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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30)화 (130/164)
  • 130화. 군중 속에서

    2021.05.31.

    와아아아-!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성에 제임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가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보고 환호할 때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저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내려다본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아버렸으니까.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자는 항상 이런 기분이었겠지.'

    제임스는 짐승 같던 사내를 떠올리며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예전에는 카벨레누스가 거만하다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를 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랐다면, 누구나 그렇게 오만방자한 모습이 되었을 것이었다.

    '만약, 내가 가짜가 아니라 진짜 신의 대리자였다면…… 아니 그 전에 귀족이었다면…….'

    고삐를 쥔 제임스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자신은 귀족을 증오한다고만 생각했지만, 귀족의 삶을 누리고서야 깨달았다. 귀족을 향한 자신의 시선에는 경멸이나, 증오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누이의 죽음은 욕망을 숨기기 좋은 핑계였을 뿐, 실은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그림이 인정받기 전까지 배곯아가며 단칸방에서 덜덜 떨어야 했던 순간도, 그림을 핑계로 당해야 했던 온갖 희롱도, 도둑으로 몰려 당해야 했던 매질도 전부 귀족이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으니까. 자신에게는 그림으로만 담을 수 있는 것들이 귀족들에게는 일상이라는 사실이었으니까. 제임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을 봐도 너는 아무런 감흥이 없을까.'

    제임스는 관중들 속 붉은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잊겠다고 다짐했지만 소용없었다. 화려한 파티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다가도 막상 방에 돌아오면 알리시아와 보냈던 시간이 그리워졌다. 바닥이 삐걱거리는 낡은 오두막은 초라하고 볼품없었지만, 그곳에는 알리시아가 있었다. 원래라면 자신은 쳐다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높은 신분이었던,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티를 내지 않았던 여자. 제임스는 애써 고개를 돌려 붉은 머리 여자를 외면했다. 지금은 여자 하나 때문에 상념에 젖어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제르페누스는 뜻대로 흐르지 않은 상황에 심술을 부리고 있었고, 구원자처럼 굴던 펜리르는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야 잘 지내고 있다지만, 앞으로 자신이 어떤 꼴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저 환호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는지…….'

    제임스는 초조하게 고삐 끈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성과 없이 돌아왔을 때, 제르페누스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을 지켜주는 건 신의 대리자라는 허울 좋은 핑계뿐이었다. 지금의 화려한 삶을 유지하고 싶다면, 가만히 있기보다는 무슨 수를 써야만 했다.

    '그 로아킨인이 약속을 지켜주면 좋겠지만, 상황에 따라 나도 살 궁리를 찾을 수밖에 없겠지.'

    제임스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이내 턱을 추켜세웠다. 자신이 가진 정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제르페누스가 흥미를 가질 만한 걸 알고 있었다. 신전과 황실, 모두가 노리고 있는 존재. 미카엘. 자신을 보며 해맑게 웃던 아이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미카엘에게는 잘난 친부가 있었고, 그 잘난 친부는 어울리지도 않게 제 새끼를 아끼는 모양새였으니까. 그 지독한 슈바르한 대공이라면 아이 하나쯤은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자가 미카엘을 지키지 못한다면…….'

    해선 안 되는 생각이지만, 한 번 떠오른 상상은 멈출 줄 몰랐다. 제임스는 혀를 내밀어 바싹 마르는 입술을 축였다. 알리시아는 미카엘을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 아이를 잃게 된다면, 자연스레 원망은 카벨레누스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미카엘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접점인 동시에, 그 둘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꿀꺽-.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상에 제임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돌이켜보면, 알리시아와 카벨레누스의 사이가 다시 이어진 것도 결국 미카엘 때문이었다. 아이만 사라진다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길 수 있었다. 사람은 외로워질수록 쉽게 마음을 주는 법이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는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보여주기식 행진이 끝나고 돌아가면, 제르페누스에게 미카엘의 비밀을 읊어줄 것이었다. 물론 그 전에 지긋지긋한 연극부터 끝내야겠지만. 제임스는 어느덧 도착한 신전 문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제르페누스는 큰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말했지만, 한참 올려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웅장한 문 앞에 서니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마치 보이지도 않는 신이 가짜라고 자신을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의 대리자님,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신전에 제가 왔다고 고하십시오. 제가 대신관을 뵈어야겠습니다."

    제임스는 보여주기식으로 적당히 예를 갖추며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선 관중의 호응이 필요했다. 하지만 제임스의 손짓 하나에도 터져나오는 열띤 호응과 달리, 굳게 닫힌 신전의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설마 신의 대리자께서 오셨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어. 잠시 문을 여는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그나저나 신전은 왜 갑자기 문을 닫은 거람? 저러면 시위라도 하는 것 같잖아."

    "무슨 시위?"

    "그게 여기서 말하기가 좀 그런데……."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제임스는 눈치껏 말에서 내렸다. 열리지 않는 문에 오히려 안심이 되어 더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임스가 굳게 닫힌 문에 손을 가져다가 댄 그 순간이었다.

    "왜……."

    등을 꿰뚫는 서늘한 감각에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떨궜다. 신성함을 강요하기 위해 입었던 새하얀 정복에 붉은 얼룩이 져 있었다. 그리고 그 얼룩의 중앙에는 날카로운 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제임스는 멍한 눈으로 제 가슴을 매만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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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제임스의 몸이 비틀거리며 기울어졌다.

    "대리자님!"

    곁에 있던 기사의 부축에 넘어지는 건 피했지만 통증마저 피할 순 없었다.

    "기습이다!"

    "신의 대리자님을 지켜라!"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도망치지 못하게 해!"

    정신 차린 병사들이 서둘러 흩어져 범인을 찾았다. 제임스는 고통 속,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살을 쥐려고 애썼다. 하지만 깊게 박힌 화살은 빼려고 해봤자 고통만 심해질 뿐이었다. 예전에 맞았던 화살과는 느낌이 달랐다. 관통된 부위가 불에 덴 양 너무 뜨거웠다.

    "화살에 독이 발라져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해야 합니다!"

    "……도, 독이라고?"

    제임스가 가쁜 숨을 들이켰다가 뱉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슈, 바르한, 대공, 이야……."

    "네?"

    "그, 자가 나, 나를……."

    제임스는 이를 악물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슈바르한 대공의 악행을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함께, 몸이 축 늘어질 뿐이었다. 그때였다. 모두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내질러졌다.

    "가짜가 죽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프라임이 우리와 함께한다!"

    "뭣들 하는 거야! 얼른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을 잡아!"

    병사들이 급히 검을 뽑아 들었지만 바글거리는 군중 속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주인공을 찾기 위해 몸을 돌리면 또 다른 곳에서 외침이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질러지는 비명은 단순히 제임스를 비방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병사가 날 공격했어!"

    "사, 살려주세요!"

    "아아아악-!"

    병사들이 사람들을 정말로 공격했는지는, 다친 사람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범인을 찾기 위해 군중 속에 섞인 병사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쏟아지는 비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일일이 잡아 추문할 수 없는 이상, 누구도 진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번 번져나간 불신의 불씨는 이미 타오르고 있었다.

    "황실 군대가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

    "우리를 죽이고 진실을 감추려는 게 틀림없어!"

    혼란은 쉽게 분위기를 자아냈고 분노할 목표도 뚜렷했다. 그만큼 신의 대리자를 환호하던 관중이 성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 * *

    "굉장한 솜씨시더군요. 괜찮다면 저도 한 수 배우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

    "소란을 일으켜주신 덕분에 쉽게 수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늦었군."

    "경비가 느슨해졌다 해도 이곳은 제국의 수도 아닙니까. 몰래 숨어드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요. 특히나 이런 외형으론 말이죠."

    "로아킨인이로군."

    "보시다시피요."

    펜리르는 넉살 좋게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슬쩍 앞에 앉은 사내를 염탐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센 노인에게선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무르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점점 굵어지는 고목처럼 노인에게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무게감이 있었다.

    "설마 대공 전하께서 숨겨둔 아군이 멜타 공작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도 대공 전하께서 로아킨인과 손 잡으셨을진 꿈에도 몰랐지."

    탐색하는 건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멜타 공작은 느릿한 시선으로 넉살 좋게 웃고 있는 이방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인했다.

    "몸이 좋군. 오랫동안 단련한 몸이야."

    "칭찬해주시는 겁니까?"

    "칭찬이라기보단 대공 전하께 그쪽이 쓸모 있을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 뿐이지."

    멜타 공작의 목소리는 사막의 모래만큼이나 메마르고 건조했다. 펜리르는 색만 다를 뿐이지, 무심한 시선을 바라보다가 결국 입꼬리를 올렸다. 슈바르한 대공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아무래도 외할아버지를 닮은 모양이었다.

    "공작께서는 대공 전하와 많이 닮으셨군요."

    "……닮았다고 생각하나?"

    어라? 펜리르는 살짝 늦게 나온 멜타 공작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착각인지 몰라도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졌던 공작의 목소리가 묘하게 부드럽게 들린 탓이었다.

    "처음 보자마자 닮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대공 전하께도 그렇게 시원스럽게 뻗은 눈매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딸아이를 닮은 거겠지. 그 아이도 그런 눈매를 가지고 있었거든."

    착각이 아니라, 정답인 모양이다. 가족 이야기에 누그러지는 멜타 공작의 경계에 펜리르는 잽싸게 두 손을 비볐다. 입에 발린 말은 그가 자신 있는 특기였다.

    "아무래도 멜타 공작 가의 피가 무척 진한 모양입니다. 대공 전하도 전하지만, 미카엘의 눈매도 그랬거든요."

    "……미카엘?"

    "대공 전하의 아드님, 그러니까. 공작께는 손자 분말입니다."

    "……."

    "왜 그러시죠?"

    가족 이야기를 할 때마다 멜타 공작의 반응이 좋아 일부러 던진 이야기였는데, 돌아온 침묵에 펜리르는 어색하게 웃었다. 잔뜩 올라간 멜타 공작의 눈썹은 마치 화난 것처럼 보였다.

    "……아이가 있는 줄은 몰랐군."

    "모, 모르셨습니까?"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리는 멜타 공작에 펜리르는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아무래도 이쪽도 복잡한 가정사가 얽힌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조용히 발을 빼는 것이 최선이었다.

    "……몇 살이지?"

    "네?"

    "그 아이, 아니. 미카엘 말이야. 몇 살이지?"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화제를 돌릴 셈이었는데, 멜타 공작의 질문이 더 빨랐다. 펜리르는 찰나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다가 문득 마주친 시선에 꿀꺽 침을 삼켰다. 무심해 보이기만 하던 노인의 두 눈에는 어느덧 묘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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