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문제를 풀기 위해선
2021.07.12.
"드디어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깨어나신 후, 배가 고프실 듯하여 일부러 풀어놓고 왔는데, 배 잘 채우고 오셨는지요."
"……."
"이런. 이런. 죄송합니다. 전하께서는 이제 더는 사람이 아닌데, 제가 말도 할 수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 혼자 떠들었군요."
헤르만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앉아 있었던 자리는 제르페누스가 앉아서 집무를 보곤 했던 황제의 의자였다.
"제가 늙어서 말입니다. 오래 서 있는 것도 힘들더군요."
"……."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헤르만의 뒤쪽으로 향했다. 변이된 실험체들과 함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제르페누스였다. 구애를 앞둔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던 이복형제는 피투성이가 된 것도 모자라, 한쪽 팔이 뜯긴 채 가냘픈 신음을 내고 있었다.
"제가 주의를 주려고 했는데, 이놈들의 식욕이 워낙 왕성해서 말입니다. 지금의 전하께서는 이해하시겠지요?"
"……."
"으음, 계속 혼자 떠드니 어쩐지 외롭군요. 전하께서는 사람으로 변하는 방법부터 배우셔야겠습니다."
물론 사람으로 변한다 해서 이성도 되돌아온다곤 볼 수 없지만. 헤르만은 뒷말을 대충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조금 신기하군요. 제가 예상했던 모습은 좀 더 괴물 같은 모습인데 말이죠."
"……."
헤르만의 가늘어진 눈이 카벨레누스를 염탐하듯 훑어내렸다. 보통 변이하면 마물의 모습대로 흉측한 괴물이 되기 마련인데, 카벨레누스는 거대한 늑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에 황실에서 써먹었던 늑대에 대한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뭐, 큰 상관은 없겠죠. 전하께서는 여러모로 특수한 케이스니까요. 이 정도 특별함은 있어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군요."
"……."
"황가가 늑대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실험을 감행했다. 이런 이야기도 써먹으면 좋을 것 같고 말이죠."
헤르만은 느긋하게 웃었다. 그리고 의자 손잡이를 툭툭 치는 것으로 카벨레누스를 불렀다. 카벨레누스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뗐다.
"속으로는 많이 화가 나실 거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일 뿐이에요."
"……."
"죽이고, 또 죽이고. 먹고, 또 먹다 보면 결국 본능만이 남으니까요. 그때야말로 충실한 종이 되시는 겁니다."
헤르만은 손을 뻗어 카벨레누스를 쓰다듬었다. 카벨레누스는 말없이 숨을 죽였다.
"전하를 좀 더 지켜보고 싶었으나, 제 몸 상태로는 전하께 힘을 나눠드린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모양입니다."
"……."
"하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저는 전하께 가능성을 보았고 거기에 맞게 투자했을 뿐이니까요."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다정한 스승이라 여겼을 것이다. 실제 헤르만은 카벨레누스에게 신학을 가르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헤르만은 좋은 스승이 아니었고, 카벨레누스도 썩 훌륭한 제자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흔히 말하는 아름다운 사제지간이었다면, 카벨레누스가 헤르만을 향해 앞발을 휘두를 일은 없었을 테니까.
"이런. 아직 이성이 남아 있으셨나보군요."
"……."
"하나, 그게 얼마나 갈까요. 하루? 이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일 수도 있겠죠."
카벨레누스의 앞발에 가슴이 눌렸음에도 헤르만은 웃었다. 아무리 카벨레누스가 날뛴다고 한들, 노인의 눈에 비치는 그는 날개가 뜯긴 채 발버둥 치는 잠자리처럼 보일 뿐이었다.
"전하의 이성이 완전히 좀 먹히면, 저는 가장 먼저 그 여자를 데려오라 시킬 겁니다. 그리고, 잘 씻겨 전하를 위한 먹이로 삼을 겁니다."
크르르르-. 칼날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헤르만은 여전히 이죽거렸다. 그는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보다는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 다음에는 누가 될까요?"
"……."
"당연히 아이겠죠."
"……."
"하나, 이번에는 전하께 선택권을 드릴 겁니다. 그 여자처럼 제 새끼를 잡아먹든, 아니면 제 새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포기할지."
헤르만은 여유롭게 손을 뻗었다. 쩍 벌리고 있는 짐승의 입 사이로 삐죽삐죽한 이빨들도, 날카로운 발톱도, 심지어 가슴을 짓누르는 힘도 두려워할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손에 떨어질 것이었다.
"그만하시고 내려오세요. 전하께서는 어차피 절 이길 수 없습니다."
카벨레누스의 목덜미를 확인한 헤르만의 양 입술이 위를 향했다. 짐승의 목덜미에는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흔적이 사라지지 않은 한, 카벨레누스는 자신을 완벽하게 거역할 수 없었다. 그 증거로 카벨레누스는 더는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른 치우세요."
헤르만의 손이 툭툭 카벨레누스의 앞발을 건드렸다. 카벨레누스는 이를 악문 채 그를 빤히 바라볼 뿐, 별다른 반항 없이 발을 치웠다.
"족쇄가 아예 듣지 않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제가 전하를 너무 얕잡아본 모양입니다. 피의 양을 더 늘려야겠습니다."
헤르만은 망설임없이 카벨레누스의 입안으로 팔을 넣어 팔목에 긴 상처를 냈다. 뚝뚝 떨어지는 피에서는 고약한 마물의 냄새가 났다.
"괜찮습니다. 마시세요, 전부."
카벨레누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헤르만은 그럴수록 더욱 팔을 그의 입안으로 밀어 넣어 피를 삼키게 했다.
"프라임의 힘은 피를 통해 흐르기에 그의 피를 가진 자를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힘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죠."
"……."
"다시 말해, 전하께서는 계속해서 프라임의 피를 가진 자들을 잡아드시면 되는 겁니다. 마침 이곳에는 전하를 위한 좋은 먹잇감들이 많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잘하실 겁니다. 헤르만은 카벨레누스의 입에서 손을 뺐다. 툭툭 치는 손길은 이제 완전히 아랫것을 대하는 태도였다.
"이 늙은이가 나눠줄 수 있는 힘은 여기까지이니, 앞으로는 전하께서……."
뒤도는 순간, 목이 물렸다. 헤르만은 자신의 목을 물고 있는 짐승에 헛숨을 뱉었다. 몸집 차이가 상당히 나기에 목과 어깨가 동시에 물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 짐승은 단순하게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기어코 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전하께서 아무리 이래 봤자……."
헤르만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상처를 통해 뭔가 꾸역꾸역 밀려오는 느낌이 났다. 자신이 카벨레누스에게 했던 것이었다. 헤르만은 다급하게 카벨레누스에게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단단히 잡힌 팔은 쉽게 빼기 어려웠다.
"당장 놓으십시오. 이건 명령입니다."
헤르만이 성난 목소리를 억지로 눌렀다. 억지로 복종하게 만드는 건 강한 개체가 약한 개체에게만 할 수 있는 행위였다. 카벨레누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자신에게는 프라임의 심장이 있었다. 카벨레누스가 억지로 자신을 복종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왜 두려운 걸까. 헤르만은 더듬더듬 손을 더듬었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두면 안 됐다. 땡그랑-. 대신관을 상징하는 반지가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헤르만의 몸이 빠르게 변형되었다.
"무슨 수를 쓰셨는지는 모르나 곤란하게 되었군요."
헤르만은 억지로 카벨레누스를 떼어내며 물러섰다.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지만 감각이 이상했다. 물린 곳을 중심으로 기묘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뭘 하신 거죠?"
"……."
"그 몸으로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게 한탄스럽군요."
혼자 질문을 던져봤자, 침묵만 돌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말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는데, 자꾸만 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아직 부족합니다. 전하께 절 복종시킬 힘 같은 건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카벨레누스가 다가섰고, 헤르만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건 일종의 본능이었다. 싸우면 질 것 같진 않은데도 선뜻 덤비기 어려웠다. 감히 덤벼선 안 될 것 같았다. 헤르만은 자꾸만 물러서다가 등 뒤에 닿은 벽에 몸을 움츠렸다. 더는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다가오고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거세게 뛴다. 헤르만은 느릿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그것은 자신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프라임."
헤르만이 헛숨을 뱉었다. 오랜 실험을 거치며 프라임은 더는 힘이 없었다. 그의 심장 역시, 오래전에 주도권을 빼앗겨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프라임의 심장은 헤르만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처음부터 절 노렸던 게 아니었군요."
헤르만이 이마를 짚었다. 물론 이번에도 카벨레누스에게선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프라임이 이토록 열렬하게 반응하는 상대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누구입니까. 누가 감히 우리의 신을 사칭하고 있는 겁니까."
헤르만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답지 않게 노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 * *
[괜찮나.]
"응. 버틸 만해."
알리시아는 덤덤히 손수건으로 흐르는 코피를 막았다. 최대한 힘을 아끼려 했지만, 사용한 힘의 반동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리하는 건 좋지 않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뿐이야. 그리고……."
알리시아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손바닥 위로는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뭐라도 해야지 프라임이 말한 답이 나올 것 같기도 하거든."
[몸을 상하게 해서까지 답을 얻을 필요는 없다. 그자도 그걸 바라진 않을 거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볼 수 있는 거잖아. 그리고,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가 전부 잃어버리면 더 슬플걸."
알리시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카벨레누스 앞에선 내색하지 못했지만, 통신이 끝난 후 참 많이도 울었다. 자신만 아니었으면, 카벨레누스가 그런 모습이 되지 않았으리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우는 것만으로는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마음껏 운 대신, 다시 일어나는 걸 선택했다.
[그래서 원하는 답은 찾았나?]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해."
[그렇다면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문제를 풀려면 깊게 생각해야지."
[문제는 풀라고 있는 거다. 당연히 답은 가까이에 있다.]
"만약, 내가 생각한 답이 정답이 아니라면?"
[그러면 다시 시도하면 된다. 문제를 풀려면 답을 말해야 하지 않나.]
"……."
[자신을 가져라. 어쩌면 그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펠시의 두 눈이 거울처럼 알리시아를 비췄다. 짐승의 눈동자에 비친 그녀는 어느덧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 *
"이 싸움, 끝이 있긴 한 겁니까?"
"부정적인 소리는 작작해, 베르베."
"현실적인 의문을 갖는 겁니다. 우리가 줄을 잘 탄 건지, 아닌 건지 말이죠."
베르베가 종종 걸음으로 펜리르의 뒤를 따르자, 바닥에 고인 핏물이 튀어 바지를 적셨다. 찰박거리는 물웅덩이 소리가 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와 섞여 괴기하게만 울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화려하던 수도였다는 말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리는 황폐해졌고,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길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들꽃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