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출정
2021.05.27.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아왔던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원하신다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게 아니라,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로아킨에게 메마른 땅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알리시아는 빠르게 심호흡을 한 후, 곧장 입을 움직였다.
<제가 슈바르한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을 때, 다들 소맹주 같은 표정을 지었어요.>
"……."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생각이 멈춰버려요. 더는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든요. 자신도 모르는 새,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되는 거죠.>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껏 주어진 상황에 순응했고 쉽게 포기해왔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 무엇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저 말뿐인 희망은 의미 없습니다."
<로아킨이 처음부터 메마른 땅이 아니었다면요?>
"……메마른 땅이 아니었다고요?"
<오래된 기록을 보았어요. 그리고, 기록으로 설원도, 사막도, 황폐해진 땅의 모습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죠.>
기록들은 사라졌지만, 그 시간을 기억하는 자들이 그녀의 옆에 있었다. 마물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건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끊임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계속해서 이해하려고 했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물음을 던졌다. 마물은 이야기를 들려줄 뿐, 그 안에서 답을 찾는 건 알리시아의 몫이었다.
"오래된 기록은 의미 없습니다."
<땅이 황폐해진 시점을 알아요. 물론 원인도요.>
알리시아의 두 눈이 반짝였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었으나, 동시에 현재를 있게 한 발판이었다. 발판 위에 서서 내려다볼 수 있게 되자, 많은 것이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시간도 무의미하지 않았다. 크든, 작든 모든 순간들이 쌓여서 하나의 역사를 이루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그 역사가 자신의 힘이 되어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원인을 아는 것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다른 문제죠."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건가요?>
"확실하지 않은 가능성에 걸 만큼 로아킨은 여유로운 입장이 아닙니다."
<역시 이 정도로는 넘어와주시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이게 로아킨 소맹주의 입장입니다."
펜리르는 멋쩍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알리시아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좀 더 확신이 필요하신 거죠?>
낭랑하게 이어진 목소리에 펜리르의 동공이 흔들렸다. 당연히 표정이 굳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알리시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나, 웬만한 확신으로는 안 됩니다. 저희 측에서 전면에 나서는 건-."
<이번 일 이후부터 로아킨에 대한 편견을 부술 수 있겠죠. 반면, 이대로 멈추면, 로아킨에 대한 시선은 달라지지 않을 거고요.>
"그건 결국 제국인의 시선입니다. 로아킨에게 그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국의 태도에 타국들도 로아킨을 깔보고 있다는데, 중요하지 않을 리가요.>
"……그래서, 저희보고 제국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펜리르의 미간이 부쩍 좁아졌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알리시아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저희를 돕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협박하시는 겁니까?"
펜리르의 한쪽 눈썹 끝이 위를 향했다.
<상황을 설명해드리는 거예요.>
"설명이요?"
<카벨레누스가 승리하면 약조를 지켜주겠지만, 그뿐일 거예요. 카벨레누스는 약조한 것 이상의 일은 해주지 않을 테고, 로아킨을 향한 태도도 크게 달라지지 않겠죠.>
"크게 달라지지 않아도 나쁘진 않습니다. 현 황제의 압박만 사라져도 충분히 상황은 나아지니까요."
<나아져도 한계는 있을 거예요. 심지어 로아킨은 내실 문제도 있으니, 결국 로아킨이 우뚝 서기 위해선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겠죠.>
"저도 이미 염두해둔 바입니다."
펜리르가 애써 무심하게 쏘아붙였다. 알리시아는 지지 않고 눈에 바짝 힘을 줬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도박을 해도 좋지 않나요? 도박에서 성공하게 되면, 수십 년을 얻는 셈이잖아요.>
"제 사람들을 걸고 말입니까?"
<지금껏 그래오셨잖아요.>
"……."
펜리르는 손으로 살짝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췄다. 능숙하게 정세를 읊는 알리시아의 모습은 예상과는 달랐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모습이 그럴싸해 보여 괜히 입안이 바싹 말랐다.
<소맹주께서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깨끗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무수히 많은 피가 흘렀겠죠.>
"고우신 얼굴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소맹주께서 생각한 저이지, 진짜 제가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이건 신의 농락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앞의 여자가 제 취향을 완벽하게 빚어놓은 것 같을 수 없었다. 펜리르는 괜히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순진했다면, 지금 소맹주께 이런 말씀을 드릴 리 없겠죠.>
"무슨 말씀을 더 하시려는 겁니까?"
<출전을 약속해주시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로아킨의 땅을 되돌려놓는 건 물론, 로아킨을 향한 편견 역시 없애드릴 거예요.>
"만약, 제가 거절한다면요?"
<이후의 일은 장담하지 못할 거예요.>
"마지막 건, 진짜 협박이군요."
펜리르의 손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표정을 유지해야 하는데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네. 협박이에요.>
"위험한 말씀이라는 거 아십니까?"
<말에 담긴 무게를 모르지 않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완벽한 계획은 불가능하니, 완벽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려는 거죠.>
"최대한 노력해서 낸 판단이 로아킨을 영입하는 거고요."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변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니까요.>
"저 말고 변수가 더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제가 있잖아요.>
알리시아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황실도, 신전도 예상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꼬이게 만들었던 변수. 카벨레누스가 자신을 살려두면서부터 다르게 흘러간 이야기는 태풍으로 변한 나비의 날갯짓처럼 많은 것들을 흔들어놓고 있었다.
"스스로를 변수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솔직히 소맹주보다 제가 더 큰 변수일 거예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누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리시아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가슴을 달랬다. 황실도, 신전도 미카엘이 마물의 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왕이 자신이라는 걸 모르는 이상, 그들의 계획은 자연스럽게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괜찮은 변수를 쥐고 있으시면서 저까지 노리고 계신 거라면, 확실히 생각이 달라지려고 하는군요."
<제 의중이 궁금하시다면, 그 전에 먼저 제 편이 되어주셔야 할 거예요.>
"제게서 원하시는 답을 얻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마도요.>
"어째서요?"
<소맹주께서는 아까부터 웃고 계시거든요.>
"이런. 들켰군요."
펜리르는 결국 감추고 있던 손을 내리고 미소를 드러냈다. 위험한 도박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하고 싶어졌다. 소맹주 직함을 가진 후부터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려야 했을 뿐, 애당초 사내는 이런 짜릿함을 좋아했다.
<로아킨은 이번 전쟁으로 많은 걸 얻을 거예요.>
"그 말을 다 믿진 않습니다. 원래 모든 도박은 위험이 클수록 배당도 커지는 법이잖습니까."
<그럼에도 하실 거잖아요.>
"어쩔 수 없죠. 사탕을 떨궈놓으면 개미들이 득실거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펜리르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알리시아의 요청이 단순히 떼를 쓴다거나, 자만감에 차 있으면 결코 흔들리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승리를 얻어내는 게 목표였다. 애당초 알리시아는 질 생각이 없었다. * * *
"로아킨 소맹주의 제안대로 기존 계획을 앞당겼습니다. 이제 남은 건 실행뿐입니다."
"앞서 말한 아군은 어때?"
"미리 사람들을 배치해두었다고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차선 계획으로 넘어갈 수 있게도 일러뒀겠지?"
"네. 잔뼈가 굵으신 분이시니, 잘 처리해주실 겁니다. 다만……."
가제프는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카벨레누스가 고른 아군은 신뢰라는 말을 붙이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이미 아군에게는 카벨레누스를 배신한 전적이 있었다. 카벨레누스의 상황이 좋지 않은 시점에서 무슨 선택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민해도 소용없어. 우린 카벨레누스가 아닌걸. 그가 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이끌 수도, 상황을 판단할 수도 없어."
"……."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함께 고민한 거잖아.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가정해보고 그에 맞는 계획들을 세웠지. 나는 우리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알리시아는 턱을 세우고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주어진 짐이 버거웠지만 이대로 무게에 짓눌리고 싶진 않았다. 카벨레누스가 없는 지금, 슈바르한을 지켜야 하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많이 변하셨습니다."
"칭찬이겠지?"
"물론입니다."
가제프는 잠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여자는 이제 예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단 있는 눈을 하고 있었지만,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누가 감히 이곳에서 날 건드리겠어."
알리시아는 다정한 손길로 펠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에 애교를 부리는 펠시는 영락없는 애완동물이었지만, 가제프는 짐승의 본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알리시아의 말대로 슈바르한에서 그녀를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순간이동 마법은 거리에 따라 많은 마정석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했어."
"아무래도 저도 점점 나이가 드나 봅니다. 걱정을 지울 수 없네요."
가제프는 허리춤에 찬 검을 꽉 쥐었다. 이번 출정에 많은 것들이 달려 있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가야 하는데, 대신 짐을 떠맡기는 것 같아서 미안해."
"아닙니다. 이게 제 일인 걸요. 오히려 전하를 혼자 보냈던 게 마음에 걸린 참이었습니다."
가제프의 미소에 알리시아는 애써 웃으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에는 슈바르한을 상징하는 늑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경에게 내가 주는 부적이야."
"……."
"모르코 부인께서 살아계셨다면 직접 주셨겠지만, 이젠 안 계시잖아."
"……."
"왜 별로야?"
괜히 모로코 부인을 떠올리게 한 걸까. 알리시아가 조심스럽게 가제프의 눈치를 살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실은 이모님은 이런 걸 챙기시는 분이 아니셔서 말입니다. 부적은 전하께 선물 받는 게 처음입니다."
가제프는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손수건을 가제프에게 내밀었다.
"클라우드 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경도 가족처럼 생각하거든.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어."
"말씀만 들어도 든든하군요."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더 고맙지."
"물론, 대공 전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시겠지만요."
가제프의 우스갯소리에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웃음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성을 잃지 않으려 해도 카벨레누스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내색하지만 않을 뿐이지, 두 사람 모두를 초조케 하고 있었다.
"금방 끝날 겁니다. 그리고, 두 분 전하와 도련님, 모두 제자리를 찾으시겠죠."
"그날이 오면, 같이 모르코 부인을 만나러 가자."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가제프는 알리시아를 향해 마지막 예를 갖춘 후, 투구를 눌러썼다. 창밖으로는 출정 준비를 마친 군대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