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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31)화 (131/164)

131화. 다음 계획

2021.06.03.

"신의 대리자의 상태는."

"강한 독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범인은 찾았나?"

"그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터라……."

쨍그랑-! 깨진 잔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르페누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이마 위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간 올려놨던 평판이 이번 사건으로 한순간에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렸다. 벌써 저잣거리에는 황제가 가짜 신의 대리자를 만들었다는 둥, 신전이 문을 닫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둥 별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었다.

"이딴 수를 쓰다니, 아무래도 내가 너무 우습게 보였나보군."

제르페누스가 거친 숨을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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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당하기만 할 순 없었다.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떠올려야 했다.

"처음으로 사람을 공격했다는 병사도 못 찾았나?"

"솔직히 지금으로선 그자가 정말로 존재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병사들이 공격했다는 말이 나오자, 관중들이 흥분해서……."

모든 것은 정말로 한순간에 일어났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시간은 없었고, 잘 마른 짚더미에 떨어진 불씨처럼 온갖 불신과 불안, 두려움이 사람들을 침식해나갔다. 몰아치는 해일에 쓸려나가듯,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순간의 분위기에 휩쓸려버렸다.

"신의 대리자, 아니. 그 화가 새끼를 죽여야겠다."

"하, 하지만 그는……."

"운 좋게 화살이 빗나가 치명상을 피할 순 있어. 그런데, 하필 죽지 않을 정도의 독을 발라두었을까?"

"이번 일을 벌인 자와 대리자, 아니 화가가 공범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럴 확률이 높지 않겠어? 우연이 자꾸 겹치면 필연이 되는 거니 말이야."

필연 같은 말은 믿지도 않으면서 제르페누스는 잘도 이죽거렸다. 차라리 죽여버릴 것이지, 일부러 보란 듯이 제임스를 살려놨다는 점이 더욱 그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계획의 수동자는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런 사건이 있었으니, 그 화가 놈이 죽었다 해도 의심하는 자는 없을 거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아니. 잠깐."

"네? 왜 그러십니까?"

제르페누스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좁혔다. 만약, 상대가 원하는 반응이 이런 것이라면 자신은 영락없이 꾐에 빠진 꼴이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서든 살려놓으면 내놓을 순 있지만, 죽여버리면 정말로 끝이니까.

"그놈을 죽이는 건 일단 보류해. 일단 살리고……."

제르페누스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팍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끝이 없었다. 놈의 꿍꿍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을 하면 할수록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말로 짜증 나는군. 어떤 놈인진 몰라도 아주 괘씸해."

의심되는 범인은 둘이었으나, 어느 쪽도 확증을 할 수 없어서 더 짜증이 났다. 사람과 소문을 이용하는 건 헤르만의 방식이었지만, 그는 대놓고 드러내기보다는 은밀한 방식을 선호했다. 헤르만이 범인이었다면 당연히 그는 제임스를 몰래 암살하고, 제르페누스가 신의 대리자를 죽였다고 소문을 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벨레누스의 것도 아니었다. 카벨레누스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고 악명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카벨레누스가 범인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제임스의 목을 베고 그가 가짜임을 공표하며 군중을 압도했을 것이었다.

"……일단 범인을 만들어."

제르페누스는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도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범인을 찾는 것만큼이나 상황을 무마하는 것도 중요했다.

"가짜 범인을 만들라는 겁니까?"

"적당한 놈들을 추려서 그에 따른 죄목을 만들어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을 하는 거지."

"사람들이 믿을까요?"

"믿고, 안 믿고 간에 일단 세워. 지금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보여주기식이라도 보여주는 게 나아."

소문을 잠재우는 건 불가능해도 이대로 침묵하면 긍정의 뜻으로 해석될 것이었다. 신속하게 움직여서 조금이라도 반감을 줄여야 했다.

"그 문제로 별개로 신전과 카벨레누스, 양쪽 다 지금처럼 주시하고."

"네, 알겠습니다."

"혹시 다른 세력이 끼어들었는지도 확인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방식은 둘이 시도할 법한 방식이 아니니 말이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르페누스는 쌓인 보고서를 빠르게 넘기며 다음 명령을 골랐다. 결함 있는 황제는 언제나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인다. 상황을 분석하고 대처하는 것에 능숙할 수밖에 없었다. 짜증이 나도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다. 거기에 골칫덩어리가 하나 더 추가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폐, 폐하, 큰일 났습니다!"

"또, 무슨 일이지?"

"군대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군대가 갑자기 나타나다니, 무슨 소리지?"

보고서가 바닥에 흩어졌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못했다. 싸늘하게 식은 제르페누스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희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분명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이 움직이면 티가 났을 텐데……."

급히 고개를 숙인 수하에 제르페누스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답지 않게 잔뜩 힘이 들어간 발걸음이었다.

"그럼 누구의 군대인지는 확인했나?"

"슈바르한의 군대입니다."

"카벨레누스가 직접 군대를 끌고 왔다는 건가?"

"선봉장이 누구인지는 지금으로선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그들이 검은 갑옷을 입었다는 겁니다."

검은 갑옷은 카벨레누스가 이끄는 군대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까지 와 있지?"

"수도 경계 지역입니다."

"경계면 이곳까지 만 하루도 안 되어서 도착하겠군."

수도 경계 지역에서 슈바르한까지는 꼬박 2주가 넘게 걸렸다. 대규모의 군대가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내 예상보다 카벨레누스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가."

"아무리 대공께서 대단하다 하셔도 이토록 조용하게 진군해오실 순 없습니다. 애당초 슈바르한에서 수도까지 오기 위해선 다섯 관문을 지나야 하지 않습니까. 문제가 생겼다면 관문의 군대에서 연락이 왔을 겁니다."

"연락이 오지 않았는데, 군대는 코앞까지 와 있다?"

제르페누스가 대놓고 비아냥거리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모순적인 말이었지만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모순은 이미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그것은……."

"내 밑에 쥐새끼라도 심어놓지 않고서야 그건 불가능하지."

"그렇게 되면, 다섯 관문에 모두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가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배신자가 바글거린다 해도 이렇게까지 조용할 수 없어. 작정하고 숨지 않는 이상, 군대는 움직이면 티가 나기 마련이거든."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 아우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신 걸까."

제르페누스는 턱을 괬다. 여러 가정을 해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당초 검은 갑옷을 입었다는 건, 존재를 숨길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저희 측에서도 병사를 모아야 할까요?"

"그 일을 벌이고 지금 병사를 모으면 황제가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한다고 수군거릴 거다."

"그렇다고 적이 오는데 빤히 지켜만 볼 순 없지 않습니까. 일단 저희 측에서도 군대를 조직하여-."

"군대를 조직하면 이길 수나 있나?"

"네?"

눈을 땡그랗게 뜬 부하와 달리, 제르페누스는 입매를 비틀었다. 자신과 카벨레누스의 병력 수준이 차이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둘을 붙인다면, 자신 쪽이 꼼짝없이 당할 것이었다.

"일단은 얌전히 두고 봐. 상황을 보고 움직여도 충분해."

"그래도 되겠습니까?"

"군대를 움직였다고 해서 카벨레누스가 곧장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어.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 해도 황제를 건드리면 반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테니 말이야."

예전의 카벨레누스라면 반역자의 오명 정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에게는 지켜야 하는 게 있었다. 오명이 대물림된다는 걸 아는 이상, 몸을 사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물론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면 나도 움직여야겠지."

제르페누스는 손끝으로 천천히 삐뚤어진 입매를 매만졌다. 혹시라도 상황이 잘못된다 해도 자신에게는 쓸 수 있는 비장의 수가 남아 있었다. * * *

"왔구나."

[부탁대로 주변 살폈다.]

"상황은 어때?"

[다들 동요하고 있다.]

"아무래도 슬슬 카벨레누스의 부재를 눈치챘을 테니까."

알리시아는 펠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슈바르한의 귀족들은 카벨레누스를 충실하게 따라왔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게 오히려 독이었다. 카벨레누스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시일이 꽤나 흘렀고, 거기에 카벨레누스의 오른팔이었던 가제프가 군대를 몰고 출정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만큼 카벨레누스의 부재에 온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너무 카벨레누스에게만 치중되어 있어.'

알리시아는 검지로 톡톡 책상 테이블을 두드렸다. 가제프가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을 붙여주고 갔지만, 그들 역시 불안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카벨레누스는 완벽한 지배자였다. 지금껏 슈바르한을 발전시키고 이끌어온 그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그만큼 많은 것들이 그의 위주로 흐르고 있었다. 어디든 머리가 사라지면 티가 나는 법이겠지만 카벨레누스의 빈자리는 유독 컸다. 카벨레누스는 슈바르한, 그 자체였다. 그가 무너지면 이곳도 무너질 것이었다.

"카벨레누스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이 불안감은 계속될 거야. 그리고, 불안감이 커지면 그 틈을 노린 자들이 나타나겠지."

[걱정하지 마라. 이상한 점 있으면 바로 알려주겠다.]

"고마워. 너희가 없었으면, 정말로 힘들었을 거야."

슈바르한 내부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마물들은 최고의 조력자였다. 그들은 모습을 감춘 채, 끊임없이 슈바르한을 수색하며 알리시아를 위한 정보들을 물어왔다. 그들이 있는 한, 슈바르한이 뚫릴 일은 없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우린 그대 뜻을 따를 뿐이다.]

펠시는 알리시아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알리시아는 펠시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고는 눈을 감았다. 불안해도 참을 수 있는 건 미약하긴 해도 여전히 카벨레누스의 존재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윙- 윙-. 그때였다. 방 안에 있던 통신구가 울렸다. 알리시아는 서둘러 자리에 앉아 통신구를 켰다. 통신구를 키자마자, 화면에는 웃고 있는 펜리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떻게 되었죠?"

<지금까지는 완벽합니다. 지금쯤 황제는 머리가 터져나가고 있을 겁니다.>

"생각이 많은 만큼, 생각할 여지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이 꼬여버릴 수밖에 없겠죠."

<네. 맞습니다. 특히 황제처럼 누굴 쉽게 믿지 못하고, 의심부터 하는 자라면 더욱 그렇겠죠.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믿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자기가 가장 위에서 정세를 움직이는 걸 선호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해요. 지금보다 더 황제를 자극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다음 계획이 있는 것이죠.>

펜리르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쭉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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