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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33)화 (133/164)
  • 133화. 속고 속이는

    2021.06.10.

    "말을 잘 하는군."

    "죄송합니다. 각하 앞에서 별 모습을 다 보여드리는군요."

    "내게 죄송할 일은 아니지. 솔직히 나도 조금은 통쾌했거든."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로아킨은 황제에게 쌓인 게 많아서 말입니다. 내심 이번 역할을 맡게 되어서 좋았지요."

    펜리르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팔찌를 멜타 공작에게 내밀었다. 멜타 공작은 팔찌를 받아 손목에 팔찌를 꼈다.

    "저는 이제 바빠질 테니, 각하께서 맡아주시지요."

    "단순히 맡기는 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어깨가 무거워지는군."

    "많이 힘드실 겁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지."

    내가 오래전에 해야 했던 일이기도 했고. 멜타 공작은 팔찌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팔찌를 끼고 있다는 건, 제르페누스에게 자신이 카벨레누스의 편을 들겠노라고 대놓고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황실에 반기를 든다는 거부감보다는 이제라도 뭔가 한다는 사실에 기꺼웠다.

    "……로아킨의 소맹주, 그대에게도 후회하는 일이 있나?"

    "없을 리가요. 사람이라면 다들 후회하고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특히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상해서 별거 아닌 순간이 가슴 속에 파편처럼 콱 박혀서 빠지지 않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펜리르는 웃으면서 후드를 뒤집어썼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별거 아닌 게 아니라, 특별해서 잊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지. 사람마다 특별하게 여기는 것이 전부 다르니까 말이야."

    "각하께서 특별하게 여긴 건 무엇이었습니까?"

    "내 딸이었지. 그 시절엔 몰랐지만."

    "따님이라고 하시면……."

    펜리르는 슬쩍 입을 다물었다. 멜타 공작의 딸이 제국의 선대 황후였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예쁜 아이였어. 그렇게 일찍 떠났다는 걸 믿기 어려울 만큼."

    "……."

    "그래서, 그 아이가 참 밉게만 느껴졌던 것 같아.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빤히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

    멜타 공작은 이마를 짚은 채, 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나도 늙었나 보군. 이런 소리를 잘도 하는 걸 보면 말이야."

    "미리 말씀드리지만, 각하께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저는 대공 전하께 아무런 이야기도 전해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대는 눈치가 빠르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직접 하셔야죠. 그리고, 무엇보다 저희가 짠 계획은 각하의 도움을 받는 것이지, 무의미한 희생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요."

    "……."

    "그리고, 미카엘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으셨습니까?"

    증손자를 보시려면 오래 사셔야죠. 펜리르는 피식 웃고는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멜타 공작은 가만히 펜리르가 사라진 길을 보고 있다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하늘은 푸르렀다. * * * 방 안에는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맴돌았다. 헤르만은 천천히 걸어와 들고 있던 등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신전의 지하 통로보다 더 깊숙한 곳, 프라임 교단이 창설된 그날부터 존재했던 공간은 대신관들에게 대물림되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건 아닌 것 같군요."

    헤르만은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의 시선 끝에는 사슬에 묶인 사내가 있었다.

    "신의 대리자를 공격한 것에 이어서, 슈바르한의 군대라…… 이렇게 갇혀 지내고 계시면서도 많은 일을 하셨더군요. 참 대단하십니다."

    "……."

    "솔직히 전하께서 먼저 도발을 해오실 거라곤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미래를 본다는 대신관께서 그 정도도 예측 못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아직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걸 보니, 아직도 기운이 남아 있으신가 봅니다."

    헤르만이 싱긋 웃으며 길게 늘어진 턱수염을 매만졌다. 손발이 전부 묶여 꼼짝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도무지 꺾일 줄 모르는 시선이 퍽 매력적이었다.

    "괴로우실 법도 한데, 확실히 전하의 몸이 튼튼하긴 한가 봅니다. 여러모로 지금껏 봐왔던 다른 실패작들과는 다른 느낌이랄까요."

    "그러는 그대도 실패작 아닌가."

    "……."

    "피를 보니 알겠더군. 그대의 피에는 마물과 같은 냄새가 나."

    "……."

    "무엇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심장이 꿰뚫려놓고도 그렇게 멀쩡할 수 없거든."

    카벨레누스는 혐오를 감추지 않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수도 없이 베고, 또 벴지만 헤르만은 죽지 않았다. 뚫린 가슴은 금세 재생되어 흉터 하나 남기지 않았고, 그의 팔을 잘라도 이내 다시 붙었다. 대신관은 보통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재생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렴, 제가 맨몸으로 전하와 싸우려고요."

    "스스로가 괴물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가?"

    "괴물이 아니라,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 해두지요."

    "신의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그대의 탐욕-."

    퍽! 헤르만의 발이 일순간 카벨레누스의 복부를 걷어찼다.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으시는군요."

    "아파야 아프다고 하지."

    "오만도 하셔라.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지금 본인이 처한 상황을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헤르만은 느긋하게 신발코를 바닥에 비볐다. 이를 악물고 노려보는 카벨레누스과 달리, 반질거리는 헤르만의 구두에는 피 얼룩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저는 불필요한 피를 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말 돌리지 마세요. 제 의도가 무엇인지 전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헤르만이 다정하게 카벨레누스의 뺨을 매만졌다. 노신관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흰 눈썹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탐욕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그대 뜻에 순순히 따를 것 같나?"

    "어차피 족쇄가 있는 한, 전하께서는 제게 이길 수 없지 않습니까."

    "……."

    "이길 수 없다면, 다른 방도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방도가 그대의 개가 되는 거라면 차라리 죽고 말지."

    카벨레누스는 입안에 고인 핏물을 거칠게 뱉었다. 포로로 잡힌 와중에도 사내의 입가에는 조롱 어린 미소가 가득했다.

    "역시, 말로는 안 되겠군요. 다소 이르지만, 다음 실험을 준비할 수밖에요."

    헤르만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 실험이라고?"

    "전하께서는 훌륭한 몸을 가지고 계시나, 아무래도 신의 그릇으로선 부족하시니까요. 몸을 좀 더 단단하게 만들 필요가 있지요."

    물론, 그 전에 족쇄부터 새로이 새겨야겠지만요. 헤르만의 검지가 툭툭 카벨레누스의 목덜미를 건드렸다. 자신이 족쇄를 시전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카벨레누스가 강한 탓인지 족쇄의 힘이 너무 약했다. 특별한 족쇄로 새로 채워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전하께서 이제라도 제 뜻에 따라주신다고 맹세만 해주신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전하께서는 그러시지 않으시겠죠."

    "불필요한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진 않군."

    "할 말이 있다면 미리 말해주세요. 이번에 걸 족쇄는 선황제 폐하가 만든 어설픈 물건과는 차원이 다르니 말입니다."

    "……."

    "네. 마음껏 그런 눈을 하십시오. 곧 전하께서는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게 되실 테니까요."

    지하에 가둬놓은 실험체처럼 카벨레누스도 이성 없는 멍청이로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반항이 심하니 할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지금껏 지켜봐온 실험체 중 신의 그릇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헤르만은 끼고 있던 반지를 천천히 뺐다.

    "……그대는 내 생각보다 더 끔찍한 괴물이었군."

    카벨레누스는 점점 모양이 일그러지는 헤르만의 팔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모습이 바뀌고 있는 건, 헤르만의 팔만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그의 얼굴은 짐승의 것처럼 길게 튀어나왔고, 온몸을 북슬북슬한 털이 덮었으며, 손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위협적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가 아는 끔찍한 괴물, 마물이었다.

    "족쇄라는 건, 사실 우두머리에게 복종하는 마물의 습성을 약하게 만든 것이었지요. 마물은 본능적으로 강한 자를 알아보고 따르는 습성이 있거든요."

    "……."

    "그렇다면 힘을 약하게 만든 족쇄가 아니라, 진짜로 제게 복종하게 만들면 어떻게 될까요?"

    헤르만, 아니 한때 헤르만이었던 짐승이 웃었다. 원래의 색을 잃은 채 샛노랗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광기가 뒤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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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헤르만은 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카벨레누스를 내려다봤다. 살점이 뜯겨 나갈 정도로 깊숙하게 물린 카벨레누스의 목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실험을 거치지 않은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죽었을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특별했다. 죽음에 가까운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면 칠수록 강제적으로 주입된 마물의 피가 몸을 변화시키고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것이었다.

    "약속해드리지요. 전하께서 깨어나시면 많은 것이 달라져 계실 겁니다."

    헤르만은 애정 어린 손길로 카벨레누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 * *

    "……."

    카벨레누스는 아무런 말없이 주변을 살폈다. 어쩐 일인지 보이는 풍경이 달라져 있을뿐더러, 그의 손발을 묶었던 사슬도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오히려 끝없이 펼쳐진 설원뿐이었다.

    [함정에 빠진 모양이구나, 어리석은 인간아.]

    "……여긴 어디지?"

    [그걸 묻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나?]

    "그대 정체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카벨레누스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어디서 목소리가 나는지는 알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목소리에 호기심이 서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카벨레누스는 별 반응 없이 시큰둥하게 허공을 바라봤다.

    "프라임이겠지."

    […….]

    "긴말하고 싶지 않으니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

    [그대는 오만하구나.]

    "적에게 호의를 베풀 정도로 친절하진 못해서."

    카벨레누스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가를 반복했다. 이유는 모르나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 정도 몸 상태라면 일방적으로 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내가 적이라고 생각하나?]

    "그럼 아닌가?"

    [나는 신의 종이다.]

    "역겨운 소리를 잘도 하는군."

    [한낱 인간 따위가 괘씸하구나.]

    노기 섞인 목소리가 윙윙 울려 퍼졌다. 위협을 위한 의도였지만 정작 카벨레누스는 별 감흥이 없을 뿐이었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프라임 쪽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곳에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럴 리가."

    [그런데 왜 그렇게 태연한 거지?]

    "이런 곳에 올지는 몰랐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것 같았을 뿐이야."

    헤르만의 말대로 족쇄에 저항하면 할수록 그에 따른 대가가 찾아왔다. 하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족쇄에 저항한 반동은 괴로웠지만, 예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족쇄의 시전자였던 선황제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로 제르페누스에게 손끝 하나도 댈 수 없었던 것과 달랐다. 헤르만이 족쇄를 사용해 억압하려 해도 고통만 참아내면 저항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위험을 감수할 만했다. 헤르만이 아무리 베어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한발 물러서 순순히 몸을 내줄 생각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헤르만의 방식은 이미 익숙했다. 자신이 잡혔을 때,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는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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