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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36)화 (136/164)

136화. 썩은 죄책감

2021.06.21.

"멜타 공작께서 친히 날 방문해주다니. 이것 참 영광이군."

제르페누스는 선뜻 두 팔을 벌리며 멜타 공작을 환영했다.

"이제 폐하께서도 슬슬 정신을 차렸을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냉정한 말투는 여전하군. 그리고……."

"왜 그러십니까?"

"예쁜 팔찌군."

제르페누스가 웃었다. 멜타 공작의 손목에 걸린 팔찌는 그도 익히 아는 물건이었다.

"어디서 난 물건이지? 내가 알기론 공작의 취향은 그런 쪽이 아닌 거로 아는데 말이지."

"선물 받았습니다."

"선물?"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누구의 편을 들고 있는지."

멜타 공작이 가만히 제르페누스를 응시했다. 눈빛이 얽히는 순간에도 노공작은 무심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착한 할아버지 흉내라도 낼 셈인 건 아니겠지?"

"이제 와서 그런 걸 바라기에는 염치없는 일이지요."

"하긴, 착하다는 표현은 권력을 위해 딸을 팔아먹은 인간에게 붙일 만한 게 아니지."

"……."

차갑게 식은 멜타 공작의 시선에도 제르페누스는 입술을 이죽거렸다. 멜타 공작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황실로 시집보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선황제는 멜타 공작이 만든 황제였고, 그런 선황제를 완벽하게 허수아비처럼 부리기 위해선 혼인만큼 좋은 수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대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권력에는 항상 그만한 희생이 따르는 법이니까 말이야."

"저를 구슬리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대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알거든."

제르페누스는 슬쩍 멜타 공작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호랑이는 호랑이였다. 멜타 공작이 보수파 귀족들을 이끄는 수장이라는 건 제국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가뜩이나 혼란한 상황에서 귀족들의 절반가량을 적으로 돌리면 곤란했다.

"솔직히 혈육이 뭐 대단하나. 중요한 건 나한테 어떤 이득이 오느냐 아닌가."

"그렇다면 제게 줄 만한 걸 생각해놓으셨겠군요."

"프로티어를 주지."

프로티어는 항구 도시로, 상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렇기에 세금만 받아먹어도 제법 쏠쏠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영지였다.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프로티어에 더해서 로탄까지 주셔야지요."

"욕심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슈바르한의 군대가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시점 아닙니까."

"움직이지 않는 군대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제르페누스가 퉁명스러운 투로 쏘아붙였지만, 그런 장난질에 넘어갈 노공작이 아니었다. 멜타 공작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제르페누스를 응시했다.

"의미가 있으니, 제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게 아니십니까."

"과거의 멜타였다면, 더 좋은 제안을 했겠지."

"과거의 멜타였다면, 이딴 제안은 확인해보지도 않았겠지요."

"……."

"멜타의 명성이 떨어진 건 사실이나, 승리의 추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제르페누스는 입술을 씰룩거리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진 못했다. 지금 아쉬운 건, 멜타 공작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카벨레누스가 이미 프로티어를 주기로 제안했나 보군."

"저를 움직이시려면 그 이상을 주셔야 할 겁니다."

"좋아. 로탄까지 얹어주지."

제르페누스는 이를 꽉 다물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켰다.

"이제야 조금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었군요."

"대신, 그대를 포함해 그대를 따르는 보수파 귀족들의 사병도 내놓아야 할 거야."

"사병까지 움직이길 원하신다면 더 주셔야지요."

"더 달라?"

제르페누스가 헛숨을 뱉었다.

"프로티어와 로탄의 가격은 보수파 귀족들이 움직이지 않는 값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명한 공작 각하신 줄 알았는데, 사기꾼이었나 보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적당한 시기를 아는 것뿐입니다."

"정확히는 어느 쪽이든 완벽하게 편을 들지 않아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겸사겸사 알짜배기 땅도 얻고 말이지."

제르페누스는 대놓고 비난을 쏟아내면서도 웃음을 터트렸다. 뻔히 당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대로 멜타 공작을 카벨레누스의 수중에 둘 순 없었다. 어차피 비싼 값을 치른다고 한들, 카벨레누스만 손에 넣으면 금세 복구할 수 있었다.

"프로티어, 로탄에 이어서 카발라도 넘겨주지. 어떤가?"

"사병들을 곧장 수도 내에 배치하도록 하지요. 물론 그 전에 이번 거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제대로 된 계약서를 작성해야겠지만요."

멜타 공작은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제르페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이런. 꼴이 말이 아니군요."

"다, 당신은……."

제임스가 쉰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제르페누스에게 열심히 빌어 살아남긴 했지만, 그는 거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차가운 독방에 갇힌 채,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끔찍한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 거지?"

"마침 도와주시는 분이 계셨죠."

펜리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슈바르한 대공인가?"

제임스의 두 눈이 번뜩거렸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눈빛이 살아 있는 걸 보니, 아직 멀쩡하신가 보군요."

"멀쩡? 이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

"자, 자. 진정하세요. 이러다가 괜히 사람을 불러모으면 서로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펜리르는 생글생글 웃으며 제임스에게 맞춰 몸을 숙였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제임스의 몰골은 처참하다 못해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펜리르는 얼굴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어떻게 지내셨는지 묻고 싶지만, 그런 말을 하면 화내시겠죠."

"지금 농담이 나오나?"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게 일류 아니겠습니까."

"일류는 무슨."

제임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자신은 벌레처럼 바닥을 기고 있는데, 아직도 모든 것이 장난인 양 구는 사내의 행동에 화가 났다.

"물론 제가 진짜 일류였다면, 약속을 저버린 자를 용서해주는 일 따윈 없었겠지요."

"……."

"잘도 저희 측 정보를 떠드셨더군요."

어느샌가 웃음이 싹 사라진 펜리르에 제임스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매번 경어를 쓰며 자신을 낮추는 척하고 있을 뿐이지, 그는 처음부터 아쉬운 입장이 아니었다.

"그, 그건 상황이 어쩔 수 없게 돌아가서……!"

"혹시나 해서 떠봤는데 역시나네요."

"뭐?"

"변명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당신의 배신은 예상하고 있었거든요."

펜리르는 도로 웃으며 제임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마치 위로를 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배신하지 않는 쪽이 더 곤란하기도 했고요."

"그게 무슨……."

"이쯤 되면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당신이 절 배신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이렇게 당신을 찾아온 이유."

길게 찢어지는 펜리르의 눈에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그의 눈동자는 며칠 전 저를 죽이려 들던 황제와 같은 진한 녹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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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벌써 이렇게까지 손해라니. 이번 싸움에서는 정말로 질 수 없겠는걸."

제르페누스는 혀를 쯧쯧 차면서 계약서를 살폈다. 누가 철혈 공작 아니랄까 봐, 멜타 공작과 합의해 작성한 계약서에는 장난질을 칠만한 구석이 없었다.

"걱정되신다면, 승리하십시오. 결국 모든 건 승자의 몫이니까요."

"그대의 손자가 들었다면 기함할 말을 잘도 하는군."

"혈연을 운운하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으니까요."

멜타 공작은 피식 웃으며 창문을 바라봤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푸르기만 했다.

"그래도 혈육은 혈육인가 봅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눈앞의 이득을 뻔히 알면서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만들죠."

멜타 공작은 지금껏 작성한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치 보란 듯 그대로 계약서를 쫙쫙 찢어 제르페누스 앞에 내던졌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폐하, 아니. 제르페누스."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아무래도 우리 공작 각하께서 망령이라도 든 모양이군."

제르페누스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망령은 예전에 들었지."

내 딸아이가 죽은 그날부터. 덧붙인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멜타 공작은 치미는 울분을 애써 삼키며 제르페누스를 노려봤다. 제르페누스의 얼굴에는 멜타 공작이 평생토록 미워했던 자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제르페누스, 네 놈이 말했지. 내가 내 딸을 팔아먹었다고."

"그게 사실이잖나. 설마 이제 와서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부정할 생각은 없네. 내가 딸을 팔아먹었다는 것도, 카벨레누스를 외면한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나는 후회를 했지."

멜타 공작이 짧게 조소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내 후회는 너무도 늦었지만, 세상은 참으로 다정해서 이런 내게도 기회를 주더군. 그리고, 내게 주어진 기회 덕분에 네 놈은 많은 걸 잃겠지."

"……."

"그래도 너무 섭섭해하진 말게나. 어차피 네 놈이 누리고 있는 것들은 원래 네 놈의 것이 아니었잖나."

"……뭘 꾸미고 있는 거지?"

"궁금하면 기다려보게나. 이제 슬슬 시간이 다 됐으니 말이야."

멜타 공작은 느긋하게 품에서 시계를 꺼냈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곗바늘은 약속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예고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지금 수도 여기저기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카벨레누스가 움직인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귀족들의 사병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건, 전령의 고갯짓뿐이었다. 제르페누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이를 드러냈다.

"카벨레누스도, 귀족들의 사병도 아니라면 누구지?"

"그, 그것이 무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일반 시민들 같습니다."

"시민?"

제르페누스는 반사적으로 멜타 공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옅게 웃고 있는 노공작은 제르페누스가 익히 아는 얼굴을 닮아 있었다. 승리가 확실해질 때마다 카벨레누스도 저런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 결국 제르페누스는 참지 못하고 멜타 공작의 어깨를 잡아챘다.

"무슨 일을 벌인 건지 당장 말해!"

"말했잖나. 궁금하면 기다려보라고."

멜타 공작은 냉정하게 제르페누스의 손을 잡아 그대로 끌어내렸다. 그는 한때 제국에서 제일가던 맹장이었다. 나이가 들었다 한들, 곱게 자란 젊은 황제를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멜타 공작께서는 이곳이 어디인지 잊은 모양이군."

"죽음을 두려워할 거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지."

멜타 공작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뭐라고?"

제르페누스는 씩씩거리면서도 멜타 공작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지나간 세월에 맞게 힘이 약해질 법도 하건만, 고약한 늙은이는 여전히 무식하리만큼 힘이 셌다. 지금 싸움을 붙인다 해도 혼자서 장정 몇은 거뜬하게 치워낼 것이었다.

"날 죽이고 싶으면 죽이게나. 내가 죽으면 저들의 분노 역시 커질 테니, 내겐 나쁠 것이 하나도 없거든.“

멜타 공작이 거만하게 턱을 추켜들었다. 핏줄이 바싹 선 눈은 한 치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오랫동안 삼키기만 해 썩어버릴 대로 썩은 죄책감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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