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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44)화 (144/164)
  • 144화. 마지막 발버둥

    2021.07.19.

    쾅-! 벽이 부셔지고 흙먼지가 뿌옇게 올라왔다. 무게에 짓눌린 헤르만은 이를 악문 채 카벨레누스를 밀어냈다. 짐승에 가까운 본능은 대적해보자마자 금세 알았다. 자신은 카벨레누스를 이길 수 없었다. 애당초 힘의 원천이었던 프라임의 심장은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프라임이 따르는 신, 그것이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모든 게 끝이었다. 헤르만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인간이 제아무리 야생에서 벗어났다고 하나, 세상이 강자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약한 것은 도태되고,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 법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부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 한들 그것보다 더 강한 힘이 나타나면 초라해지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말로는 뻔했다. 황제라는 허울이 벗겨진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은 제르페누스처럼 차가운 바닥에서 마지막을 맞이할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제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헤르만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노쇠하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나았을까 싶다가도 곧 나이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 카벨레누스를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이 아닙니다."

    "……."

    "프라임 교단은 제국의 시작을 함께해온 만큼, 제국의 역사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

    "재앙은 어디에서 있는 법이니까요."

    헤르만이 입술을 이죽거렸다. 모든 일이 끝나면, 카벨레누스가 누릴 것들이 눈에 선했다. 그는 황제가 될 것이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위대한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었다. 역사는 결국 승자에 의해 쓰이고 기록되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불합리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역시 똑같이 피를 봐왔다. 나락으로 가야 한다면 모두가 함께 가야 옳았다.

    "어쩐지, 사람들의 비명과 울음이 들리지 않습니까? 모두가 재앙이 왔다고, 모든 것이 멸망해버릴 거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

    "전하께서 아무리 강하시다고 한들, 결국 혼자지요. 그 많은 괴물을 상대하기엔 버겁고, 이겨도 결국엔 모든 것을 잃은 후가 될 겁니다."

    헤르만이 마치 포옹하는 것처럼 두 팔을 벌려 카벨레누스의 팔을 끌어안았다.

    "자아, 얼른 절 죽이십시오. 그리고 어디 한 번 발버둥 치십시오."

    "……."

    "전하께서 슈바르한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을 테니까요."

    물론 곱게 보내드릴 생각은 없지만요. 헤르만이 억지로 카벨레누스의 팔을 밀어냈다. 자신의 그릇은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지금 이상으로 신의 힘을 끌어다 쓰면 몸이 망가질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전부 망가지는 편이 나았다.

    "저는 훗날 신이 될 몸이라 배웠고, 그렇게 자라왔습니다. 신전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신의 그릇이 비로소 저의 대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

    "그 시간이 거짓이 아니라면, 곧 증명해줄 겁니다. 저야말로 신의 그릇에 합당하다는 걸. 저 말곤 누구도 신이 될 수 없다는 걸 말입니다."

    헤르만의 입가가 양옆으로 쭉 찢어졌다. * * *

    "마물이 나타나 난동을 부리는데, 병사를 보내지 않겠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우리라도 사병을 꾸려야 합니다!"

    "그러다가 대공의 심기라도 잘못 거스르면 어떡합니까?"

    "일단 저희도 좀 살아야지요.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개미 떼도 아니고, 마물 떼가 슈바르한으로 밀려오고 있다는 거."

    "슈바르한 성벽이 단단해서 망정이지, 웬만한 곳이었으면 이미 무너지고 말았을 겁니다."

    "지금 안 무너지면 뭐 합니까. 그 괴물들이 하는 꼴을 보아하니 조만간 큰일이 날 것 같은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귀족들이 거친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 같이 분노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일단 대공 전하 측에 마물을 쫓아내달라 청을 한 번 더 넣어보죠."

    "수도에서 권력 싸움 중이신 분이 슈바르한 사정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으시겠습니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한층 무거워진 분위기 사이로 그만큼 낮아진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 전하께서 황위를 물려받으시면 슈바르한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무래도 대공보단 황제가 낫겠죠."

    "설마, 이대로 슈바르한을 버리려는 속셈 아닐까요? 병사를 움직이지도 않은 것도 그 때문인 거죠."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우중충한 분위기에 혼란을 가중했다.

    "하긴, 대공 전하라 해도 결국 이방인 아닙니까. 외지인의 속셈이야 항상 뻔하죠. 단물만 빼먹고 떠나려는 겁니다."

    "대공 전하는 그렇게 안 봤는데……."

    "솔직히 일부 병력이 남아 있다곤 말은 하는데, 그게 진실일지 아닐지는 어떻게 압니까?"

    "하기야, 제대로 된 머리가 박혔으면 벌써 병사들을 움직였을 텐데요. 수도에 병력을 쏟아붓느라고 병력을 남겨두지 않은 게 아닐까요?"

    "혹시라도 우리 같은 귀족들이 자리를 노릴까 봐 말이죠?"

    주고받는 시선들 속 의심은 어느덧 사실이 되어 있었다. 카벨레누스 앞에서는 감히 뱉지 못했던 불만은 그가 사라지면서 하나둘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하, 그게 사실이라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대로라면 우리 모두 꼼짝없이 죽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지금이라도 수도에 있는 대공에게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해야 합니다!"

    "지금 그쪽도 전쟁 중 아닙니까? 여기까지 올 병력이 있기나 한 겁니까?"

    "수도에서 이곳까지 오는 시간은 또 어떻고요. 일단 성문을 굳게 닫고-."

    "성문을 여세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돌려, 원탁에 앉은 귀족들을 쭉 훑어봤다. 미리 자료 조사를 끝낸 터라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다들 하나 같이 얼굴이 익숙했다.

    "감히 논의 중인 원탁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이게 무슨 짓이지?"

    살구씨처럼 잔뜩 쪼그라든 얼굴을 한 논 후작이 노기 섞인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그는 슈바르한에서 이루어지는 주요 귀족 회의를 주관하는 장으로, 카벨레누스의 집권 전까지만 해도 슈바르한을 이끌던 인물이기도 했다.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하나,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가문 출신인지도 모를 영애 따위가 귀족 회의에서 허락도 없이 입을 놀릴 수 있단 말인가? 말탄 백작 가의 경비는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위아래를 따질 상황이 아닌 만큼-."

    "어디 감히 대귀족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데 끼어들어!"

    논 후작이 거칠게 원탁을 내리쳤다. 알리시아는 그를 똑바로 응시한 채, 품에서 반지를 꺼내 내보였다.

    "그 물건은……."

    "설마, 그럴 리가요."

    "하지만 저걸 보십시오. 저건 분명 그분의 반지 아닙니까."

    예상치 못한 물건의 등장에 당황한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알리시아는 망설임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원탁에 반지를 내려놓았다. 카벨레누스를 상징하는, 슈바르한 대공의 반지였다.

    "저는, 아니. 나는 슈바르한 대공 전하께 전권을 위임받았네."

    "그게 진짜라는 걸 어찌 믿지? 슈바르한 대공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타난 사기꾼일 수도 있지 않나."

    "……."

    "게다가 전권을 위임하기 위해선 네년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인물이어야 할 텐데, 정작 나는 지금껏 네년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거든."

    논 후작이 얄궂게 입술을 이죽거렸다. 가제프 정도면, 한발 뒤로 물러났을지도 모르지만 상대는 작은 여자였다. 겁만 주면 금세 울어버릴 것처럼 가냘픈 여자에게 머리를 굽힐 필요는 없었다.

    "내 이름은 알리시아 폰 슈바르한 블랑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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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알리시아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덤덤히 입을 다시 뗐다.

    "슈바르한 대공비일세."

    "대공께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대공비에 대한 예우를 갖추도록."

    "대공께 진짜 대공비라 인정받아오면 그렇게 해주지."

    시선이 팽팽하게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알리시아는 지지 않겠다는 듯, 눈에 잔뜩 힘을 준 논 후작을 보며 짧은 한숨을 토했다.

    "펠시."

    알리시아의 손끝에 부드러운 털이 닿았다. 빈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펠시를 언제나 그랬듯, 렉스의 모습을 빌리고 있었다.

    "어디서 갑자기 개가, 잠깐 저 개 전하께서 키우시던 렉스 아닙니까?"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렉스가 나타난 겁니까? 분명 여긴 아무도 없었는데……."

    "네년, 마녀구나."

    논 후작의 양 눈썹이 추켜올라갔다.

    "반지도, 렉스도 전부 마법으로 만든 게 틀림없어!"

    "……."

    "밖에서 날뛰고 있는 마물들도 저 마녀의 소행 아니야? 그래! 맞아! 대공 전하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 슈바르한을 삼키려는 거다!"

    상대적으로 목청 좋은 사내의 외침은 쉽게 주목을 끌며 분위기를 좌지우지했다. 알리시아는 논 후작으로 기운 분위기에 짧게 한숨을 쉬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감추고 있던 마물들이 나타났다. 모두가 아는 흉측한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마녀는 아니지만, 내가 마물을 다루는 건 사실이지. 그리고 이들만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들을 전부 죽일 수 있다는 것도 말이야."

    "……."

    "……."

    "왜 그러지? 다들 방금처럼 떠들어보지그래?"

    알리시아가 거만하게 웃었다. 카벨레누스의 표정이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괜한 일에 시간은 쓰지 않을 테니, 한 번에 알아듣도록."

    "나는 네년의 협박에-."

    크르르르-. 굳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알리시아를 지키기 위해 이를 드러낸 짐승들은 금방이라도 사냥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슈바르한을 지키고 있는 건, 이 아이들이야."

    "지금 슈바르한을 습격한 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시군요."

    짐승들의 눈치에 약간 조심스러워졌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귀족들은 알리시아를 깔보고 있었다.

    "지금 몰려오는 괴물들은 진짜 마물이 아니야."

    "괴물도 진짜, 가짜가 있답니까? 괴물이면 다 괴물일 뿐이죠."

    "이 아이들은 괴물도, 적도 아니야. 그리고, 마물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지."

    알리시아는 다정한 미소와 함께 마물을 올려다봤다. 그들은 여전히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이 얼마나 다정한 눈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대들이 불안해한다는 걸 알아. 이곳에 슈바르한 대공은 없고, 적들은 밀려오고 있잖아."

    "……."

    "하지만 슈바르한 대공만이 슈바르한을 지탱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단 한 명만 있다고 해서 슈바르한이 아니잖아."

    알리시아는 고개를 바로 세웠다.

    "그대들이 날 믿지 못한다 해도 슈바르한 대공비로서 이 아이들과 이곳을 지킬 거야."

    "……."

    "하지만 나는 아직 미숙해."

    "……."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해."

    알리시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귀족들은 잠시 서로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마물을 다룰 수 있다면서 저희의 도움이 필요합니까?"

    "그대들만큼 슈바르한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은 드물지. 무엇보다 그대들 모두 슈바르한에선 존경받는 전사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저희 보고 나가서 싸우기라도 하라는 겁니까?"

    "싸우는 것 대신,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이끌어줬으면 해."

    "그럼 싸우는 건 누가 한단 말입니까."

    "말했잖아. 지키는 건 나와 아이들의 몫이라고."

    알리시아의 손이 부드럽게 펠시의 목덜미를 쓸었다. 펠시는 더는 개의 흉내를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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