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든든한 아군
2021.07.05.
가제프는 초조하게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시계탑에 일부러 자신의 투구를 가져다 두고, 안쪽에 만날 장소를 적어두었다. 마물이 정말로 카벨레누스가 맞다면 이곳으로 찾아올 것이었다.
"단지, 기우였나……."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여전히 고요한 풍경에 가제프는 한숨을 뱉으려다가 급히 몸을 돌렸다. 어느덧 나타난 마물의 입에는 투구가 물려 있었다.
"……전하?"
가제프는 검의 손잡이를 쥔 채 마른 침을 삼켰다. 검은 터럭을 가진 짐승은 흔히 아는 마물의 모습처럼 기괴했지만,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익숙했다. 그는 하늘에 뜬 보름달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알고 있었다.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가제프는 용기를 내 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천천히 마물 쪽으로 걸음을 뗐다. 이번에도 마물은 대답 대신, 물고 있던 투구를 떨어트렸다. 가제프는 투구를 집어 들어 확인한 후, 품에 끌어안았다. 변한 카벨레누스의 모습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애써 울음을 참았다. 알리시아의 말대로 최악은 아니었다. 카벨레누스는 아직 살아 있었다.
"비 전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크르르-. 기다렸다는 듯 반응이 돌아왔다. 가제프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저는 질문 형식으로만 말할 테니, 전하께서는 고갯짓으로 의사 표현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할까요?"
가제프의 물음에 카벨레누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식이라면 완벽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제야 가제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 전하께서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셔서 통신구를 챙겨왔습니다. 연락해보시겠습니까?"
곧장 끄덕여지려던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잠시 멈칫했다.
"비 전하께서는 전하께서 마물로 변하신 걸 알고 계십니다."
"……."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간에 비 전하께 전하는 전하일 뿐이니까요."
그건 전하께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가제프의 미소에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바로 연락해보겠습니다."
가제프가 품에서 통신구를 꺼냈다. 통신 팔찌는 아직 시제품이라, 만들기도 까다롭고 사용 횟수도 짧았다. 준비된 통신 팔찌는 이제 다 써서 기존의 통신구만이 남아 있었다.
"가져온 마정석이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시간을 쓰진 못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군대 전체를 무리하게 이곳까지 이동시키느라고……."
가제프는 통신구에 시선이 꽂혀 있는 카벨레누스를 알아차리고 설명을 꿀꺽 삼켰다. 두 사람이 떨어져 있은 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무척이나 그리웠을 것이었다.
<…….>
"……."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금방 통신구끼리 연결이 됐다. 통신구 속 알리시아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잘 지냈어요?>
"……."
<괜찮아요. 말해요.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래요.>
알리시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카벨레누스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다가와 통신구에 코를 가져다 댔다. 닿았다. 느껴지는 건, 차가운 유리였지만 이상하게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었어.]
<저도요.>
[다행히 그대에게는 들리나 보군.]
<당신 목소리를 못 들을 리 없잖아요.>
알리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많은 말이 입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녔지만, 지금은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기뻤다.
[몸은 괜찮나?]
<그건 제가 먼저 묻고 싶은 말인 걸요.>
[이런 꼴로 해봤자, 그리 신빙성은 없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저도 아직 견딜 만해요.>
웃음이 나지 않은 상황이지만, 반대로 웃음이 났다, 아니. 실은 이런 상황이었기에 더 그랬다. 소소한 대화가,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도 그리웠었다.
[실은 프라임을 만났어.]
<정말로요?>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실일 거예요. 마물들은 정신적인 교감을 중요시해서 그런 식으로 자주 대화를 하거든요.>
알리시아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에는 마물의 대화 방식이 낯설었지만 몇 번 해보니, 그런 식의 대화도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가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혹시…….>
알리시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덤덤한 척하려 해도 자꾸만 차오르는 희망을 떨쳐낼 수 없었다. 살고 싶었다. 살아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대의 문제는 그대가 해결해야 한다고 하더군.]
<……제가요?>
[그대는 뭐든 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은 것뿐이라고. 그대의 구원자는 그 누구도 아닌, 그대 자신이라고 말이야.]
<……그게 다인가요?>
[안타깝게도.]
카벨레누스는 말끝을 흐렸다. 막연한 대답에 답답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생각나는 것이 있나?]
<아뇨.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조금 혼란스럽기도 하고요.>
알리시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머리를 아무리 써봐도 프라임이 낸 문제의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이런 말도 했지. 도움을 줄 수 있어도 결국 자신이 마음먹지 못하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고.]
<…….>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확신할 수 없는 답만이 머릿속에서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지금으로선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 좀 더 생각해봐야겠어요. 그것보다-.>
콰앙-!
<무슨 소리죠? 무슨 일이에요?>
갑작스러운 굉음에 당황한 알리시아가 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카벨레누스는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황궁 쪽이야.]
<황궁이요?>
[고약한 냄새가 나.]
<고약한 냄새라고 하면…….>
[하나밖에 없지.]
마물이다.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진짜 마물은 슈바르한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수도에 있는 건 결국 자신처럼 변이한 가짜 마물뿐이었다.
<잠시만요! 가지 말아요!>
금방이라도 달려갈 것 같은 카벨레누스에 알리시아는 다급하게 그를 멈춰 세웠다.
[왜 그러지?]
<그 모습으로 가면 안 돼요. 당신은 지금 슈바르한 대공이 아니라, 마물의 모습인걸요.>
마물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아무리 슈바르한 대공이라 해도 마물의 모습이라면 환영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가야 해. 보통 사람의 힘으론 저들을 감당해내기 어려울 거야. 게다가 만약 저들이 실험체가 마물로 바뀐 거라면, 나처럼 이성이 있으리란 보장도 할 수 없어.]
카벨레누스가 짧은 숨을 뱉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이 모습으로 변한 후, 몸에서 힘이 넘쳐나고 있었다. 실험체들도 자신처럼 변한 거라면 웬만한 사람은 감당해내기 어려울 것이었다. 자신이 가야만 했다.
<아예 가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럼?]
<제가 당신을 지금 바로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주진 못하지만, 그래도 해줄 수 있는 게 있거든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카벨레누스가 마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 방도를 고민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었다. * * *
"어디 갔다 오시는 겁니까!"
달려드는 마물을 상대하던 펜리르가 가제프를 발견하게 소리쳤다.
"이야기는 나중에 할 테니, 일단 싸우십시오."
"싸우라고요?"
"저들 모두 평범한 마물이 아닙니다."
펜리르는 멍하니 가제프를 보다가 그가 피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같이 따라 달렸다.
"모두 당황하지 말고 대열을 다시 정비해! 당황하면 이길 수 있는 적도 이기지 못하게 된다!"
가제프는 외침과 함께, 달려드는 마물의 공격을 쳐냈다. 엄청난 힘에 공격을 받아낸 것만으로도 자세가 휘청거렸지만, 그는 노련했고 그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밀려드는 마물의 공격에 당황해하면서도 빠르게 적응해 맞서 싸웠다.
"적은 재생 속도가 빨라서 한 번 베는 것만으로는 의미 없다! 기회를 노려서 급소를 찌르고, 재생할 틈도 주지 않고 공격해!"
검이 마물의 심장을 관통했지만, 가제프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머리를 베어내고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황궁에서 마물이 튀어나오는 걸 보고 급하게 온 겁니다."
"황궁에서 마물이라니, 실험에 쓰인 마물이라도 튀어나왔답니까?"
정확히는 실험체가 마물로 변했을 확률이 더 큰 것 같지만. 가제프는 얼굴을 찌푸렸다. 황실의 실험만 의심하기에는 카벨레누스가 말해준 이야기가 걸렸다.
"이야기가 기니, 일단 놈들을 해치운 후에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그래야 할 것, 아니. 그럴 수 있을는지나 모르겠군요."
펜리르는 진담 반, 농담 반 섞인 말을 뱉으며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바라보고 방향에는 이미 수를 셀 수 없는 마물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오늘 저희, 살아남을 순 있을까요?"
"괜한 소리 하지 마, 베르베."
"소맹주의 속마음을 대변해드린 겁니다. 그리고, 솔직히 사실이기도 하잖아요."
베르베는 짧게 혀를 차며 황궁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느덧 황궁은 원래의 모습이 보지 않을 정도로 시커먼 물체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
"아무래도 저희 줄을 잘못 선 것일지도 모르겠는걸요."
"그래서 불만이야?"
"아뇨. 좋습니다. 저는 싸우는 걸 좋아하거든요. 뭐 그래도 죽는다면 고향에서 죽고 싶으니, 제가 죽기라도 하면 시체라도 로아킨에 가져다주십시오."
베르베는 낭랑하게 말하며 발돋움을 했다. 펜리르는 그런 부하의 모습에 거친 숨을 뱉었다.
"들으셨죠? 저희 로아킨은 최선을 다하기로 한 거. 꼭 기억해주셔야 합니다."
"마지막 인사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승리는 저희의 것이니까요."
가제프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펜리르는 그를 따라 고개를 올렸다가 숨을 삼켰다. 거대한 늑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게 무슨……."
펜리르는 더 말을 잇지도 못했다.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짐승을 사냥하듯, 마물의 목덜미를 물어 채 버리는 늑대에 달려들던 마물 셋이 쓰러졌다.
"저 늑대는 도대체 뭡니까."
"저희 측 아군입니다."
"……늑대가요?"
"네. 그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지요."
가제프는 덤덤히 대답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늑대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그는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하루 이틀로는 나올 수 없는 오랫동안 함께 합을 맞춰온 모습이었다. 펜리르는 제 옆을 스치고 간 바람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늑대의 앞발에 짓눌린 마물은 그대로 짓눌려버렸고, 단단한 턱에 뼈가 으스러졌다. 겨우 늑대 한 마리가 더해졌을 뿐이었는데, 단숨에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단숨에 적들을 쓰러트리고 나아가는 늑대를 보고 있자면, 당연하게 질 거라고만 생각했던 싸움이 터무니없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길 수 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더 먼저 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