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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32)화 (132/164)
  • 132화. 쥐가 고양이를 물었을 때

    2021.06.07.

    "군대의 상황은 어떻지?"

    "성벽을 둘러싼 채, 꿈쩍도 안 하고 있습니다."

    "병사들을 끌고 와선 그냥 벽만 보고 있다는 소리인가?"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현재로선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군."

    제르페누스는 다리를 꼰 채, 미간을 찡그렸다. 카벨레누스라면 훤히 속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보이는 행동들은 무엇 하나 그답지 않았다.

    "저희를 압박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도발해서 먼저 움직이게 하려는 거라고?"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니면, 여론을 움직일 생각일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나보다 내 아우님 쪽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으니 말이야."

    제르페누스가 비아냥거리며 턱을 괬다. 압도적일 정도로 강한 힘은 사람을 홀렸다. 사람들은 언제나 카벨레누스를 두려워하면서도 칭송했다.

    "그럼, 신전 쪽은?"

    "여전히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다들 엉덩이가 무거운 모양이야. 짜증 나게도 말이지."

    제르페누스는 얄궂게 입술을 이죽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벨레누스와 헤르만, 어느 한쪽 세력만 움직여도 신경이 쓰이는데 둘 다 한꺼번에 움직이니, 이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신의 대리자는 어떻게 되었지?"

    "깨어나서 회복 중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치명상인 터라,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당장 끌고 와."

    "네?"

    "뭐가 예쁘다고 귀빈 대접을 해주지?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 당장 끌고 오도록 해."

    제르페누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자, 단숨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늘 웃고 있다고 해서 황제의 기분까지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이제는 황궁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살얼음과도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제르페누스의 의견에 반박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 * * 거칠게 던져진 몸이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제임스는 충격에 가쁜 숨을 내쉬며 힘겹게 바닥을 짚었지만 몸을 일으키진 못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시야가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미처 회복되지 않은 몸은 제대로 가누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우스꽝스럽게 비칠 모습을 걱정할 시간은 없었다. 어떤 칼보다 무섭게 빛나는 두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지냈나, 신의 대리자님."

    제르페누스가 웃었다. 모순적이게도 흉흉하게 빛나는 녹색 눈은 어느 때보다 그가 혐오하는 로아킨의 상징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사, 살려…… 커억!"

    제르페누스의 손짓 하나에 몽둥이가 휘둘러졌다. 제르페누스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제임스를 보며 턱을 추켜세웠다. 고작 화가 하나 죽인다고 해서 저조한 기분이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벌레처럼 납작 엎드린 채 떠는 모습을 보니 약간이나마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날 이딴 꼴로 만들고 살려달라는 말이 나오나?"

    제르페누스의 발이 한 걸음 움직였고, 동시에 제임스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느 쪽이 우세한 입장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더러워. 솔직히 지금 같아선 이깟 몽둥이가 아니라, 검을 뽑아서 네놈의 머리를 그대로 날려버리고 싶을 정도야."

    "……."

    "하지만 나는 네놈을 살려놨어. 왜인 줄 아나?"

    "그, 그건……."

    제임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제르페누스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미리 말해두지. 나는 이제 두 번 이상은 말하지 않을 거야. 그런 일이 생기면, 네 뒤에 있는 내 부하들이 네놈의 목을 그대로 잘라버릴 거거든."

    "……."

    "어때? 이제 좀 뭐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

    "대답."

    "네, 네!"

    다급하게 튀어나온 대답에 제르페누스는 싱긋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좋아. 어디 한 번 내 앞에서 네놈의 가치를 증명해봐. 그 증명이 마음에 든다면, 네 목숨 하나 정도는 용서해줄 테니 말이야."

    "그, 그것이……."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제르페누스의 시선을 피했다.

    "물론, 할 말이 없다면 할 수 없고."

    제르페누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며 도로 제임스 쪽으로 걸어왔다.

    "괴, 괴물입니다!"

    "괴물?"

    "슈바르한 대공의 아이 말입니다! 태어날 적에 짐승으로 태어났습니다!"

    "고작 그건가?"

    "……네?"

    "그 정도 정보는 나도 알고 있어. 그 아이를 받은 산파를 알고 있거든."

    제르페누스가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차자, 제임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고작 이 정도로는 살 수 없었다. 다른 정보가 더 필요했다.

    "다른 건 없나?"

    "그, 그럼 소원의 힘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소원의 힘?"

    "그 괴물 아이 말입니다. 그 아이에게는 소원을 이루는 힘이 있습니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제르페누스는 대놓고 조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원의 힘 같은 게 있다면 벌써 모든 싸움이 카벨레누스의 승리로 끝이 났을 것이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그 아이에겐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카벨레누스는 그 힘을 쓰지 않았지?"

    "힘의 대가가 수명이니까요."

    "수명?"

    "네, 네! 그래서 쓰지 못하는 겁니다!"

    제임스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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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말이 섞이긴 했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아니었다. 진짜로 힘을 갖고 있는 쪽은 알리시아였지만 그녀를 희생할 순 없었다. 희생해야 한다면 당연히 괴물의 피를 이어받은 미카엘이어야만 했다.

    "소원을 이루는 힘은 조금 매력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역시 그걸로도 부족하군. 그 힘이 진짜 있는지, 아니면 네놈이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잖나."

    "그, 그럴 수가……."

    "살고 싶다면 더 절실하게 굴어봐. 내가 믿을 만한 거로 말이야."

    큰 선심이라도 쓰듯 제르페누스가 손을 펼쳤다. 제임스는 곱게 자란 귀족답게 부드러워 보이는 손을 바라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살기 위해선 뭐라도 떠올려야만 했다.

    "제, 제가 가지고 있던 팔찌!"

    "팔찌?"

    "그, 그게 로아킨인들의 통신 수단입니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죽박죽 섞여서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자신은 죽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서든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통신 수단?"

    "특수한 주술이 걸려 있어서 먼 거리에서도 음성을 전달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야만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물론 제국에서 쓰이는 통신구나, 통신거울 같은 도구들보단 못합니다!"

    "못하다고? 그럴 리가."

    제르페누스가 헛숨을 뱉었다. 지금껏 누구도 그렇게 작은 통신기구를 만들지 못했다. 영상을 띄울 수 없다는 단점만 제외하면 오히려 기존의 기술보다 팔찌 쪽이 더 뛰어났다. 휴대성이 뛰어나다는 건 어디에서나 쓸 수 있다는 소리였다.

    "네놈의 정체는 결국 카벨레누스의 수였군."

    "……네?"

    "놀라는 걸 보니 네놈도 몰랐던 건가?"

    "저는 분명 로아킨의 사내에게……."

    "그 사내놈 뒤에는 결국 카벨레누스가 있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로아킨, 그 야만인들의 능력으로는 그런 물건은 못 만들거든."

    "그, 그럼……."

    제임스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입술은 새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제르페누스에게는 그런 것까지 챙겨줄 배려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제임스의 등 뒤에서 검을 겨누고 있던 부하를 향해 짧은 명령을 내렸을 뿐이었다.

    "지금 당장 팔찌를 가져와."

    * * *

    "너무 늦게 알아버리셨군요, 폐하."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아니군. 네놈은 누구지?>

    "제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는 걸요."

    펜리르는 창문에 기댄 채 이마 위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토록 오랫동안 로아킨을 괴롭혀오던 황제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멀쩡하게 들려 기분이 묘했다.

    <로아킨인가?>

    "그냥 로아킨이 아니라, 로아킨의 차기 맹주입니다."

    <로아킨의 차기 맹주?>

    "지금껏 폐하께서 저지른 일을 심판하러 온 자랄까요."

    펜리르의 검지가 슬쩍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스쳤다. 나름 꽤 많은 전쟁을 치러왔다고 자부해도 여전히 싸우기 전에는 가슴이 떨렸다.

    <야만인 따위가 날 심판하겠다고?>

    "그런 표현은 삼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로아킨이 야만인이라면, 그 야만인의 피를 물려받은 폐하께서도 똑같은 야만인일 테니까요."

    <누가 더러운 피를 이어받았다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노기에 찬 목소리만 들어도 황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빤히 보였다. 펜리르는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빠르게 심호흡을 했다.

    "때론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하고 싶은 일이 있죠. 저도 최근에 그런 일을 겪어봐서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야만인 따위가 날 가르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가르친다고 되는 상대라면 이렇게까지 골치 아프지 않았겠지요."

    <뭐라고?>

    "자자,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천천히 이야기나 나눠보지요. 그러려고 연락한 게 아니십니까."

    펜리르는 연신 경쾌한 어조로 재잘거렸지만, 정작 말을 쏟아내는 사내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있기만 했다. 황제가 품은 혐오가 얼마나 많은 동족을 죽었는지, 로아킨의 소맹주인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네놈 따위와 대화할 생각은 없다.>

    "그럼 왜 손수 연락을 주셨을까요."

    <네놈과는 할 말이 없으니 카벨레누스를 불러.>

    "슈바르한 대공은 폐하의 동생이시니, 그분이 어디 계신지는 저 말고 폐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죠."

    <네놈과 카벨레누스가 손을 잡았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나?>

    "하긴, 지금까지 그 사실을 모르시면 싸울 맛도 나지 않겠지요.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모든 일의 주범은 대공 전하가 아니라, 저라는 것을요."

    순간 펜리르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고작 말뿐이었지만, 황제 앞에서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이런. 조금 전까지 저와는 할 말이 없으시다고 하시더니 바로 입장이 달라지셨군요."

    <네놈-.>

    "펜리르입니다."

    제르페누스의 말을 잽싸게 빼앗은 펜리르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제 이름은 펜리르 로아킨. 로아킨의 차기 맹주이자, 앞으로 폐하의 머릿속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줄 사람이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말이 되었기에 폐하께서 지금 저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뭐라고?>

    "정 믿기 힘드시면 안 믿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전하께서 믿지 않으셔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기 마련이거든요."

    <날 협박하려는 건가? 고작 로아킨 따위-.>

    "협박이 아니라, 예고입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아니겠습니까. 펜리르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팔찌를 빼 통신을 꺼버렸다. 그는 어떤 식으로 해야 황제가 약이 잔뜩 오를지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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