향한 따가운 눈총에도 아무런 욕망도 들지 않았다. 결국 카벨레누스가 할 수 있는 건,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변명을 덧붙이는 것뿐이었다.

    "정말이야."

    "사람들이 그러던 걸요. 아내가 임신하면 남편이 다른 마음 먹기 쉽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요?"

    "그게……."

    카벨레누스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자꾸 이러시면, 저 친정으로 돌아갈 거예요."

    "친정?"

    "그래요. 친정."

    여자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카벨레누스는 숨을 삼켰다. 또 이렇다. 콕 집어 말할 순 없는데, 뭔가 거슬렸다. 모든 게 완벽한데 기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카벨레누스는 조심스럽게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일그러지면 초조해지는 걸로 봐선 여자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

    '아니면, 내가 정말로 다른 마음을 먹기라도 한 건가.'

    카벨레누스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하기에는 끌리는 상대가 없었다. 그를 초조하게 만드는 건, 여전히 여자 한 명뿐이었다. * * *

    "왜 자꾸 그러시는 겁니까."

    "내가 뭘."

    "비 전하 말입니다."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모르코 부인을 보며 카벨레누스는 한숨을 쉬었다. 잔뜩 굳은 얼굴을 보아하니 결코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정말 다른 여자라도 생기신 겁니까?"

    "그런 거 아니래도."

    "그런데 왜 자꾸 그러십니까. 비 전하께서는 지금 임신 중 아니십니까."

    "……."

    "전하."

    모르코 부인의 재촉에 카벨레누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상해."

    "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 그냥, 전부 다 이상한 것 같아."

    기시감 같은 건 아주 잠깐일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느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글쎄.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 걸까."

    문제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도로 입을 열려다가 이내 포기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전하."

    모르코 부인이 다시금 카벨레누스를 재촉했다. 결국 카벨레누스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아."

    "……."

    "다들 하나같이 당연하게 웃고 있는데, 나만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전하."

    "그놈의 전하 소리는 그만해. 그대가 안 그래도 내 머릿속은 깨질 것 같으니까."

    "……."

    "얼른."

    명백한 축객령에 모르코 부인은 더 말하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카벨레누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필이면 오늘은 날씨조차 더럽게 좋았다.

    "……아니, 애당초 나쁜 날이 있긴 했나?"

    카벨레누스가 짧게 조소했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항상 날이 좋았다. 어떤 일이든 잘 풀리고 모든 게 쉽게 손에 들어왔다. 누군가 좋은 것만 잔뜩 모아서 머리 위에서 뿌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것들이 주어져도 만족스럽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배부른 고민이나 하는군."

    카벨레누스는 쓰게 웃으며 가슴 언저리를 더듬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속이 허했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데도 모아도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정작 잃어버린 것이 뭔지 몰라서 짜증만 날 뿐이지만. 카벨레누스는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답답해 창문을 열고 찬바람이라도 쐬어야 싶었다.

    "……."

    아, 눈이 마주쳤다. 창문을 열던 카벨레누스의 손이 멈췄다. 붉은 머리의 여자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

    단지 우연일 것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길에 잠시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카벨레누스는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햇빛 아래에서 빛나는 여자의 머리카락은 노을처럼 예뻐서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지던 햇살조차 괜찮게만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여자의 눈동자는 과연 무슨 색으로 빛났을지 궁금해져 버렸다. 그리고……. 꿀꺽-. 카벨레누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어쩐지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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