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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39)화 (139/164)
  • 139화. 굳은 신뢰

    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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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우리 군대 수가 더 많았어. 그런데, 고작 사흘도 못 버텨?"

    "저희 예상보다 슈바르한 군대가 강해서……."

    "첫날은 심지어 시민 흉내 낸다고 제대로 무장도 안 했던 놈들이었어."

    제르페누스가 거칠게 소리쳤다. 그는 이제 더는 머리를 정돈하지 않았고, 크라바트도 매지 않았다. 어느덧 그의 눈 밑에는 그늘이 어둡게 져 있었다.

    "워낙 전장에서 잔뼈 굵은 자들이라서,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저희 측이 승기를 잡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승리는 기대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적어도 며칠은 더 버텼어야지."

    "저쪽에는 대공 전하까지 계시지 않습니까?"

    카벨레누스를 언급하는 말에 제르페누스의 눈이 번뜩거렸다. 아직 자신은 끝을 보지 않았다. 다른 건 다 잃어도 카벨레누스만 얻으면, 이번 전쟁의 승자는 자신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걸리는 게 있었다. 제르페누스는 성급하게 휘갈겨 쓴 보고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놈이 정말로 카벨레누스일까?"

    "네?"

    "카벨레누스의 갑옷을 입고 그인 척 굴면 되는 거잖아."

    슈바르한 군대는 이미 검은 갑옷을 사용하는 속임수를 쓴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공 전하신데……."

    "잘 생각해봐. 분명 카벨레누스가 있는 쪽의 피해가 압도적으로 커야 할 텐데, 다들 비슷한 수치란 말이잖아. 얼마든지……."

    제르페누스는 말을 하다 멈추고 인상을 팍 썼다. 요즘 들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역발상을 하려고 하면 그동안 생각이 너무 많아서 당했던 것들이 떠올라 초조함이 먼저 들은 탓이었다. 결국 제르페누스는 한참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다가 이내 거칠게 머리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지금에 집중해야겠어."

    "……."

    "일단 귀족들 사병을 끌어와."

    "귀족들을 독촉하란 말씀입니까?"

    "그동안 받아먹은 게 있는데 그 정도 지원은 해야지. 특히, 만다린 후작은 족제비 같은 인간이니, 각별히 더 신경 써서 뜯어내고."

    이럴 때 써먹으려고 속내 시커먼 놈들을 받아준 거 아닌가. 제르페누스는 재빠르게 귀족들에게 보낸 서신을 작성한 후, 옥새를 찍었다. 실험체를 공개하기에는 아직도 침묵하고 있는 신전이 걸렸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는 인원을 모아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는 편이 나았다. 물론 그것도 황궁이 점령 당하기 전까지겠지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실험체들은 하나 같이 완벽한 상태로 무장 중이었다. 그들이 있는 한, 자신이 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었다.

    "일단 공문을 보내놓긴 하겠으나……."

    "하겠으나? 왜 말을 하다 말지?"

    "반발이 있을 겁니다."

    "반발? 내가 지면 지금의 진보파 귀족들도 끝나는 걸 뻔히 아는 마당에 그런 소리가 나오나?"

    그럴싸해 보이기 위해 진보파와 보수파로 나눈 것일 뿐, 진보파 귀족들은 사실상 오랜 명문가들로 이루어진 보수파 귀족들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제르페누스의 지원에 힘입어 사교계를 장악할 수 있었을 뿐이지, 하나하나가 알짜배기인 보수파와 다르게 진보파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여럿 모여 있을 뿐이었다.

    "그, 그게 저희 측의 계속된 패배도 있고, 거기에다가 소문이 좀……."

    "아까부터 왜 자꾸 말을 하다 말지?"

    "저희 군이 사람으로 괴물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아서 말입니다. 괜히 여기 있다가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괴소문에 탈영하는 자들도 적지 않아서……."

    "그래서 지원받기가 어려울 거다?"

    제르페누스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보수파 귀족들과 진보파 귀족들이 다른 건 이런 것도 있었다. 한번 결정한 일을 잘 번복하지 않는 보수파 귀족들과 달리, 진보파 귀족들은 상황에 따라 갈대처럼 잘만 움직였다. 짙어진 패전의 기운에 다들 하나 같이 꼬리를 말기 시작한 게 틀림없었다.

    "그런 건, 헛소문일 뿐이야. 솔직히 내가 그런 끔찍한 괴물을 데리고 있다면, 지금쯤 이미 써먹었겠지. 안 그런가?"

    "물론 저는 폐하께서 그러시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 점도 강조해서 공문에 추가해."

    제르페누스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우우우우우-. 그때였다.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늑대의 것 같은,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탁하고 낮은 울음소리였다.

    "……방금 들었나?"

    "네, 네! 드, 들었습니다. 무, 무슨 짐승의 것 같았는데, 훨씬 괴이해서……."

    창백한 낯을 한 신하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무슨 짐승인지는 모르나, 울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사람을 풀어서 당장 상황을 파악하라 전해."

    제르페누스는 신하를 밀치며 창가를 확인했다. 창밖으로는 굳게 닫힌 성벽과 아름답게 정돈된 정원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네? 무슨 상황을 말입니까?"

    "울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면 가까운 거리에 짐승이 있다는 거잖나. 아마도 수도 안에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짐승에게 신경 쓸 시간이-."

    "성벽 바로 가까이에 있다 해도 거리가 상당한데, 여기까지 들렸어. 보통 짐승이 아니야. 거대한 짐승이야."

    제르페누스는 다시금 울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짐승의 등장이 기회가 될지, 불행이 될지 모르나 확실한 건 귀를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썩 좋게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 * *

    "놈들은 우리 상대가 아니다! 이대로 쭉 몰아붙여!"

    지휘관의 외침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수준 차이는 확실했고, 거기에 상대는 사기도 볼품없었다. 이대로라면 더 볼 것도 없었다. 황제 측에서 실험체를 내보이지 않는 이상, 지금까지 승패는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이 정도로 몰아세우는 것으로는 부족한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신전이 걸리는 거겠죠."

    "신전이 거슬리는 건 저희 측도 마찬가지니, 할 말은 없지만 이런 식이면 시일이 더 걸리겠는 걸요."

    펜리르는 깊게 눌러쓴 검은 투구를 고쳐 쓰며 황성와 신전을 번갈아바라봤다. 누가 더 많은 땅을 가지고 있나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양쪽 다 거대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멀리서도 참 잘 보였다.

    "무리하더라도 성을 공략할까요?"

    "사람들의 눈에 띄려면 실험체를 성 밖으로 끄집어내는 편이 유리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혹시라도 신전 쪽에서 뒤통수를 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펜리르가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 최악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카벨레누스 정도의 실력자가 아직도 못 빠져나오고 있다는 상황이라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대공 전하께서 그쪽에 계신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을…… 저게 뭐죠?"

    "……."

    "……."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주변이 고요해졌다. 광장의 시계탑 꼭대기, 어둠 속에서 뭔가 번뜩이고 있었다.

    "……거대한 짐승?"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찾은 펜리르가 의문을 표했다. 시야가 가려지는 투구 사이로 보고 있어서 한계가 있긴 했지만, 분명 뭔가가 있었다.

    "마물입니다."

    연이어 정신을 차린 가제프가 고개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바로 의문에 휩싸여야만 했다. 알리시아의 말대로라면 마물은 슈바르한을 벗어날 수 없었다. 수도를 버젓이 돌아다닐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저 마물은 뭐란 말인가. 고심하던 가제프는 마물의 뒤로 보이는 건물에 마른 침을 삼켰다. 마물이 나타난 방향은 서쪽, 신전 방향이었다. 가제프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한 번 핥고는 재빨리 다음 말을 정정했다.

    "마물처럼 보이긴 하지만, 마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비 전하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실뿐만 아니라, 신전도 실험에 참여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황실 이상의 결과를 냈을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전군, 경계해!"

    가제프는 재빨리 외친 후, 곧장 주변을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에 띄는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다른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

    "……."

    아군이든, 적이든 할 것 없이 침묵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정작 침묵의 주역인 마물은 어떤 행동도 없이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스스로가 신이라도 되는 양.

    "……하필 오늘 달도 금색이군요."

    싸늘한 분위기를 참다못한 펜리르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하지만 정작 가제프는 웃지 않았다. 괴물이 홀연히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 그저 같은 자리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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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괴물이 낯익었다고?"

    <네. 그런데, 마치 그 모습이…….>

    "그냥 편하게 말해줘."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걸까. 알리시아는 테이블 아래로 꽉 쥔 손을 감추며 애써 덤덤한 척 미소를 지었다. 가제프는 알리시아의 눈치를 한참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대공 전하 같았습니다.>

    "……."

    <기분 탓이었을 확률도 큽니다. 대공 전하께서 그런 식으로 변하시는 건 한 번도-.>

    "그래서 못 돌아왔을지도 몰라."

    가제프의 말을 가로챈 알리시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가제프가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곧장 다음 말을 이었다.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경이 봤다는 짐승이 정말로 카벨레누스라면, 적어도 그는 살아 있다는 거니까."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완벽하게 괜찮진 않지만, 내가 생각했던 최악까지는 아니라서 괜찮아."

    알리시아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죽음 이상의 최악은 없었다. 어떤 식이든 살아만 있으면 기회는 오기 마련이니까. 희망을 잃기에는 일렀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예전의 전하께서는 단 한 번도 짐승으로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분명 신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게 틀림없습니다.>

    가제프가 바득바득 이를 갈며 분통을 터트렸다. 얼핏 보니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그저 바라만 보고 갔다면서. 그 정도면 이성도 남아 있는 걸 거야."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나는 일단 펠시를 비롯해서 다른 마물들에게 아는 게 없는지 물어봐둘게. 마물과 관련된 거라면, 아무래도 마물들이 가장 잘 알 테니 말이야."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제프의 얼굴에 그나마 화색이 돌았다. 마물에 관련해선 알리시아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나니 심란했던 마음이 그나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동안 경은 시계탑에 연락할 만한 걸 가져다놔주고."

    <연락할 만한 거요?>

    "일단 발견한 마물이 카벨레누스가 맞는지부터 확인부터 해보는 게 우선이기도 하고, 일단 그가 일부러 보란듯 모습을 보였잖아."

    어젯밤의 마물은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공격도 하지 않고, 심지어 상황을 주시하는 것처럼 바라만 보고 갔다. 하지만 알리시아가 아는 카벨레누스는 생각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물이 카벨레누스가 맞다면 그 행동에는 분명 뜻이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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