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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41)화 (141/164)
  • 141화. 쓸모

    2021.07.08.

    "계속해서 성안에서 괴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혹, 혹시 정말로 폐하께, 아악-!"

    날아간 촛대가 그대로 시종의 머리를 가격했다. 제르페누스는 흐르는 피에 이마를 감싸고 괴로워하는 시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칠게 숨을 뱉었다. 그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자신의 것이었다. 아버지가 시작했을지 몰라도 결국 끝은 자신이 본 것이었다. 연인을 저버리고, 무수히 많은 피를 발판 삼으면서까지 만들어낸 성과였다. 이제 와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순 없었다.

    "무슨 수를 쓴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 명령이 듣지 않을 리 없어."

    제르페누스는 몇 번이고 목덜미를 더듬으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제 자랑과도 같았던 완성작은 이미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성을 잃은 괴물이 되어 날뛰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제르페누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실험은 완벽했다. 잘못되었을 리 없었다. 그저 문제는…….

    "카벨레누스."

    제르페누스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완성된 실험체야말로 자신을 지탱하는 발판이었다. 최악의 경우, 완성작들이 자신을 지키는 병사가 되어 모든 걸 쓸어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 발판은 사라졌다. 자신에게 남은 거라곤 허울뿐인 황제 자리와 나약해빠진 병사, 그리고 괴물들에게 점령당한 성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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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아. 카벨레누스만 있으면 돼."

    다 꺼져가던 제르페누스의 눈빛이 도로 돌아왔다. 그는 씩씩 거친 숨을 뱉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움직였다. 자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카벨레누스가 있는 한, 자신에게는 아직도 기회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연 참이었다.

    "……."

    제르페누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거대한 입을 바라보며 그대로 굳었다.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게 된 것은.

    "으아아악-!"

    상황을 인지하고서야 고통이 밀려왔다. 제르페누스는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사라진 팔에 제대로 균형 잡지 못한 몸이 흔들리며 우스꽝스러운 몰골이 연출되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달려드는 괴물의 입가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핏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몇 명을 저 배 속에 넣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제르페누스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기면서도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상대는 이성 잃은 짐승이었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소용없다. 오히려 자극받은 짐승의 공격만 더 거세졌을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잡아먹히고 말 것이었다.

    "나, 나는 여기서 죽어선 안 돼! 내가 누군데! 내가, 아아아악-!"

    그대로 어깨가 씹혔다. 제르페누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절규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이 섬뜩한 와중에 보이는 공포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는 시종을 발견하고 다시 핏대를 세웠다.

    "뭐 해! 당장 날 구해! 황제인 날 구하란 말이야!"

    "으어…… 으으……."

    "내 말 안 들, 아악-!"

    "그만하렴."

    느긋한 목소리에 살점을 파고 들던 송곳니가 멈췄다. 제르페누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 없는데, 들리는 목소리가 유난히도 익숙했다.

    "꼴이 말이 아니십니다, 폐하."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제르페누스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노인의 입술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대신관."

    "일을 이 정도로 키우신 건 폐하시지 않습니까."

    "지금 내가 장님으로 보이는, 윽!"

    송곳니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제르페누스는 남은 한쪽 팔로 상처를 눌러 지혈했지만, 그 정도로는 피를 멎게 할 수 없었다. 상처가 너무 깊었다.

    "언제부터지?"

    "항상이지요."

    "항상?"

    "황실에서 황위를 물려주듯, 신전도 마찬가지지요. 자질을 가진 자들을 엄선해 대신관 자리를 지켜왔던 것이지요."

    헤르만은 손을 뻗어 마물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반짝이는 짐승의 금안에는 살기에 가득 차 있었지만 두렵진 않았다. 족쇄에 묶인 개를 무서워하는 주인은 없는 법이었다.

    "대공 전하의 소질은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더군요."

    "소질이라고?"

    "원래는 실패작으로 끝났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핏줄 탓이 아닐까 싶더군요. 대를 이을수록 혈통이 약해진다 해도 가끔씩은 특별한 개체가 태어나는 법이니까요."

    "특별한 개체……."

    "물론 폐하는 아닙니다. 폐하께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테니까요."

    헤르만의 시선이 천천히 상처를 훑었다. 마물의 피는 사람에게는 독과 같았다. 피에 적응할 수 있으면 강해지나, 이겨내지 못하면 감염되어 죽을 뿐이었다.

    "그래도 형제니까, 혹시나 했는데 아쉽군요."

    "카벨레누스는 나와 달랐나 보지?"

    제르페누스가 비아냥거렸다.

    "많은 것이 달랐죠. 일단, 대공 전하께서는 버티셨거든요."

    "실험을 당한 몸이니 나보다 강하겠지."

    "폐하께 주입한 피는 처음에 실험할 때 넣는 양입니다. 평범한 인간이 죽지 않게끔 아주 미약한 양을 넣을 때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제르페누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쓸모죠."

    "……."

    "황제라는 허울을 벗겨내면 당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일깨워드리는 겁니다."

    헤르만은 덤덤히 수염을 훑으며 입술을 이죽거렸다. 제르페누스의 낯빛은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황제는 마물의 피를 이기지 못할 것이었다.

    "폐하께서는 이대로 돌아가실 겁니다."

    "……."

    "그리고,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끔찍한 실험을 자행한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될 겁니다."

    "나는, 죽지 않아. 내겐 카벨레누스가-."

    "제 것입니다."

    헤르만이 단호히 말했다. 제르페누스는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흰 눈썹 아래로 감춰진 노인의 두 눈은 잠깐이지만 황금빛이 감돌았다.

    "몸속에 블랑셰의 피가 흐르는 한, 제 것입니다."

    "블랑셰의 피가 흐르는 한?"

    어딘가 꺼림칙한 말이었다. 제르페누스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정작 헤르만은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어떻습니까? 이 짐승. 묘하게 늑대를 닮지 않았습니까?"

    "……."

    "그리고, 블랑셰의 시조는 늑대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블랑셰의 초대 황제께서는 최초의 실험체이셨습니다. 저희에게 얻은 힘으로, 저희에게 반기를 들기 전까지 말이죠."

    헤르만은 쯧쯧 혀를 찼다. 그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대신관께서는 헛소리를 잘도 하는군."

    "신전의 지하에는 오래전부터 이런 놈들이 바글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헤르만의 고개가 창문을 향했다. 제르페누스는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려다가 찾아오는 통증에 몸을 움츠러트렸다.

    "권력은 맛 좋은 고기가 놓인 덫과 같아 그 맛에 취해 있다간 자신이 덫에 걸린지도 모르기 마련이지요."

    "헛소리 집어치워."

    "저희가 나눠드린 고기가 맛있으셨습니까?"

    "헛소리 집어치우랬지!"

    제르페누스가 씩씩거렸다. 하지만 굳기 시작한 몸은 제대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위대하신 황제 폐하나, 저기 있는 어린 시종이나 결국 강자 앞에서는 똑같은 파리 목숨이라는 게 말입니까."

    "누가 누구랑 똑같다고……."

    제르페누스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헤르만의 손짓에 움직인 짐승이 시종을 씹어 삼킨 건 한순간이었다.

    "괜한 잡음은 피하는 편이 좋을 테니까요."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대신관을 다들 잘도 따르겠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괴물의 주인은 폐하시라고."

    "……."

    "악명은 폐하께서 전부 가지실 겁니다. 그리고, 저는 폭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 구원자로 남게 되겠지요."

    "피비린내 나는 구원자도 있나 봅니다."

    제르페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그의 입가는 이미 쏟아낸 피로 젖어 있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빛이 밝아지듯, 희망이야말로 절망 속에서 빛을 바라는 법이지요. 피 냄새야말로 무지한 자들을 계몽하는 좋은 밑거름이 될 겁니다."

    "구원자의 이름도, 카벨레누스도 얻겠다?"

    "황실이 만든 실험의 피해자이자, 언제 폭주할 줄 모르는 짐승. 이 정도 수식어라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안타까워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강인한 적은 사람을 결집시킨다. 만약 두려운 적을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구원자가 있다면, 그를 찬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대신관께서는 그것으로 권력을 얻고 말입니까?"

    "권력, 그 이상이죠."

    헤르만의 미소가 진해졌다. 주름진 눈매 사이로 빛나는 두 눈은 꿈을 꾸는 양 몽롱했다. * * * 카벨레누스는 변이한 실험체를 앞발로 짓눌렀다. 북슬북슬한 털에 감춰진 실험체의 목에는 크리스티 공주 때와 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지금 황궁을 가득 메운 짐승들은 제르페누스의 실험체였다. 하지만 모든 소행이 제르페누스의 것이라 할 순 없었다. 제르페누스는 인간을 마물로 변이시키는 것까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 마물이 보이는 행동들은 제르페누스의 실험체보다는 신전 지하실에서 봤던 자들과 흡사했다.

    '그자가 여기 있을지도.'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원래 헤르만은 황실에게 실험의 죄를 다 떠넘길 예정이었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제르페누스에 손을 대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황제의 집무실로 가십시오."

    "……."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카벨레누스는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닫았다. 짐승의 몸은 힘은 넘쳐났지만 가벼운 의사소통도 어려웠다. 카벨레누스는 코로 위쪽 방향을 가리키고는 곧장 발돋움을 했다. 가제프는 한 번의 도약으로 훌쩍 건물을 타고 오르는 짐승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카벨레누스의 도움으로 성문을 열긴 했지만 상황이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변이한 실험체는 바글거렸고, 개중에는 성벽을 타고 황궁을 빠져나가려는 놈들도 보였다. 이대로라면 괴물들이 수도 밖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군대를 나누겠습니다.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고, 소맹주께서는 빠져나가는 놈들을 처리해주십시오."

    "병력이 쪼개져도 됩니까? 제가 보기엔 낙타의 손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펜리르가 공격을 흘려보내며 다급히 대꾸했다. 웬만한 싸움에는 이골난 그 역시, 밀려드는 공격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희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지 않았습니까."

    "……."

    "보수파 귀족들이 시민들을 대피해주기로 약속했으나, 멜타 공작께서 안에 계신 상황입니다. 우발적인 행동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걸음 빠른 로아킨 군대가 움직여줬으면 합니다."

    "시민들이 절 보고 놀라도 저는 모릅니다."

    펜리르는 투구를 벗어 던지고, 입고 있던 갑옷들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단단한 갑옷은 방어에 도움이 되지만 이동하는 데에는 도움 되지 않았다.

    "빨리 정리하고 복귀하겠습니다."

    펜리르는 투구에 짓눌렸던 머리를 대충 헝클어트리며 짧은 인사를 뱉었다. 솔직히 두고 가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복귀하실 무렵이면, 다 끝나 있을 겁니다."

    가제프는 답지 않게 자만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카벨레누스가 있는 한, 슈바르한은 지지 않았다.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믿음은 그 무엇보다 단단한 방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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