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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37)화 (137/164)
  • 137화. 누군가는 기다리고 있었다

    2021.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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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처지가 어떤지 생각하지 못하나본데, 이곳에는 그대의 편이라곤 없어. 그대는 인질이 된 거라고."

    "네놈이 신경쓰지 않아도 바깥에선 이미 그렇게 알고 있다네."

    "뭐라고?"

    "그대는 신의 대리자를 사칭해 신전의 문조차 닫게 한 폭군. 그리고, 나는 그런 폭군에게 충언을 드리려다가 잡힌 인질. 이렇게 말이지."

    멜타 공작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많은 이들이 내가 황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죽거나, 상태가 안 좋아지면 네놈 입장은 더욱 곤란해질 거야."

    "내가 고작 그런 말장난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나?"

    제르페누스는 멜타 공작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종을 울렸고, 금세 방 안 가득 무장한 병사들이 몰려왔다.

    "넘어가지 않을 거라면, 이미 날 죽였겠지."

    "……."

    "아니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내 피를 볼 건가?"

    멜타 공작이 보란 듯 옆에 선 병사를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슈바르한 군대가 등장한 후부터 병사들은 하나 같이 잔뜩 날이 서 있어 보기만 해도 위협적이었지만, 멜타 공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대충 넘어가지 않을 걸세. 멜타 공작."

    "나보단 네놈의 입장부터 생각하지 그래? 내 생각엔 지금 네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말이지."

    멜타 공작이 입술을 이죽거렸다. 권력으로 억지로 짓누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광기 어린 노인은 한 발자국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제르페누스는 절 위협하는 무기 속에서도 덤덤한 멜타 공작을 노려보다가 끝끝내 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상황 보고해."

    "현재 시민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폭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황성 밖 성벽에도 많은 이들이 모여 진실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신의 대리자에 대한 진상이라도 밝히라는 것인가?"

    "그게,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서……."

    전령이 슬쩍 제르페누스의 시선을 피했다. 제르페누스는 양 눈썹을 추켜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다? 말 끊지 말고 제대로 말하도록."

    "신의 대리자가 빈민가 소각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빈민가의 소각장이라고? 어이가 없군. 도대체 그 몸으로 어떻게 빠져나간 거지?"

    제임스는 혹시 모를 정보를 위해 목숨만 부지시켜놓은 상태였다. 혼자 움직일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게, 실은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죽어?"

    제르페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때문에 폐하께서 신의 대리자를 가짜로 만들었다가 상황이 안 좋아지자, 그를 죽이고 몰래 처리하다가 걸렸다는 소문이 도는 상황입니다."

    "고작 그게 다인가? 어차피 그놈이 가짜라는 걸 알았다면, 신성모독 논란은 없었을 텐데?"

    "그게, 폐하께서 평민을 벌레보다 못하게 여긴다는 이야기와 맞물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다른 이야기가 또 있나?"

    "빈민가의 실종 사건과 폐하께서 연관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령은 말을 하고도 흘끔 제르페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이야기를 꺼내면 꺼낼수록 황제의 얼굴은 험상궂게 변하고 있었다.

    "있는데? 그다음은 뭐지?"

    "그게 사람을 이용해 실험을 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소문을 낸 자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가지고 실험이라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전령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제르페누스의 표정은 너무도 싸늘했다.

    "정말로 웃기는군. 소문 따위가 뭐라고 이토록 난리인 건지."

    제르페누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근거가 없으면,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아무리 휩쓸리기 좋은 게 여론이라지만, 단순히 말만으로 폭동이 일어날 리 없었다.

    "황실이 그간 해왔던 실험에 대한 파일이 유출되었다고 합니다."

    "파일?"

    "저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잦은 실종 사건도 그렇고, 무엇보다 지금 저희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서 그대로 믿는 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은 아니지."

    상황을 관망하던 멜타 공작이 슬쩍 끼어들었다.

    "지금은 그대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지 않나."

    제르페누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멜타 공작을 노려봤다.

    "폭동이 일어난 이유를 네놈은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뭘 모른다는 거지?"

    "지금의 일을 있게 한 게 네놈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거다."

    "무슨 뜻이지?"

    제르페누스는 사람을 소모품처럼 여겨왔다. 실험을 시행하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고, 실험에 대한 뚜렷한 결과가 나오자 더욱 거침없어졌다. 실패작이라는 이유로 실험체들을 쓸모를 다한 연구소와 함께 폐쇄하기도 했고, 죽은 실험체를 야생동물의 밥이 되게끔 방치하기도 했다.

    "네놈은 실험이 끝나고 몇몇 실험체들을 버렸지. 어차피 날뛰다가 금세 죽을 자들이라고 말이야."

    "……."

    "그런데, 그거 아나? 네놈이 버린 실험체들을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는 거."

    "……."

    실험이 계속된 만큼 희생된 실험체들도 늘었다. 그들 모두를 챙길 순 없었지만, 많은 이들이 죽어서라도 자신의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실종자 명단과 네놈이 버린 실험체가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고, 유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줬다네."

    "설령 실험이 이뤄졌다 해도 그걸 황실이 주도했다는 증거가 있나?"

    제르페누스는 당당하게 가슴을 쭉 폈다. 걸리지만 않으면 그만이었고, 무엇보다 실험과 황실을 엮을 수 있을 만한 건 이미 전부 지워버린 후였다. 실험의 정황은 찾을 수 있을지언정, 주도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솔직히 내가 아니라, 멜타 공작의 대단한 손자께서 하셨을지도 모르잖나?"

    "이번에도 그 아이에게 떠넘길 거냐?"

    "이미 악명이 수두룩한 동생인데, 하나 더 더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않나. 어차피 다들 카벨레누스 앞에선 꼼짝도 못 할 텐데 말이지."

    제르페누스는 입술을 이죽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카벨레누스에게 죄를 떠넘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이 깔아놓은 판에 역으로 당해보면, 고고한 동생도 나름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러도록. 그래 봤자, 구렁텅이로 빠지는 건 네놈일 테니."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두고 볼 필요도 없지. 바로 옆에 있는 이의 마음까지 사로잡지 못하면서, 저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시키겠나."

    멜타 공작의 시선이 전령에게 향했다. 아직 젖살이 덜 빠져, 앳된 얼굴이 남은 전령은 지금 상황이 혼란스러운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네놈은 사람을 믿지 않지. 그래서 실험에 대해 아는 자도 몇 되지 않을 거야."

    "……."

    "다시 말해, 황궁에 있는 자들 전부가 네놈의 실험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소리인 거지."

    멜타 공작은 피식 웃었다. 명백한 증거가 없으니 병사들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찜찜함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노망이 나도 제대로 났군. 더 들어줄 필요도 없어. 지금 당장 공작을 독방으로 옮겨드려라."

    "……."

    "……."

    "……."

    "왜 아무도 움직이지 않지?"

    제르페누스가 짜증을 내고서야 병사들이 주춤주춤 움직였다. 하지만 정작 병사들 중 누구도 선뜻 멜타 공작에게 다가가진 못했다.

    "혼란스러운 거지."

    "혼란?"

    "기억나나? 네놈이 처음 실험을 주도했을 때, 가장 먼저 써먹었던 게 네 병사들이라는 거."

    "……."

    "그자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이곳에도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우리의 대화를 듣고 혼란을 느낄 수 있는 자들이 말이야."

    "……."

    "선대부터 이어져오던 실험이었니, 희생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멜타 공작이 성큼성큼 걸어갔지만, 어떤 병사도 그를 막지 못했다. 제르페누스는 재빨리 장식된 검을 뽑아 들며 눈에 바짝 힘을 줬다.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실험이라니. 그게 말이 되나."

    "근거가 있으면 말이 되겠지."

    멜타 공작의 손이 제르페누스의 검날을 쥐었다. 날이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장신용 검이었음에도 얼마나 세게 잡았던 건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네놈한테 조금이라도 황제의 자격이 있다면, 바깥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는지 제대로 들어보는 게 어떻겠냐."

    "노망난 영감이 내게 훈계라도 하고 싶으신 모양이군."

    "훈계라기보다는 미쳐버린 거지."

    "……."

    "미물도 제 새끼를 잃으면 창자가 꼬이는데, 하물며 그런 자들이 우글우글 모이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피 묻은 손이 제르페누스의 목을 스쳤다. 새하얀 크바라트에는 붉은 얼룩이 짙게 남아 있었다.

    "뭣들 해! 당장 공작을 체포해!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군법에 맞게 처리하겠다!"

    제르페누스의 외침에 정신 차린 병사들이 허둥지둥 멜타 공작을 둘러쌌다. 하지만 멜타 공작은 어떤 반항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제르페누스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놈을 닮은 얼굴을 보고 있으면, 지금이라도 네놈을 죽이고 싶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거다."

    "……."

    "네놈도 알아야 하거든. 네놈이 마음껏 웃고 떠들며 네 욕심을 채우면 채울수록 억지로 참아가며 괴로워하던 이들이 있었다는 걸."

    멜타 공작이 이죽거렸다. 제르페누스의 옷에는 낙인처럼 찍힌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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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대로 계속 침묵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기도 없는 놈들이 뭘 하겠다고. 그냥 둬. 어차피 저것도 잠시야. 그런 건 쉽게 불타올랐다가 식는다고."

    "가만히 두기엔 여론이 썩 좋지 않습니다. 성밖에는 벌써부터 진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 나라의 황제는 나야! 내가 이 제국의 주인이라고!"

    제르페누스가 거칠게 책상을 내리쳤다. 핏발 선 눈으로 주변을 훑은 그는 거친 숨을 뱉으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내가 카벨레누스라도 저들이 그랬을까? 아니! 아니다! 저들은 내가 만만한 거다! 내가 반쪽짜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

    자신이 원해서 야만인의 피를 이은 것도 아니건만, 그 핑계로 틈만 나면 자신을 잡아먹으러 들었다. 제르페누스는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결국 짜증을 토했다.

    "계속 참아주려고 했지만 안 되겠군. 병사들을 소집해."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입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더욱 반발할 수 있습니다."

    "벌레가 꿈틀거리는 걸 보고 사람들은 혐오를 하지, 걱정을 하지 않지."

    "……."

    "시민들은 다시 채울 수 있어, 아니. 차라리 이 김에 내게 반항하는 버러지들을 전부 치우고 새롭게 자리를 채우는 것도 좋겠군."

    자신에게 악명이 쌓인다고 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족쇄를 채운 카벨레누스를 황좌에 앉혀 꼭두각시로 써먹으면 그만이었다.

    "대공 측이 움직이는 명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이면 그만이야."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폭동이 벌어질 걸 알고,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슈바르한의 군대를 불렀다. 이제 곧 밀려온 슈바르한의 병사들이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이렇게 말이지."

    "그렇게 되면……."

    "무장하지도 않은 시민들이니, 그 소식에 겁에 질려 도망가거나, 다툼이 일어나겠지.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시민들 사이에 우리 측 사람을 풀어놓는 거다. 저번에 우리가 당했던 것처럼 말이지."

    제르페누스의 입가에 오래간만에 진짜 미소가 번졌다. 저번에는 당했을지 몰라도 이번에는 달랐다. 놈들이 썼던 방법을 써서 역으로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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