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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43)화 (143/164)
  • 143화. 마지막으로 남긴 말

    2021.07.15.

    "왜 잘 가다가 멈춰?"

    "저기 좀 보세요. 성기사입니다."

    벽 뒤로 몸을 감춘 채 베르베가 목소리를 낮췄다. 펜리르는 덩달아 그녀를 따라 몸을 감추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와서 움직이는 건가? 괴물의 편이라도 들려고?"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만 봐도 괴물과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같은 편이 아닌 건가?"

    "일단 제가 보기엔 진심으로 싸우고 있는 것 같은 걸요."

    베르베의 말대로였다. 죽을 둥 살 둥 열심히 싸우는 성기사들은 적어도 괴물과 한편처럼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쪽은 저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다른 곳을 살피면 되겠군."

    수색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조를 짜서 뿔뿔이 흩어져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한데, 괜한 싸움에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펜리르는 빠르게 판단을 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요."

    "왜 그래."

    옷 소매를 당기는 베르베에 펜리르는 다시 몸을 숙였다. 베르베는 여전히 성기사 무리를 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성기사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성기사 옷을 입고 있을 뿐이지, 뒤쪽으로 보이는 이들은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일단 움직임도 둔합니다. 성기사는 아닙니다."

    "신관일 수도 있겠군."

    펜리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베르베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쪽도 가리켰다.

    "거리가 있어서 잘 안 보이지만, 안쪽으로는 치료 받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구호대 같군."

    "이런 무리가 다른 곳에서도 여럿 발견되면 더 확실해지겠죠."

    베르베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펜리르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괴물은 황성에서 나왔고, 반대로 신전은 구호대를 꾸려서 움직인다라……. 어쩐지, 신전 측에서 어떤 결말을 그리고 있는지 보이는 것 같지 않아?"

    "제국은 황실과 신전이 권력을 나눠 가지고 있죠. 한쪽이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권력은 남은 한쪽으로 쏠릴 겁니다."

    "슈바르한 대공 쪽이 있는 한, 완벽하게 황실이 무너지긴 어렵겠지만……."

    펜리르는 얼굴을 찌푸린 채 턱 끝을 매만졌다. 실은 계속해서 걸리는 점이 있었다.

    "만약, 슈바르한 대공도 괴물로 변했다면 어떻게 될까."

    "슈바르한 대공도 실험체입니까?"

    "그건 확실하진 않지만, 왠지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대공을 보고 있으면 보통 인간 같진 않잖아."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카벨레누스는 아니었다. 그가 진짜 실험체라 해도 이상할 것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까 보았던 이상한 아군도 마음에 걸리고. 거대한 늑대는 다른 실험체들과는 다르게 의사소통이 가능해 보였다. 그자가 카벨레누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대공이 진짜 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괜한 이야기를 만들기에는 좋다고 생각됩니다. 실험체들도, 슈바르한 대공도 다 황금색 눈이지 않습니까. 이야기를 만들려고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이렇게 피해가 크니까, 제국의 영웅도 잘못 걸리면 빠져나가기 힘들게 될 거야."

    "그럼 저희는 지금이라도 발 뺄까요?"

    "빼기엔 너무 늦었지."

    "원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베르베는 검을 쥐었다. 애당초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배신이었다.

    "저들은 어떻게 할까요? 처리하고 움직일까요?"

    "지금 도움이 될 것 같으니 일단은 그냥 두고 보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자. 괴물을 해치우는 데, 손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지, 뭐."

    슈바르한 군대가 잘 처리하고 있는지 빠져나오는 괴물은 많지 않았지만, 워낙 하나하나가 강해서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베르베 역시, 펜리르와 생각이 같았는지 짧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순찰하면서 저들 외에 신전 측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왜 말을 하다 멈춰?"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베르베의 눈이 찡그려졌다.

    "인기척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약한데."

    "인기척을 감출 정도로 실력 있는 자일 겁니다. 제가 상대하죠. 소맹주께서는 가만히 보고만 계세요."

    "적당히 해.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그건 저쪽의 입장을 들어본 후에 정해야죠."

    "……."

    "……."

    살기 가득하던 베르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골목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아이였다.

    "정말 대단한 상대로군."

    "비아냥대지 마세요."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나서지 말아야 하나?"

    베르베는 대답 대신, 겨눴던 검을 내렸다. 펜리르는 피식 웃고는 아이 쪽으로 걸어갔다.

    "대피하다가 부모님을 놓친 모양이구나."

    "……."

    "나 무서운 사람은 아냐. 봐. 슈바르한 병사의 명패를 달고 있잖아."

    펜리르가 가슴팍에 달린 슈바르한의 문양을 내보였지만, 아이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아이가 그런 걸 어떻게 압니까. 그냥 우리가 로아킨이니 무서운 거겠죠."

    "그런 건가. 그러면 할 수 없지."

    로아킨 사건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는데도 아이는 로아킨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포는 다른 제국인들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펜리르는 아이를 설득하길 포기하고 자신의 반대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귀족 저택이 몰려 있는 구역이 있어. 그쪽에서 귀족들이 구호 활동을 하고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그쪽으로 가."

    "……."

    "왜 안 가? 지금 안 가면 저놈들이 널 잡아먹어도 모른다?"

    펜리르가 짓궂게 말하며 검 끝으로 지붕을 가리켰다. 지붕에는 변이된 실험체가 이리저리 고개를 휘저으며 먹잇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누, 누나가 아직 집에 있어요!"

    "누나?"

    "도와주세요!"

    말문이 터지자, 용기가 생긴 것인지 아이가 펜리르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펜리르는 얼굴을 찌푸리며 아이를 밀어냈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 도와달라는 거야?"

    "로, 로아킨이요……."

    "부모님에게 로아킨과는 어울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나봐."

    "아버지는 로아킨은 끔찍한 괴물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당신들은 괴물처럼 안 보이는 걸요."

    "……."

    "……."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래, 로아킨은 괴물이 아니지. 그냥 사람이야."

    "……."

    "그리고, 사람은 사람을 돕는 거지."

    "소맹주."

    "어차피 사람들을 구하러 온 거잖아? 더 많은 이들을 살리기로 한 게 계획이었고. 좋게 생각하자고."

    "정말이지, 소맹주는……."

    "그래서 꼬마야, 네 누나는 어디 있지?"

    펜리르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에 씨익 웃었다.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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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가짜에 현혹되신 겁니다."

    "……."

    "신의 힘은 이곳에 있는 걸요."

    헤르만이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프라임은 신 다음으로 강한 자였고, 그의 심장을 이식하는 데에 성공한 지금으로선 자신이야말로 신의 그릇에 가장 가까웠다. 오죽했으면 실험이 성공했다고 착각하기까지 않았는가. 카벨레누스를 좀 더 강하게 키워서 잡아먹는다면야 자신은 끝내 완벽한 신의 그릇이 되고, 신의 힘을 전부 소유하게 될 것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등장한 가짜 신 때문에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당할 순 없었다.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전하께서도 실험을 해오셨던 거군요. 역시 전하께서도 신의 힘이 탐나셨던 겁니다."

    헤르만은 서둘러 다음 말을 토해냈지만, 그럴수록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마치 스스로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걸 책망하듯이.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십니까! 뭐라고 말 좀 해보십시오!"

    "……꼴이 참 우습게 되었군."

    "저는 폐하께 물은 게 아닙니다."

    "사람 말을 하지 못하는 짐승을 앞에 두고, 뭐 마려운 개처럼 낑낑거리는 꼴이 우스운 걸 어떡하나."

    제르페누스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흐릿해지는 정신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당황해하는 대신관에 모습에 절로 입술이 씰룩거렸다.

    "이제 죽음밖에 남지 않은, 이름뿐인 황제보다는 낫겠죠."

    "그대도 나처럼 될 거야."

    "제가 말입니까?"

    헤르만이 비웃었다. 아무래도 어린 황제는 지금 자신의 꼴이 얼마나 처참한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도 이런 꼴이 되기 전까지는 몰랐거든. 내가 이렇게 될지."

    "……."

    "위대한 대신관이여. 이왕 죽는 김에 그대를 위해 축언이라도 내려주지."

    "명을 재촉하시는군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음껏 떠들고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지."

    제르페누스는 힘겹게 눈을 떠 짐승을 바라봤다. 검은 터럭을 가진 거대한 늑대의 눈동자는 황금색이었다. 자신의 이복동생이 그러하듯이.

    "네가 카벨레누스가 맞다면, 아직 아버지가 건 족쇄가 남아 있겠지. 미약한 족쇄의 힘이지만, 널 강제할 수 있는 힘은 아직 남아 있을 거야."

    "……"

    "대신관을 죽여라, 카벨레누스."

    "……."

    제르페누스는 웃었고, 카벨레누스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봤다.

    [선황제와 같은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자도 선황후를 죽이라 말할 때, 그렇게 말했는데.]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입을 뗐다. 우습게도 지금의 풍경은 묘하게 그날의 기억과 닮아 있었다. 다 죽어가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역시, 살인이었으니까.

    [다른 말을 남기셨으면 동정이라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한결같습니다.]

    카벨레누스의 눈이 살짝 아래를 향했다. 처음부터 제르페누스가 원망의 대상이 된 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대신, 모두가 그를 미워했으니까. 아버지의 품에 안긴 이복형이 부러워할 뿐 차마 미워할 순 없었다. 결국 가족이었다. 혈육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시간도 있었다. 선황제 부부에게 일어났던 참극 이후, 제르페누스는 유일하게 자신에게 손 내밀었던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믿었던 형은 황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선황제가 그러했듯이, 자신에게 검을 쥐여줬다. 정작 자신의 손은 검 한 번 잡아보지 않았으면서. 카벨레누스에게 가족이니, 혈육이니 하는 말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을지 알려준 건 제르페누스였다. 철저하게 외면하고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선황제와 달리, 제르페누스는 애정이라는 이름 아래 동생을 가지고 놀았으니까. 미숙하던 시절, 카벨레누스가 큰 부상을 입었을 때조차 제르페누스는 오지 않았다. 대신, 다음으로 정복할 땅을 지정하며 다시금 어린 동생을 전장으로 내몰았을 뿐이었다. 애당초 그날 이후, 죄인을 자처한 건 나탈리뿐이었으니까. 자신의 아버지가 선황제가 한 실험의 책임자였다는 이유로 평생 죄인처럼 살았지만, 제르페누스는 아니었다. 죄를 청산하는 것 대신, 더 높게 쌓았을 뿐이었다.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나락도 깊어진다는 걸 모른 채.

    [누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당신에게 배신당했으면서도, 자신을 봐서 고통스럽게는 죽이지 말라고.]

    "카벨레누스. 뭐 하냐. 얼른 죽여. 저 괴물을 죽여버리는 거야."

    [하지만,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카벨레누스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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