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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34)화 (134/164)

134화. 맞잡은 손

202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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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고?]

"대신관의 상태를 보니 대충 예상이 갔거든."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실험을 겪은 자들은 보통 사람보다 몸의 회복력이 빨라지지만, 헤르만처럼 빠르게 상처가 회복되는 경우는 없었다. 자신보다 헤르만 쪽이 고위 실험체일 것이었다.

[고작 그게 다인가?]

"대신관의 이야기를 들으니 의구심이 들기도 했고."

황실과 신전은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헤르만이 굳이 신전을 증오하던 선황제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헤르만은 오히려 선황제의 실험을 지원했고, 나름의 성과까지 만들어주었다.

"내가 아는 대신관은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아. 그리고, 그자가 하는 모든 일에는 항상 이유가 있지."

[그래서 그대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성공이겠지."

카벨레누스는 무의식적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더는 상처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송곳니가 박혀 들어가던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성공?]

"실험에 성공하면, 남은 건 정리뿐이잖나. 이왕 정리하는 김에 모든 실험의 죄악을 황실에게 떠넘기고 정리할 셈이었겠지."

[…….]

"자신이 성공작이 아니라, 실패작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자신이 훨씬 더 고위 실험체라면, 굳이 카벨레누스를 노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헤르만은 카벨레누스를 계속해서 눈여겨보고 있었고 욕심냈다.

"오랫동안 해온 실험이었고, 발 빼는 걸 좋아하던 그 늙은이가 자신에게까지 실험을 시도할 정도였다면 꽤나 자신이 있었을 거야. 죽지 않고 회복되는 완벽한 몸까지 손에 넣었으니 그럴만도 하지."

[…….]

"그런데, 막상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함을 느꼈을 거야. 그 늙은이는 신의 힘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 아니었을 테니까."

모든 마물이 자신해 알리시아에게 몸을 굽혔던 것과 달리, 헤르만은 억지로 힘을 사용해 복종시키려고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알리시아와 헤르만,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월등한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알리시아조차 감당하지 못했던 힘을 헤르만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거기까지 혼자서 도달하다니, 멍청이는 아닌가보군.]

"그 모든 것을 묵인하고 지켜보고만 있었던 멍청이와는 달라서."

[그간의 일들은 내 뜻이 아니었다.]

"그딴 말 하나로 모두 없었던 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카벨레누스가 짧게 조소했다.

[내겐 더는 힘이 없다.]

"신이라 불리는 자가 할 말은 아니군."

[인간들이 나를 신으로 만들 뿐, 나는 진짜가 아니다. 그대라면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내가 아는 건, 평범한 여자 하나뿐이야."

[평범?]

프라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센 눈보라가 쳤다. 몸이 비틀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은 눈을 뜰 수조차 없었고,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카벨레누스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자리를 지켰다.

[이런 힘조차 나의 신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데, 어떻게 감히 평범하다는 소리를 입에 담을 수 있을까.]

"그깟 힘이 대단한가?"

[뭐라고?]

"신의 힘이 필요하다면 가져가도록 해. 그대가 사랑하는 신은 오래전에 사라진 지 오래니까."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를 악 문 사내의 두 눈에서는 독기마저 느껴졌다.

[신의 힘이 필요하지 않다면, 어째서 날 찾아온 거지?]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살려? 고작 인간 따위가 위대한 존재를?]

"말했잖나. 내가 아는 건 평범한 여자 한 명뿐이라고."

[평범한 여자라…….]

낮아진 목소리에 카벨레누스의 눈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시선이 또렷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그게 정답이었는지 모르겠군.]

"……."

서서히 잦아드는 눈보라에도 카벨레누스의 시선은 한곳에 꽂혀 있었다. 어느샌가 그곳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취미가 고약하군."

[그대의 생각을 조금 읽어봤지. 이편이 그대의 마음에 들 것 같아서 말이야.]

"오히려 불쾌하기만 한데."

카벨레누스는 불만을 감추지 않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검은 머리와 황금색 눈동자를 제외하면, 프라임은 완벽하게 알리시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나의 신은 이렇게 생겼군.]

프라임은 연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자신의 모습을 살폈고, 카벨레누스는 그 모습을 보며 더욱 얼굴을 구겼다.

"그대의 신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

[나는 나의 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다.]

프라임이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알아볼 수 있으면, 왜 지금껏 숨죽이고 있었던 거지?"

[그건…….]

"대단한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그리 강해 보이지도 않고."

[…….]

빙글빙글 돌던 프라임이 그대로 멈췄다. 카벨레누스는 얌전해진 프라임을 내려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자에게 권능을 빼앗겼다.]

"권능?"

[인간들이 나를 속였다.]

프라임의 양어깨가 축 처지자, 카벨레누스의 표정도 다소 누그러졌다. 거슬리긴 해도 어쨌든 지금 프라임은 알리시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간들에게 속았다는 게 무슨 뜻이지?"

[그대도 슬슬 눈치채지 않았나? 대신관의 심장이 누구의 것인지.]

프라임은 손끝으로 가슴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환상 속임에도 자신에게선 심장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신이 사라진 후, 오랫동안 신을 되돌릴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신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음, 그러니까…….]

프라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손안에서 민들레 한 송이를 피워냈다.

[원래 신이 이 민들레꽃이라면, 사라진 신은 민들레의 홀씨다. 힘은 존재하지만, 그게 뿔뿔이 흩어져 원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거다.]

"……."

[힘을 모으면 신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힘을 모아도 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손안의 민들레 홀씨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프라임은 점점 멀어져가는 홀씨들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에 잡힌 홀씨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절망하던 내게 인간이 거래를 제안했다. 내가 힘을 보탠다면 신이 쓸 육체를 새롭게 만들어주겠다고 말이다.]

"……."

[나는 인간을 싫어했다. 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은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나의 신이 너무도 그리웠고, 나의 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아깝지 않았다. 뭐든 다 내줄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내 목숨일지라도. 프라임의 눈빛은 여전히 열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짐승은 신을 사랑하는 방법만 알 뿐, 신을 잊는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내게서 많은 것을 받아간 인간들은 변했다. 더는 나의 신을 되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신을 되살릴 생각이 없었다면, 왜 신의 그릇을 만드는 실험을 계속해왔던 거지?"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함이었지.]

프라임은 치미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온갖 일들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지금껏 일어난 일들을 보며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신은 사라졌고, 내 동료들은 약속에 묶여버렸으며, 나는 무기력하게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봐야만 했으니까.]

"……."

[그런데 말이다. 그들도 알지 못한 게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도,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지.]

프라임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눈을 떴다. 반짝이는 두 눈은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의 신이 나타났다.]

"나타나?"

[처음에는 아주 미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힘이 모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나는 아주 오랫동안 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신의 흔적을 가진 그대가 왔지. 드디어 모든 것을 끝낼 시간이 온 거다.]

프라임은 카벨레누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에는 미처 날아가지 못한 민들레 홀씨가 올려져 있었다.

[자아, 어서 원하는 걸 말해라. 오만한 인간. 그대가 신의 뜻을 받드는 자라면 나는 기꺼이 그대의 바람을 이뤄줄 테니.]

"내가 바라는 건 하나뿐이다."

[나의 신을 살리는 것?]

다 안다는 듯 프라임이 씨익 웃었다. 카벨레누스는 삐딱하게 고개를 세웠다.

"분명 그대의 신이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모습은 달라도 나의 신이다.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양측의 시선은 어느 쪽이든 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같은 신의 종끼리 너무하는군.]

"나는 신의 종이 아니다."

[…….]

"……."

[후우, 진짜 지독하구나. 오만한 인간.]

프라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의 사내는 보통 놈이 아니었다.

"허튼소리는 그만하고, 방도나 말해."

[방도? 그런 건 없다.]

"방금 방도가 없다고 했나?"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애당초 그릇은 다른 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카벨레누스는 프라임을 가만히 응시했다. 올곧은 눈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쓸데없는 걸음을 했군."

도움을 얻을 수 없다면 더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카벨레누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몸을 돌렸다.

[설마, 이해하지 못한 건가?]

재빨리 뛰어 온 프라임이 카벨레누스의 앞을 막아섰다.

"방도가 없다는데 무슨 이해가 필요하지?"

[다른 이가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라는 건, 본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이렇게 사서 고생하진 않았겠지."

카벨레누스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프라임은 집요했다. 그는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쫓으며 기어코 카벨레누스가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그녀는 뭐든 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은 것뿐이다.]

"……."

[잘 생각해봐라. 그녀가 가진 힘이 어떤 것인지.]

프라임이 가볍게 자신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그는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나의 신을 가지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그녀의 구원자는 우리가 아니다, 아니. 누구도 구원자가 될 수 없다. 도움을 줄 수 있어도 결국 자신이 마음먹지 못하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어색한 말투는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눈은 속일 수 없었다. 가라앉은 프라임의 두 눈은 오래된 자의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도울 순 없지만, 그대를 도울 순 있다.]

"나를 돕는다고?"

[그대에겐 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지 않나.]

"권능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대신관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방도 정도는 알고 있지.]

프라임은 손을 뻗어 카벨레누스의 손을 잡았다. 카벨레누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그의 손을 쳐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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