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모든 걸 잃어버리는 건
2021.06.28.
"슈바르한 대공이 시민들을 죽일 거라는 이야기를 퍼트리고 다니는 놈들입니다."
"심문은 내가 하지. 너희는 아직 잔당이 남아 있을 테니, 계속해서 잡아들이도록."
가제프는 묶여 있는 자들의 목덜미를 확인했다. 다행히 시민으로 분장한 병사들에게 족쇄의 흔적은 없었다.
"황제의 끄나풀이 슬슬 나오기 시작한 걸 봐선 확실히 초조해진 모양입니다."
"저희가 쓴 계획을 도로 써먹기까지 하고 있으니, 슬슬 황제의 생각에도 한계가 왔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죠."
"황제는 지는 걸 싫어하니까요. 몰아붙일수록 점점 생각이 짧아지고 감정적으로 변할 겁니다."
"안타깝게도 역전을 노리는 그와 달리, 슈바르한의 군대는 이미 수도에 들어와 있지만요."
로브를 깊게 눌러쓴 채, 옆을 지키고 있던 펜리르가 웃었다. 검은 갑옷을 보면, 사람들은 당연히 슈바르한의 군대를 떠올렸지만, 사실 갑옷은 누구나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해도 방심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가제프는 황궁을 바라봤다. 실험체가 된 병사들은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싸움의 승패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번의 수까지 실패했다는 걸, 알면 황제는 더욱 궁지에 몰릴 겁니다. 그리고, 끝끝내 무장한 군대를 소집하겠죠."
"평범한 군대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은 없겠죠?"
펜리르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한시도 긴장을 풀어선 안 됩니다. 저희가 승리를 거머줬을 때야말로 진짜 적이 나타날 겁니다."
"그들이 말하는 실패작도 처리가 번거로웠는데, 제대로 된 실험체는 어떨지 감이 오지 않는군요."
펜리르는 결국 웃는 걸 포기하고 어깨에 힘을 뺐다. 지금까지는 쉽게 우위를 점했지만, 그 역시 앞으로의 싸움을 장담하지 못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슈바르한은 지지 않습니다."
"승리하지 않으면 곤란하죠. 저희는 슈바르한에 모든 걸 걸었거든요."
펜리르는 검을 뽑아 보란 듯 어깨에 멨다.
"저는 중앙을 맡을 테니, 소맹주께서는 인도를 맡아주십시오. 혹시라도 도망가지 못한 이들이 있으면 확인해주시고요."
"……."
"왜 그러십니까?"
"자리는 바뀌어도 성품은 속이지 못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펜리르는 멋쩍게 웃음을 흘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생명을 우선시하는 건 도덕적으로 훌륭할 순 있으나, 이런 순간에서까지 따지는 건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지금 하고 있는 싸움은 소꿉장난이 아니었다.
"저는 솔직히 시민들을 구출하는 것보다 병사와 그들을 섞어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저희도 저들과 같아지겠죠."
"어차피 도덕을 따지기엔 서로 늦은 입장 아닙니까."
펜리르의 입술 끝이 아래를 향했다. 이제 와서 고고한 척하기엔 손에 묻힌 피가 너무도 많았다. 모든 일에는 희생이 있는 법이었다.
"물론 저희는 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제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그런 선택을 하시는 겁니까?"
"저희는 도덕을 추구하려는 것이 아닌, 더 나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쪽을 선택하려는 것뿐입니다."
"전장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어렵습니다만?"
"원래 어려울수록 대가도 더 달콤한 법입니다."
"무슨 대가가 그리 달콤하답니까?"
"사람이죠."
가제프는 서쪽 방향을 바라봤다. 혹시나 해서 예의 주시하고 있지만, 신전 쪽은 여전히 고요했다. 지금으로선 여전히 카벨레누스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거 아십니까? 대공 전하께서 오시기 전까지, 슈바르한 사람들도 야만인이라 불렸다는 거 말입니다."
"……."
"지금의 슈바르한을 있게 한 건, 누가 뭐래도 대공 전하십니다. 그래서 다들 그분께 의지해왔고, 뜻에 충실히 따라왔습니다. 그것이 저희에겐 당연한 일이었죠."
"……."
"하지만, 대공 전하의 부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당연함이 문제가 되더군요."
카벨레누스는 자신의 부재까지 고려해 일을 처리한 후, 자리를 비웠다. 그 덕분에 카벨레누스가 자리를 비워도 아직까지는 건재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이었다. 카벨레누스의 압도적인 힘 앞에 다들 욕심을 감추며 쉬쉬하고 있을 뿐, 혹시라도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다들 앞다투어 권력 투쟁에 나설 것이었다. 실제 알리시아가 수집한 첩보에 의하면, 이미 암암리에 조용한 이야기가 오고 간 정황을 포착하기도 했었다.
"만약 대공 전하께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신다면, 이 문제는 더욱 불거질 겁니다. 제국에는 단순히 힘만으로는 누를 수 없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까요."
"멜타 공작을 필두로 한 보수파 귀족들은 이미 대공 전하를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국의 인구 95%는 평민입니다. 그들 한 명의 힘은 미비해 보이지만, 목소리가 모이면 무엇보다 크죠. 대신관이 그 무엇보다 여론을 중요시 여기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였다 해도 신전 또한, 적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신앙심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사람들 마음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신전을 이기기 위해선 민중의 지지가 필요했다.
"로아킨만 갈 길이 먼 줄 알았더니 아니군요."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죠."
"그래도 지금만큼은 등을 맞대고 싸우는 사이 아닙니까."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펜리르와 가제프,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황궁 위로 펄럭이는 깃발은 군대의 출정을 알리는 붉은색이었다.
"드디어 연기를 맡은 너구리가 굴에서 나오는군요."
"그렇다면, 더 세게 불을 피워야겠군요."
가제프는 펜리르가 했던 것처럼 가볍게 농을 던지며 곧장 앞으로 달려나갔다. 기분 탓일까, 칼집을 빠져나오는 금속의 마찰 소리가 유난히도 날카롭게 귀를 울렸다. * * * 카벨레누스는 나무 꼭대기에서 몸을 숨긴 채, 주변을 살폈다. 높게 올려 쌓은 벽에 바깥 상황은 파악하긴 어려웠지만, 신전의 상황은 얼추 보였다.
'지하실에서 빠져나오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걸렸어.'
복잡한 미로와도 같았던, 신전의 지하실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손톱처럼 얄팍하던 달이 어느덧 잔뜩 배를 부풀고 있는 걸 보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을 거라고 추측하는 게 다였다.
'탈출하냐, 끝을 내고 가냐인데…….'
카벨레누스는 목 부근을 어루만졌다. 실험을 겪은 후부터 상처가 빨리 아무는 편이었는데, 헤르만이 문 상처는 이상하게도 회복이 늦었다.
'……일단은 탈출부터 할까.'
이왕이면 헤르만을 완벽하게 정리하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신전에만 머물 수 없었다. 아쉽더라도 일단 탈출해 계획이 왜 앞당겨진 건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바뀐 건지 확인해야 더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목적했던 바는 이뤘으니까.'
무리하면서까지 신전에 잠입했던 건, 알리시아의 건강 때문이었다. 뚜렷한 답을 얻진 못했지만, 알리시아나 마물이라면 프라임의 이야기에서 해답을 찾아낼 수 있는지도 모르니, 서둘러 알려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이대로…….'
카벨레누스는 순간 머릿속을 날카로운 감각에 이마를 짚었다. 반사적으로 가지를 쥐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었다.
"……."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몸을 고쳐세웠다. 통증은 금세 익숙해졌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목덜미가 간질거렸다. 카벨레누스는 다시금 목을 매만졌다. 손에는 멎은 줄 알았던 피가 묻어나 있었다. 검붉은 피였다.
* * *
"……."
[왜, 그러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카벨레누스의 기척이 다시 느껴져."
[그렇다면 다행이군.]
펠시가 알리시아의 표정을 곁눈질했다. 한동안 카벨레누스 때문에 좀처럼 웃지 못했던 알리시아였다. 좋은 소식이 들렸으니, 이제 다시 웃어줄 법도 했다. 하지만 펠시의 기대와 달리, 알리시아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굳어 있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너무 희미해."
[희미?]
펠시가 되물었지만, 알리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에겐 잠시 감정을 삭일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 미세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
[그대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알리시아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닌 것 같나?]
펠시가 알리시아의 손에 가만히 얼굴을 댔다.
"기분이 이상해."
[어떻게 이상하나?]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굳이 표현하자면 오싹하달까?"
알리시아의 시선에 일렁이는 등불에 닿았다. 등불은 원료로 넣은 마정석이 얼마 남지 않은 건지, 연신 깜박거리고 있었다.
[연락을 해봐라.]
"전쟁이 시작되었어. 빠른 연락은 쉽지 않을 거야."
결국 깨물었던 입술이 터졌다. 알리시아는 입안에 느껴지는 싸한 피 맛에 얼굴을 찌푸렸다. 카벨레누스가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믿고 싶은데,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때론 본능이 정답일 수도 있다.]
"단지 기분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후회할 거다.]
"……."
알리시아의 동공이 떨렸다. 펠시의 말이 옳았다. 이대로 상황을 낙관만 하고 있다가 혹시라도 카벨레누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분명 후회할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지금의 자신은 겨우 그릇이 더 깨지지 않게 붙잡고 있는 게 다였다. 앞뒤 안 가리고 움직였다간 오히려 짐만 늘게 할 뿐이었다.
[……우리가 도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말 하지 마. 너희는 이미 충분히 도와주고 있어."
[하지만 정작 그대가 필요할 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펠시의 귀와 꼬리가 어김없이 아래로 축 처졌다.
"자책해야 하는 쪽이 있어야 한다면, 너희가 아니라 내가 되어야지."
[우리는 그대가 자책하는 거 원하지 않는다. 그냥 행복했으면 좋겠다.]
자주 대화를 나눠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일까. 펠시의 언어 능력은 예전에 비하면 나름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애써 웃으며 짐승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나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 너희는 늘 잘해주고 있는걸."
[우리가 이곳을 나갈 수만 있어도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너희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닌걸."
펠시에겐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사실 마물을 슈바르한 밖으로 보내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어떻게서든 나간다 해도 마물이 수도를 버젓이 나다니는 것도 문제였으니까. 마물에 대한 편견은 절대적인데다가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본 순간이 더욱 강렬한 법이었다. 지금처럼 마물이 악한 존재로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는 여론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조심해야만 했다. 신뢰를 쌓는 건 어렵지만, 반대로 잃는 건 너무도 쉬웠으니까. 모든 걸 잃어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