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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35)화 (135/164)

135화. 각자가 할 일

2021.06.17.

카벨레누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처음에는 사방의 불빛처럼 흐릿한 정신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이내 느껴지는 통증에 금세 정신이 돌아왔다. 이곳이야말로 현실이었다. 카벨레누스는 거친 숨을 뱉으며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기절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나, 헤르만은커녕 별다른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옥 안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걸맞게 지나칠 정도로 고요하기만 했다.

"……."

수색을 끝낸 카벨레누스는 곧장 팔을 앞쪽으로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사슬이 살갗을 짓눌렀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카벨레누스는 짧게 숨을 들이켠 후, 힘을 줘 그대로 쇠사슬을 끊어냈다.

"……상태가 말이 아니군."

카벨레누스는 인상을 쓴 채 낮게 중얼거렸다. 무지막지한 힘에 사슬뿐만 아니라 벽의 파편도 일부 딸려왔지만 상관없었다. 일단 손이 자유로워졌기에 손목을 묶은 수갑을 푸는 일은 아까보다 훨씬 쉬웠다. 카벨레누스는 대충 손목을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카벨레누스는 무기로 쓸만한 쇠막대를 하나 집어들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헤르만의 언급 때문에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눈치챘지만,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계획이 원래 일정보다 빨리 진행된 이상, 계획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무리하지 않고 군대와 합류하는 편이 낫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벽을 더듬어가며 출구를 찾던 카벨레누스의 걸음이 멈췄다.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낯설었다. 감춰진 출구였다.

'……더럽게 익숙하군.'

카벨레누스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출구를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숨겨져 있던 방에는 원통형의 유리관이 수도 없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쩐지 익숙하더니."

카벨레누스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유리관은 하나같이 붉은 액체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얼굴을 찌푸린 채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는 오래전에 지금과 비슷한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먼 옛날, 황궁 지하실에서 벌어졌던 것과 같은 실험이.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기이한 실험실을 보고 있자니, 잊고 지낸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하지만 제 이복형제에게만큼은 누구보다 애틋한 아버지였던 인간. 그는 어린 아들을 실험실로 떠밀며 대단한 업적을 위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라 말했지만, 결국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선황제가 말하던 대단한 업적도, 제르페누스가 말하던 완벽한 황제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꼭두각시처럼 헤르만의 손아귀에서 놀아났을 뿐이었다.

"멍청하긴……."

그 사실을 곱씹자, 웃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가만히 유리관을 바라보다가 쇠막대를 고쳐잡았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어머니께 돌아가고 싶다고 엉엉 우는 것 대신,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쨍그랑-! 유리관이 깨지고 그대로 안에 있던 붉은 액체가 쏟아져 내렸고, 찐득한 액체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멈추지 않았다. 사내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에 고였고, 밟힌 유리 파편이 그대로 으스러졌다.

'마물의 심장까지 실험에 이용했나 보군.'

카벨레누스는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살덩이를 보며 인상을 썼다. 확실히 신전의 실험은 마물의 피를 이용하는 데에만 그쳤던 황실의 실험보다 훨씬 상위 개념이었다.

'실험이 많이 진행된 만큼 희생도 많았겠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실험은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다. 이번에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 악순환의 연속일 뿐이었다. 꺼림직한 부분이 있어도 프라임과의 거래를 받아들이는 편이 나았다.

'무엇보다…….'

카벨레누스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피는 멎었다 해도 헤르만에게 물린 자국이 아직도 욱신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의 몸 상태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크르르르- 카벨레누스는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입술을 비틀었다. 이곳에서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건, 실험체 역시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긴 싸움이 되겠는데."

카벨레누스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세를 고쳐 쥐었다.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 * *

"밖에 나가고 싶어?"

"아냐. 괜찮아."

미카엘이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창가에서 내려왔다. 알리시아는 조용히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등을 다독거렸다.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줘."

"하나도 안 답답해."

"……."

"밖에 나가 노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젠 질렸어."

미카엘은 의기양양하게 외쳤지만, 알리시아는 차마 웃지 못하고 더욱 아이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게 해주고 싶었는데, 한정된 공간에 갇혀 숨죽이고 있어야 하는 아이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나는 나가서 노는 것보다 엄마랑 같이 노는 게 제일 좋아."

"정말?"

"응. 나는 엄마랑 노는 게 제일 좋아."

미카엘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아이는 분위기에 예민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분위기를 살피고는 곧장 어른처럼 굴곤 했다. 알리시아는 애써 무너지려는 미소를 지켜내며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럼 엄마랑 그림 그릴까?"

"아냐. 오늘은 그림 안 그릴래."

미카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엄마가 동화책 읽어줄까?"

"아니."

미카엘의 고개가 아까보다 더 심하게 저어졌다.

"그럼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엄마 옆에서 책 읽을래. 엄마가 읽어주는 거 말고, 나 혼자서 읽을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아니라도 엄마는 충분히 힘들잖아. 작게 덧붙여진 목소리에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엄마는 괜찮아."

"……."

"엄마가 미카엘에게 거짓말한 적 있어?"

"……엄마, 아프잖아."

미카엘의 손이 알리시아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물기 어린 아이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알리시아는 어린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알리시아는 이내 표정을 고치며 미카엘의 시야에 맞춰서 몸을 낮췄다.

"맞아. 엄마는 지금 아파."

"……많이 아픈 거야?"

미카엘의 눈에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서서히 고였다. 알리시아는 손끝으로 미카엘의 눈꼬리를 어루만졌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기에 지금껏 침묵했다. 하지만 감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불안해하는 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자신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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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엄마는 아프지만 괜찮아."

"거짓말. 아픈데, 어떻게 괜찮아?"

"엄마는 아주 강한 사람이고, 아빠도 엄마를 더는 아프지 않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거든."

"아저씨가……?"

미카엘의 눈이 커졌다.

"미카엘도 알잖아. 미카엘의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

"그리고, 엄마한테는 미카엘도 있잖아."

"……."

젖은 속눈썹이 떨렸다. 미카엘의 두 눈에선 눈물이 닭똥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알리시아는 오히려 아까보다 편하게 웃으며 미카엘을 안았다. 아무리 어른인 척 굴려고 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솔직하게 우는 모습이 어울렸다.

"엄마가 아프면 우리 아들이 이렇게 슬퍼하는데, 어떻게 엄마가 더 아플 수 있겠어. 엄마는 금방 나을 거야."

"……정말이지?"

"물론."

알리시아는 미카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에게서 나는 달콤한 우유 내음이 불안한 마음을 그나마 진정시켜주는 것 같아 기꺼웠다. 그때였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알리시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얼굴을 감추는 거로 표정을 감출 순 있어도 쿵쾅쿵쾅 뛰는 심장 박동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집중해도 소용없었다. 더는 카벨레누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 * *

<전하의 기척이 사라졌단 말씀입니까?>

"그래.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족쇄가 풀린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새로운 족쇄 때문에 두 분의 연결이 깨졌다고도 볼 수 있다는 거군요.>

알리시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녀의 낯은 통신구 너머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면 거짓말이겠지."

알리시아는 쓰게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물론 그럴 거야,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거겠지만."

<전하.>

통신구 너머의 가제프가 말끝을 흐렸다. 이미 그는 알리시아가 무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그의 죽음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알리시아는 고개를 떨궜다. 문제를 생각할 때, 그녀는 항상 최악까지 고려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의 죽음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카벨레누스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거야."

<…….>

"나는 카벨레누스가 무사하다고 믿고 있으니까. 내가 아는 그는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거든."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이라도 당장 모든 걸 포기하고 달려가고 싶었다. 계획이고, 뭐고 간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카벨레누스를 구출하는 데에 온 힘을 쏟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알리시아는 그럴 수 없었다.

"……내 결정이 냉정하다고 생각하지?"

<아뇨.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

알리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비난이 돌아올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가제프의 표정은 차분했다.

<계획을 완성하는 건, 각자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을 때 가능한 법이니까요. 저희는 각자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

<저희가 대공 전하를 신뢰하고 있는 만큼, 대공 전하께서도 저희를 신뢰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 믿음을 저버리면 안 되는 것이죠.>

가제프는 보란 듯 허리춤에 찬 검을 내보였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카벨레누스가 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클라우드 경이 나보다 강하네."

<아무래도 실무경험은 제 쪽이 많으니까요.>

"나보다 클라우드 경이 계획을 주도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안타깝지만, 저는 그 부분에서만큼은 동의할 순 없군요. 이번 계획이 완성될 수 있었던 건, 전하와 로아킨의 소맹주 덕분이었으니까요.>

가제프는 싱긋 웃었다. 알리시아는 그를 따라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제 곧 약속한 시간이 돼. 잊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할 일이 남아 있는 한,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승패를 운운하며 쓰러져 있기에는 아직 너무도 일렀다. 알리시아는 도로 턱을 꼿꼿하게 세웠다.

"군대를 움직여.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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