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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47)화 (147/164)
  • 147화. 내가 바라는 행복

    2021.07.29.

    "비 전하라면……."

    가제프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알리시아는 마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녀라면, 카벨레누스를 구할 방도를 알고 있을지 몰랐다. 가제프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통신구를 찾아 알리시아와 연락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가제프는 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분명 보였다. 조금 전까지 미동도 없었던 카벨레누스의 몸이 약간이나마 움직였다. 가제프는 성급히 주저앉아 다시 카벨레누스의 상태를 살폈다. 미약하지만 착각은 아니었다. 맥박이 느껴졌다. 카벨레누스의 심장이 다시 뛰고 있었다. 그리고, 터럭으로 덮인 짐승의 몸이 서서히 작아지고 있었다.

    "아……."

    가제프는 말 한마디 제대로 뱉지 못하고 눈물만 쏟아냈다. 어느덧, 가제프의 품에는 그가 기억하는 모습의 카벨레누스가 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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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비 전하."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이동 마법에 필요한 마나석을 구하는 동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

    알리시아는 성급히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대규모의 군대를 이동시키기 위한 연료로 채굴해둔 마나석을 대부분 사용했고, 임시로 설치해놓은 게이트는 망가진 것도 많았다. 수도로 오기까지 필요한 마나석을 구하고, 멀쩡한 게이트를 찾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하나, 이런 일이 생기니 떠오르는 건 비 전하의 얼굴이더군요."

    "나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카벨레누스는 어때?"

    "의사의 소견으로는 큰 문제는 없다고 했습니다."

    가제프는 말끝을 흐렸다. 의사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했지만 정작 카벨레누스는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정말로 괜찮대?"

    "네. 몇 번이고 확답을 들었습니다. 다만……."

    "다만?"

    "사람들이 전하께서 변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가제프는 씁쓸하게 웃으며 곧장 말을 이었다.

    "아직 전하께서 깨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쉬쉬하고 있지만, 깨어난 후에는 파장이 클 겁니다. 전하께서도 실험의 피해자라고 알려도 사람들이 보기엔……."

    "카벨레누스만이 유일하게 사람으로 돌아왔기 때문이겠지."

    "전하께서 일부러 괴물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결국 이번 일로 이득 볼 만한 건, 카벨레누스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우선 계승권은 카벨레누스에게 있었다. 이번 일로 카벨레누스는 자연스레 후계를 이을 명분이 생길 뿐만 아니라, 신전의 붕괴로 절대적인 황권을 누리게 될 것이었다.

    "황실은 붕괴되었지만 신전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니까요. 성기사단과 사제들은 전쟁통에 구호 활동을 하기도 했고, 대신관이 실종되면서 여러모로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권력은 한정되어 있기에 황권과 신권은 항상 반비례했다. 대신관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신전 측 입장에서는 카벨레누스의 계승이 달가울 리 없었다. 무엇보다 제르페누스의 집무실에서 나온 건, 그의 주검만이 아니었으니까.

    "대신관은 아직도 못 찾은 거야?"

    "아직까지 발견되진 않았습니다. 다만, 황제의 집무실에서 찢긴 사제복이 발견된 정황으로 봐선……."

    "그 역시, 변했을 수도 있다는 거네."

    알리시아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확률이 크다고 보지만, 지금으로선 그걸 입증하기엔 증거가 부족하니까요. 다만, 지금으로선 대신관 없는 신전 측이 목소리를 내봤자 한계가 있고, 대신관으로 의심되는 시신도 저희 측에서 확보했으니 나쁜 상황만은 아닙니다."

    "오랜 신앙심을 뒤집으려면, 충분히 자료를 모아야 할 거야."

    "어렵긴 해도 도전할 만하죠. 믿음이 큰 만큼 배신감도 클 테니까요."

    "자료를 내기 전에 제대로 정리를 해야 해. 카벨레누스는 실험의 피해자인 동시에, 황실과 신전. 양측 모두와 얽혀 있는 관계자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빠르게 옮겨지던 알리시아의 걸음이 멈췄다. 알리시아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알리시아가 옅게 웃었다. 웃음이 나올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할 수 없었다. 축 처진 사내의 어깨는 처량할 정도로 안쓰러워 보였다. 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위로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전부 제 탓입니다."

    오히려 위로가 독이 되었는지 가제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게 다 제가 미흡한 탓에-."

    "클라우드 경 탓이 아니야."

    "주군을 지키지 못한 것부터 죄입니다. 만약 제가 조금이라도 더-."

    "경의 탓이 아니라고 했어."

    알리시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가제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잠깐 안 본 사이, 알리시아의 얼굴에는 굳건한 표정이 생겼다.

    "괜찮아. 카벨레누스는 곧 깨어날 거야."

    "……비 전하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아직은."

    알리시아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미세하지만 분명 이어져 있었다. * * *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은 무척이나 핼쑥해져 있었다.

    "예전 생각이 나네요."

    알리시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쓰러진 카벨레누스를 보고 있자니, 예전, 그의 기분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렇게 만나러 왔는데, 날 바라봐주지 않을 거예요?"

    돌아오지 않을 대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알리시아는 애써 웃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카벨레누스는 항상 강한 사내였다. 그래서 이렇게 약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너희가 보기엔 어때?]

    [예상대로다.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힘? 무슨 힘을 말하는 거야?]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나, 저 사내에게서 느껴지던 프라임의 힘이 더 커졌다. 아무래도 프라임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방도는 없어?]

    [연결을 끊으면 된다.]

    고심했던 것과 달리,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안도하며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연결을 끊으면 된다는 게 무슨 뜻이야?]

    [우리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생각과 감정, 심지어는 힘까지 공유할 수 있다.]

    [그 말은 너희라면, 카벨레누스를 구하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야?]

    [아니. 우리는 할 수 없다.]

    이번에도 빠르게 대답이 돌아왔다. 아까보다 훨씬 단호한 대답이었다.

    [왜 할 수 없는데?]

    [프라임은 추방당했다. 우리가 될 수 없는 자다. 우리는 그의 목소리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실험체의 목소리는 들었잖아.]

    실험체의 비명을 먼저 들은 건, 마물들 쪽이었다. 실험체의 시초격인 프라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건 이상했다.

    [원래 프라임은 우리 중 가장 강한 개체였다. 그가 우리에게 말을 걸면 모를까, 우리는 그에게 말을 요구할 수 없다.]

    [그 말은…….]

    알리시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우리가 프라임과 연결되려면 그가 원해야 한다.]

    [시도조차 해볼 수 없는 거야?]

    [이미 해봤다. 하지만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

    [그는 우리와 대화할 생각이 없다.]

    [만약, 연결을 끊지 않으면 어떻게 돼?]

    감정을 갈무리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미 겪어보지 않았나. 감당하지 못할 힘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렇다면 더욱 이대로 두고만 볼 순 없어.]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저 사내는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

    [비슷하다고?]

    [죽진 않을 거다.]

    [……결국 죽지만 않을 뿐이라는 거잖아.]

    마물들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걸 다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무심히 대답하는 마물이 밉게만 느껴졌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카벨레누스의 손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조금의 힘도 느껴지지 않는 손은 더는 든든하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그럼 나는 어때?]

    [그대?]

    [프라임은 신을 기다려왔잖아. 내가 말을 걸면, 그도 들어주지 않을까? 무엇보다 미흡하긴 해도 내 힘이 상위의 것이기도 하니까-.]

    [안 된다.]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성급한 답이 돌아왔다. 알리시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곱씹었다.

    [내 힘이 아직 미흡해서 그러는 거야?]

    [힘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대라서 안 되는 거다.]

    [나라서?]

    [프라임은 그대 원한다. 그대 목소리라면 분명 들어줄 거다. 하지만 그대가 프라임을 감당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짐승의 울음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건 경고의 의미였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알리시아는 차마 잡고 있는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있으면 상관없는 거잖아.]

    [감당할 수 없을 거다. 그대는 자신의 꿈조차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지 않나. 타인의 꿈이라면 더욱 힘들 거다.]

    [해보지 않곤 모르는 거잖아.]

    [상대가 프라임이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그러라고 했을 거다.]

    […….]

    [그대는 알지 못한다. 프라임이 어떤 자였는지.]

    마물의 목소리들이 하나 같이 낮아졌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대 힘은 분명 프라임보다 강하지만, 프라임은 교묘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고?]

    [이미 저 사내의 의식은 프라임에게 잠식되어 있을 거다. 연결을 끊기 위해 저 사내와 의식을 공유했다간, 그대로 저자의 의식 속에 갇혀버릴 수도 있다.]

    […….]

    [그대도 저 사내처럼 될 수 있다. 육체만 남기고, 의식은 프라임의 손에 떨어지는 거다.]

    [프라임이 이런 것까지 예상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무리 프라임이 대단해도 미래를 예측할 순 없었다. 애당초 먼저 접근한 쪽은 자신들 쪽이었다.

    [예상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상황은 늘 달라진다. 중요한 건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용하느냐다.]

    […….]

    [프라임은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는 거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는 지금 상황이 프라임에게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결국 그대가 탐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일순간 침묵이 돌았다. 하지만 마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말을 뱉었다.

    [다른 게 있다면 프라임은 생각을 매번 실행했고,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

    [우리는 그대를 존중한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주길 바란다.]

    [……미안해.]

    알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마물들에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절대 카벨레누스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결국 그게 그대의 뜻인가?]

    [나를 위해 뭐든 하려고 했던 사람, 아니. 사실 그런 건 의미 없어. 그냥 내가 이 사람이 필요해.]

    […….]

    [내가 바라는 행복에는 이 사람이 있는걸.]

    알리시아는 눈을 감았다.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손안에 채운 온기는 여전히 따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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