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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26)화 (126/164)
  • 126화. 신의 그릇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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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속셈인 거지?"

    "저는 그저 신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이야기하지 않겠다면 할 수 없군."

    카벨레누스는 헤르만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 와중에도 헤르만은 여유롭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전하께서 이 자리에서 제 목숨을 취하고 싶다 하시면 기꺼이 내드리지요. 하나, 저 하나 죽는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머리를 자르면 휘청거리기야 하겠지."

    "저따위가 어찌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한낱 신의 종에 불과한 자입니다."

    헤르만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자도 아닌, 그대가 그런 말을 하니 우습군."

    "전하께서 절 싫어하시니까요. 감정이 섞인 만큼 절 제대로 봐주지 않으시겠죠."

    "그럴싸한 말로 무마할 생각은 그만둬. 나는 이제 그대의 뜻대로 휘둘리던 어린애가 아니야."

    카벨레누스는 혐오를 감추지 않으며 얼굴을 구겼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깨달았던 건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일찍 철든 어린아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숨죽이는 법부터 배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헤르만은 어린 카벨레누스가 몸을 사리는 걸 원치 않았다. 헤르만은 제르페누스 모자를 건드리는 것으로 선황제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전하께서 절 미워하셔도 지금의 전하를 만든 건 접니다."

    "내가 그대를 혐오하는 건 그래서지."

    "아직도 전하께서는 멀리 보지 못 하시는군요."

    "멀리 봐?"

    카벨레누스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백발의 노인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감정은 잠깐일 뿐, 이성을 좀 먹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릇된 선택을 하게 만드는 악에 가깝죠."

    "더 들어줄 필요 없군."

    카벨레누스가 도약하는 동시에 검을 힘껏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검은 요란스러운 소리만 낼 뿐, 헤르만에게는 닿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하나의 투명한 벽이 있는 것처럼 카벨레누스의 검은 허공에 멈춰 있었다.

    "잘 버티는군."

    "전하께서도 제 생각보다 강하시군요. 이제 확실히 전면전은 무리겠습니다."

    점점 더 좁혀지는 거리에 헤르만이 싱긋 웃었고,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손에 전해지는 반동만으로도 약해진 게 느껴졌다. 몇 번만 더 휘두르면 헤르만의 방어를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걱정도 많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저 기쁘군요."

    "기뻐?"

    "전하 덕분에 희망이 생겼거든요."

    헤르만이 손에 낀 반지를 느긋하게 쓸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벨레누스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한순간이었지만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이 섬뜩했다.

    "공격을 멈추세요."

    "……."

    "전하."

    "……."

    "전 분명 공격을 멈추라고 했습니다."

    헤르만의 만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카벨레누스는 목덜미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 얼굴을 구겼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고 있었다. 족쇄의 반동이었다. 결국 카벨레누스는 이를 갈며 뒤로 물러섰다.

    "……족쇄를 조종할 줄 아나?"

    "이미 눈치채지 않으셨습니까? 족쇄를 만든 건, 원래 저희였다는 걸요."

    "……."

    "선황제 폐하께 저희가 손을 썼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셨겠지만, 당시 실험에 참여했던 자들은 대부분 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대의 사람들이라고?"

    "무능했던 작자가 마법사 몇 좀 부렸다고 고작 몇 년만에 그런 힘을 손에 넣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건 전부 신의 안배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헤르만의 엄지가 부드럽게 반지의 표면을 어루만졌다. 젊은 날, 하사받았던 반지의 세공은 세월의 흐름대로 닳아 이제는 문양의 윤곽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까지 신의 뜻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농락할 셈이지?"

    "농락이라뇨. 저희가 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것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신이 아니라, 마물이겠지."

    카벨레누스가 얄궂게 비아냥거렸다.

    "거기까지 도달하셨습니까? 대단하시군요."

    "마물을 추악한 존재라고 매도한 것치곤 태평한 반응이군."

    "전하께서 모든 것을 알게 되신 것도 결국 신의 뜻일 테니까요."

    "말끝마다 신의 뜻, 신의 뜻. 이젠 질리지도 않나?"

    "전하께서도 곧 이해하시게 될 겁니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전하께서야 말로 신의 뜻에 가장 가까워지실 테니까요."

    헤르만은 느긋한 걸음으로 카벨레누스에게 다가섰다. 카벨레누스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그저 헤르만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제 이 땅에는 신이 사라졌습니다. 어떤 고통이나, 죽음도 없는 낙원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다른 누구도 아닌, 대신관인 그대가 신을 부정하려는 건가?"

    "저는 신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있을 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헤르만은 예를 표하듯 두 손을 가슴에 올려놓았다. 프라임을 상징하는 사제복을 입은 노인은 오랜 시간 신의 가르침을 따른 성직자의 모습을 완벽하게 흉내 내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이 세상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이 세상에는 답이 없습니다."

    "……."

    카벨레누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아도 추악한 자들이 그득합니다. 그들은 항상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싸우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남을 짓밟으며, 서로 흠을 찾아 깎아내리고 멋대로 음해하기 바쁘지요."

    "자기소개라도 하고 싶은 건가."

    "저는 그들과는 다릅니다."

    "내겐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은데."

    "그들을 홀리기 위해서는 그들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이 역시, 대의를 위한 희생입니다."

    "우습군. 그대가 언제 희생을 했다는 거지?"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더욱 험상궂게 변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헤르만은 한 번의 희생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타인을 계단 삼아 밟아가며 위를 향해 올라가기만 했을 뿐이었다.

    "대의를 위한다는 건, 많은 것을 눈감아야 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지금껏 이 자리에서 많은 선택을 해왔고, 그만큼의 피도 흘려왔지요."

    "그건 희생이 아닌, 방관이겠지."

    카벨레누스가 싸늘하게 이를 드러냈다. 이제 와서 희생자를 위하는 척 구는 헤르만의 모습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방관이 아닌, 대의를 향한 인도입니다."

    "그깟 대의가 뭐라고."

    "신께서 돌아오실 겁니다."

    "……."

    카벨레누스의 동공이 일순간 흔들렸다. 물론 그 순간에도 헤르만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거 인간들은 그릇된 선택으로 신을 몰락케 했고 그 벌로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내게 그대들의 교리라도 전파하겠다는 건가?"

    "진리입니다."

    "진리?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서슴없이 하는군."

    카벨레누스의 손등 위로 핏줄이 울룩불룩하게 도드라졌다. 검을 휘두를 수만 있다면 그대로 목을 날려버렸을지도 몰랐다.

    "아주 옛날, 프라임은 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신을 되살리기 위해 온 세상을 떠돌며 흩어진 신의 힘을 모았습니다."

    "……."

    "하지만 정작 힘을 모아도 프라임은 신을 되살리지 못했습니다. 이미 산산조각이 난 신의 힘은 하나로 모이지 않고 자꾸만 흩어지기만 했거든요. 그래서 필요해진 겁니다."

    신의 힘을 담을 그릇이. 주름진 얼굴 사이로 얄팍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카벨레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찌푸렸다. 헤르만의 말을 듣는 순간, 익숙한 얼굴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프라임의 바람을 이루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무엇도 신의 힘을 제대로 담지 못했거든요."

    "……."

    "결국 남은 건, 하나뿐이었습니다. 신 다음으로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 프라임, 자신 말입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프라임조차 신의 힘을 이기진 못했고, 그는 서서히 무너졌지요."

    헤르만은 손을 뻗어 카벨레누스의 뺨을 쓸었다. 노인의 두 눈에는 지금 상황에 맞지 않게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프라임은 자신의 의지를 이어줄 자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지금의 프라임 신전이 되었습니다."

    "지금 그대가 프라임이 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나."

    "프라임은 신이 아니라, 아직 신이 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

    "프라임의 그릇과 신의 힘이 하나가 될 때, 프라임은 비로소 신이라 불리게 될 겁니다."

    "미친 소리도 정도껏 했으면 좋겠군."

    "미친 소리가 아니라, 언젠가는 일어날 일입니다. 프라임은 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기나긴 잠에 빠졌지만, 그의 뜻을 잇고 있는 자들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까요."

    헤르만의 엄지가 카벨레누스의 눈가 주변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오랫동안 많은 실험체들을 봐왔지만 이토록 선명한 금색 눈동자를 가진 자는 본 적이 없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었습니다. 프라임의 도움이 있다고 해도 여기까지 오는 데,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시간이 흐를수록 더 나은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 덕분이었습니다. 마치 전하처럼 말이죠."

    "……결국 지금까지 벌인 실험의 최종 목표는 신의 힘을 담을 그릇을 만드는 거였나."

    카벨레누스의 잇새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이 모든 게, 저런 이유 때문에 벌어졌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신이 사라졌기에 망가진 세상입니다. 신이 돌아와야지만, 모두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단 말입니다."

    "……."

    "너무 고깝게 보지 마세요. 이건 대의입니다."

    "……대의?"

    "네. 대의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 남아 있는 자들은 신을 죽였던 죄인들의 후손 아닙니까. 그들은 신을 죽인 죗값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헤르만이 웃었다. 그에겐 일말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대는 무슨 벌을 받아야 하는 거지?"

    "제 죄는 돌아오신 신께서 내려주실 겁니다."

    "신이 그대를 용납할 것 같나?"

    카벨레누스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신께서 충직한 종을 버릴 리 없습니다."

    헤르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대와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군."

    "지금은 혼란스러우실 거 압니다. 하나, 곧 이해하시게 되실 겁니다. 결국 전하께서도 제가 옳다는 걸 인정하실 수밖에 없으실 테니까요."

    어쩌면, 전하께서는 운 좋게 신의 그릇이 되실 수도 있으니까요. 위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온 헤르만의 손이 카벨레누스의 목에 닿았다. 어느샌가 카벨레누스의 목에는 가시덩굴처럼 뾰족뾰족한 모양의 검은 줄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고통스러우실 텐데, 잘 참으시는군요. 다행입니다. 다른 실패작들과 달리, 남다른 구석이 보여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여기서 바로 무너지면 실망할 뻔했거든요."

    "……."

    "물론, 전하께서 못 하셔도 그 아이가 있으니-."

    푹! 살갗을 파고드는 서늘한 감각에 헤르만의 얼굴에서 한순간 표정이 사라졌다. 검날을 타고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벨레누스의 검이 헤르만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감히 누굴 입에 담아."

    카벨레누스는 짐승처럼 낮게 울부짖었고 헤르만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족쇄로 인한 반동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카벨레누스는 검을 꽉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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