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상적인 세계
2021.08.02.
[......정말로 할 셈인가?]
[응.]
[방법도 알지 못하지 않나.]
[그래도 시도해볼 거야.]
[…….]
단호한 대답에는 틈이라곤 없었다. 결국 백기를 든 건 마물 쪽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뭐든 시도하려고 전전긍긍 애쓰는 알리시아를 외면할 수 없었다.
[우리가 프라임이라면 저 사내의 기억부터 읽었을 거다.]
[기억을 읽는다고?]
[특별하다는 건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고, 그만큼 상대에게 약해진다는 뜻이니까. 그대의 마음을 꼬여내기엔 저 사내만큼 좋은 가면도 없을 거다.]
마물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울렸다. 아직도 그들은 알리시아가 포기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수백, 아니 수천 번일지도 모른다. 저 사내를 흉내 내고, 그대의 마음을 자극하며 같은 짓을 반복하고 또 할 거다. 결국 저 사내를 완벽하게 모방해 그대를 따라나설 거다.]
[수를 다 알면서도 당하진 않아.]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다. 프라임은 정말로 교묘하거든.]
[그래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야.]
[약한 소리를 하길 바랐는데, 그건 무리겠군.]
마물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알리시아는 일부러 소리 내 웃었다.
[금방 돌아올게.]
[…….]
[내 행복에는 너희도 포함이거든.]
[……그래. 기다리고 있겠다.]
마물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인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알리시아는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기억해요? 날 위해 뭐든 하겠다고 말했던 거."
"……."
"나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을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어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손을 깍지 끼듯 감싸 쥐었다.
* * *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카벨레누스는 흐릿한 정신 속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나무 천장이었다.
'……낡았군.'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새 나무를 덧대 수리한 흔적이 엿보이긴 해도 전체적으로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은 지 오래된 집인 모양이었다.
'슈바르한은 아니고, 수도인가.'
귀족의 저택처럼은 보이지 않았지만, 실험체들이 날뛰었으니 피해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멀쩡한 곳들을 엄선해 임시 거처를 정했을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신은 괴물로 변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쓰러져 있던 동안, 돌아온 건가? 아니면, 그녀가…….'
몽롱하던 정신이 떠오른 얼굴 하나에 금세 돌아왔다. 카벨레누스는 얼굴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
몸을 일으키려던 카벨레누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품에는 여자가 안겨 있었다.
"으음……."
구불거리는 적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카벨레누스는 코끝을 찰랑이는 익숙한 향기에 숨을 삼켰다.
"……알리시아."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제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여자의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언제 온 거야?"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알리시아의 뺨을 쓸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잠결에 자신을 끌어안는 두 팔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결국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깨우진 못하고 도로 그녀에게 팔을 내줬다. 피곤했던 모양인지, 그녀는 쉽게 깨지 않은 채 새근새근 숨소리만 뱉을 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내어주고 남은 손으로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줬다. 손끝에 감기는 머리카락은 실크 못지않게 부드러웠고, 동시에 창가에 비친 햇살의 온기를 머금어 따뜻했다.
"……."
"……뭐예요, 언제 일어났어요?"
그렇게 얼마나 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걸까. 살짝 어눌한, 잠결에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카벨레누스는 옅게 웃었다.
"많이 피곤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피곤한데요."
알리시아의 입술을 삐죽 내밀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잠을 이기지 못하겠는지 쉽게 눈꺼풀을 뜨진 못했다.
"피곤하면 더 자."
카벨레누스의 손끝이 알리시아의 눈가를 다정히 어루만졌다. 거친 촉감과 달리, 부드러운 손길에 알리시아는 키득거렸다.
"입 맞춰주세요."
"……입?"
"늘 그렇게 깨워줬잖아요."
알리시아가 보란 듯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내밀었다. 카벨레누스는 안겨 오는 알리시아를 받으면서도 양 눈썹을 좁혔다. 움직이면서 이불 안쪽이 엿보인 탓이었다.
"왜 그래요?"
이상함을 감지한 알리시아가 눈을 떴다.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가는 목선을 지나 둥근 어깨, 그리고……. 점점 더 밑으로 향하던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굳었다. 이불로 가려져 다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가려지지 않은 부분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 표정이 안 좋아요."
"악몽?"
"당신, 요즘 계속 악몽을 꾸잖아요."
"……."
"당신이 그동안 많이 힘들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젠 다 끝난 일이잖아요."
"……다 끝난 일이라고?"
카벨레누스의 두 눈이 흔들렸다.
"전쟁은 끝이 났고, 당신은 이렇게 내 옆에 있죠."
"……."
"우리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요."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이 스쳐나간다. 카벨레누스는 단단하게 맞물린 자신과 알리시아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자신을 걱정하는 눈은 분명 그가 알고 있는 여자의 것이었다.
"……이상해."
"뭐가요?"
"꿈이라 하기엔 너무 생생해. 나는 분명 수도에 있었고-."
"기절했었죠. 다행히 큰 상처가 아니라, 누적된 피로 때문이라서 금방 깨어났고요."
"하지만, 나는 그때……."
"다른 모습이었죠. 물론 기절한 후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긴 했지만요."
다 안다는 듯 알리시아가 웃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은 여자의 눈동자에선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입을 뗐다.
"그러면, 여긴 수도인가."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럼?"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변하는 모습을 봤고, 당신을 황제와 같은 편이라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도망쳐왔다는 건가?"
"잠깐 쉬는 시간을 갖는 것뿐이에요."
알리시아가 급히 위로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그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더 말할 것이 남아 있나?"
"애써 참을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서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참는다고?"
"당신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실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요."
"……."
"당신이 괜찮다면 계속해서 악몽을 꿀 리 없잖아요."
알리시아의 어깨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느덧 여자의 눈가는 젖어 있었다.
"꿈은 꿈일 뿐이야."
카벨레누스는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알아요. 꿈은 꿈이죠. 하지만 악몽을 꾼 날의 당신은 좀 달라요. 오늘처럼 깨어나선 모든 게 처음인 사람처럼 날 보거든요."
"……."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조급한 마음이 들어요. 당신이 그럴 때마다 날 두고 어디론가 훌쩍 떠날 것 같아서."
알리시아가 걱정스레 카벨레누스를 응시했다. 카벨레누스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국 긴 숨을 토해냈다. 사내는 도저히 여자의 애처로운 눈을 외면할 수 없었다. * * *
"뭘 그렇게 봐요?"
"아니. 날씨가 좋아서."
"요즘은 악몽 이야기를 안 하네요."
"악몽?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었다. 분명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거라면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나 보죠."
"……그런가?"
"그것보다 이것 좀 골라주세요. 우리 아이에겐 어떤 옷이 좋을까요?"
"아이?"
"설마 제가 임신했다는 것도 잊은 건 아니죠?"
알리시아의 두 눈이 새침해졌다.
"우리 첫 아이잖아요."
"……첫 아이?"
"하루아침에 당신 태도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애써줘요. 우리 아이잖아요."
"……."
알리시아가 보란 듯 부푼 배를 내보였다. 산달이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배는 나날이 부풀어가고 있었다.
"어색해도 함께 노력하기로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했지, 노력하기로."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줘요. 나, 다리 저리지 말라고 마사지는 잘 해주면서."
"……."
"아, 그렇지. 그러고 보니 당신은 생각해둔 아이의 이름 없나요? 모르코 부인이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지만, 당신이 지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글쎄. 작명에는 소질이 없어서."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봐요. 고민도 하지 않고 말하는 건 너무 하잖아요."
알리시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처음에는 소심하기만 했던 그녀는 이젠 더할 나위 없이 밝고 명랑해져 있었다, 아니. 그녀가 정말로 소심했던가? 그러고 보니, 우리는 처음에 어떻게 만났더라? 카벨레누스는 또 한 번 이마를 짚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알리시아가 카벨레누스를 빤히 올려다봤다. 조명 아래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여전히 예쁘게만 보였다. 모든 고민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아니. 아무것도."
결국 카벨레누스는 더는 생각하길 멈췄다. 그리고 절 보는 여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 * *
'현실 감각을 잊지 않으려면,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계속해서 자각해야 한다고 했지.'
알리시아는 볼을 꼬집은 손을 놓았다.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사실이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일단 카벨레누스부터 찾아보자.'
알리시아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끝없는 어둠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리시아의 발밑에는 실처럼 가느다란 빛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알리시아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한 발짝, 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이상하게도 캄캄하기만 했던 공간은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모습이 바뀌었다.
"여긴……."
완전히 뒤바뀐 풍경에 알리시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치미는 불길은 유난히도 거셌지만, 막상 닿은 불은 조금도 뜨겁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마른 침을 삼키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이곳은 그녀에게 있어선 익숙한 공간이었다.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가 그렇듯이.
"카벨레누스."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찾아 헤매던 사내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사내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사내의 시선 끝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검을 질질 끌며 악착같이 걸어오고 있는 여자가. 알리시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타인의 시각으로 보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기묘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보고 있을 순 없었다. 아직도 빛은 이어져 있었다. 알리시아는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풍경은 뒤바뀌었고, 어느샌가 폐허가 된 노이슈타인 성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설원이 보였다. 아무래도 지난 과거를 보여주려는 모양이었다.
'과거를 전부 확인해야 카벨레누스를 볼 수 있는 걸까.'
떠오르는 추측에 알리시아는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빛의 끝에 카벨레누스가 있다면 지체할 수 없었다.
"……."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잘만 앞으로 나아가던 알리시아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이내 멈췄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공간이 보여주고 있는 장면은 그녀가 기억하는 과거와는 달랐다.
"엄마!"
그때였다. 불쑥 튀어나온 손이 알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알리시아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절 보는 눈에 차마 손을 놓지 못했다. 미카엘이 자신을 바라보며 배실배실 웃고 있었다.
"이제 엄마가 술래야! 알았지?"
"……."
"왜? 엄마는 술래하기 싫어?"
"……."
"싫으면 할 수 없지. 그러면 이번에는 엄마 말고 아빠가 하는 걸로 하자!"
"그럼 매번 내가 술래잖아."
"그래서 싫어?"
미카엘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결국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으면서도 앞으로 나섰다.
"좋아! 그럼 이번에도 아빠가 술래-."
"넘어진다고 달리지 말랬지!"
"아빠가 잘 받아주니까 괜찮아. 그렇지, 엄마?"
미카엘이 다시금 알리시아를 불렀다. 카벨레누스의 품에 안겨 키득거리는 아이는 아빠를 대하는 데에 조금의 스스럼도 없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렇게 잘 지내시는 걸 보면, 그때 걱정했던 게 괜한 기우였나 싶습니다."
"그게 다 우리 아가씨, 아니지. 비 전하께서 잘해주신 덕분이지요."
알리시아는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어느덧, 그녀의 옆에는 가제프와 모르코 부인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