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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25)화 (125/164)

125화. 소문의 시작

2021.05.13.

"어때?"

"솔직히 생각했던 것 이상입니다."

"다행이네."

알리시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지금 자신이 뭘 할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이곳에는 자신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마물들을 풀어 정보를 모으실 생각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잖아. 그리고, 이제라도 못 했던 일을 해야지."

"못 했던 일이요?"

"나는 슈바르한 대공비가 될 거야."

"……방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가제프는 알리시아가 건넨 조사서를 읽다 말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시선은 곧았다.

"말뿐인 대공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슈바르한의 대공비가 되고 싶어."

"……."

"왜 그런 표정이야? 혹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아가씨께서 대공비가 되어주시면 저로선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하지만……."

가제프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항상 알리시아가 슈바르한 대공비가 되어주길 바라면서도 차마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알리시아가 카벨레누스의 옆을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었다. 슈바르한 대공비로서의 의무를 떠넘길 순 없었다.

"힘들겠지. 높은 자리는 그만큼의 책임이 필요한 거잖아."

"네.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겁니다. 전하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아가씨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그 영향도 없진 않겠지."

알리시아가 옅게 웃었다.

"그렇다면 한 번만 더 생각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가씨께서는 지금껏 충분히 고생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하고 싶어."

"……."

"내가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 할 거야. 더는 그 사람 뒤에 숨어 있고 싶지 않아. 전하, 아니. 카벨레누스의 옆에 당당하게 서 있고 싶어."

알리시아는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세웠다. 가제프는 멍하니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카벨레누스의 뒤를 지켰던 만큼 가제프는 종종 상관을 따라 자연스럽게 알리시아를 지켜볼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렇기에 가제프는 알리시아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알리시아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라면 분명 원하는 바를 쟁취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아가씨라고 부르면 안 되겠군요."

"어?"

"클라우드 가의 수장, 가제프.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슈바르한 대공비 전하. 가제프가 몸을 숙여 정식으로 대공비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아직 이런 인사를 받기에는 너무 이른데."

"괜찮습니다. 이미 제게는 대공비 전하십니다."

"……고마워."

"제가 더 고마운 걸요. 저는 전하께서 큰 결심을 내려주신 거라는 걸 압니다."

가제프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기 마련인데, 알리시아는 이겨냈다. 그 사실이 기쁘고도 고마웠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있어."

"부탁 말고 명령을 하시면 됩니다."

가제프의 시선이 알리시아의 등 뒤를 향했다. 그녀의 뒤에는 서류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동안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지, 알리시아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슈바르한 정세를 술술 읊을 줄 알았다. 앞으로 경험만 더 쌓인다면, 그녀는 좋은 지휘관이 될 소질이 보였다.

"실은 세타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세타요?"

"아, 마물의 이름이야. 다른 마물들이 펠시에게 이름을 지어준 걸 알아버려서, 다들 내게서 이름을 하나씩 받아갔지."

"마물들은 정말로 전하를 잘 따르는군요."

"다들 착하거든."

알리시아는 떼쓰는 아이처럼 불만을 토하던 마물들을 떠올리며 웃었지만, 가제프는 차마 웃지 못했다. 마물이 따르는 건 알리시아뿐이었다. 펠시만 하더라도 알리시아 앞에선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다가도 그녀가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매서워졌다.

"사실 나는 마물들에게 정보뿐만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듣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중 한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어떤 것이 걸리시는 겁니까?"

"마물들 말로는, 자신들은 죄인이라서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대."

"……그 말씀은 마물들이 불사의 몸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가제프가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슈바르한에서는 오랫동안 마물을 사냥해왔다. 그들이 불사라면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설명하긴 어렵긴 한데…… 그들의 말로는 영혼이 슈바르한에 붙잡혀 있는 거라서, 육체적으로 죽는 건 껍데기뿐이래.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다시 껍데기를 만들 수가 있대."

"신전에서나 할 법한 모호한 이야기로군요."

가제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따지고 보면 같은 뿌리에서 나와서일까, 마물과 신전은 확실히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 말이야. 죽을 수 없는 마물이 비슷하게나마 죽음에 도달할 방법이 유일하게 하나 있대."

"비슷하게나마요?"

"그것도 완전한 죽음은 아니거든."

"……그렇다면, 그 방법이 뭡니까?"

"슈바르한에서 벗어나는 것."

알리시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밖에는 눈보라가 거세게 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시신이 슈바르한을 떠나게 되면 부활이 어려워진대. 아무리 사용이 끝난 껍데기라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일부라서, 약속을 어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지."

"……그럼, 아가씨께서는 마물들이 얼마나 외부로 반출되었는지 아실 수 있다는 거군요."

"카벨레누스가 집권한 후부터 확실히 줄었지만 거래는 계속 있었대."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의 슈바르한에서 마물이 아니면 살기 어려웠으니까요. 오죽했으면 전하께서도 악용될 마물의 피에 대한 거래만 제지하는 게 전부셨죠."

"게다가 제국에는 마물의 심장이 보양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면서."

"네. 오랫동안 전해오는 민간 보양이죠. 실제로 효과가 뛰어난 편이기도 하고요."

마물이 혐오대상이면서도 인기를 끈다는 게 모순이긴 하나, 제국에서는 오랫동안 일정 크기 이상의 마물을 발만이라 부르며 보양식으로 이용해왔다. 매해 이름 있는 귀족 가문이라면 발만의 심장을 먹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였고, 아무것도 없던 슈바르한이 부를 쌓기 시작한 것 역시 중간 상인들의 농락에 제값을 받지 못하던 발만의 심장이 제대로 된 가격을 받게 된 후부터였다. 카벨레누스는 마정석을 채굴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만의 심장을 팔았으니까. 마정석의 공급이 안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발만의 심장은 슈바르한에서 가장 큰 수입원이었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심장이 이상한 일에 쓰였던 것 같아."

"……악용이요?"

"아무리 신체가 슈바르한 외부로 반출되었다고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몸이 복귀되어야 하는데 몇몇은 그러지 않았대."

알리시아가 초조하게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마물들은 자신들이 죽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을 사냥한 인간에게 원한조차 품지 않았고 이 일에 대해 별다른 반감도 없었지만, 알리시아는 아니었다. 이야기를 정리해볼수록 한 번 떠오른 추측을 쉽게 거둘 수 없었다.

"그럴 리가요.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심장에 대한 유통 경로는 철저하게 확인했고, 심장은 피와 달리 양이 극소입니다. 실험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카벨레누스가 집권한 후가 아니야."

"……네?"

"그 전에 있었던 일이야. 하지만, 심장을 빼앗긴 마물은 아직도 부활하지 못했어."

"……."

"그건 선황제의 집권 시기도 아니었어."

알리시아 역시, 가장 먼저 황실을 의심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되짚을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알리시아는 재빨리 심호흡을 한 후, 곧장 입을 뗐다.

"마물과 가장 가깝게 지낸 건 슈바르한 사람들이었어. 그런데, 마물의 심장이 보양식이라는 이야기는 슈바르한에서 나온 게 아니었지. 정작 슈바르한 사람들은 발만의 심장에 대한 가치를 몰라서 제값도 받지 못했었잖아."

"……."

"그럼, 마물의 심장이 보양식이라는 소문을 처음에 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알리시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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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휙-! 본능적으로 휘두른 검이 기습을 막았다. 카벨레누스는 손에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에 이를 바득바득 갈며 뒤로 물러섰다. 잠깐 검을 막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건 평범한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카벨레누스는 짧게 숨을 뱉으며 날아온 공격을 피했다. 무식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이었지만 패턴이 단순해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당초 동공이 풀린 성기사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들은 이제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실험을 한 건, 황제만이 아니었다.

"미치겠군."

카벨레누스의 검이 달려든 적의 심장을 정확하게 관통했다. 경험상 실험체는 숨통이 끊어지지 않는 한,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단숨에 숨을 끊어주는 편이 그나마 고통을 더는 방법이었다. 카벨레누스는 마지막 적까지 베어내며 이를 악다물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죽은 자의 시신을 보니 절로 헛웃음이 치밀었다. 교단은 대신관이 바뀔 때마다 사용하는 문양이 달랐는데, 적들이 입고 있는 건 현재 교황의 것이 아니었다. 황실의 실험을 보고 따라 한 게 아니었다. 선황제가 실험하기 전부터 신전은 마물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무런 티도 내지 않은 거지?'

이전 세대의 실험체였음에도 신전의 실험체는 황실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신전의 기술이 우위에 있다면 지금껏 숨죽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단 하나,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은 한. 카벨레누스는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설마 전하께서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군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 함께, 순간 컴컴했던 통로가 환해졌다. 카벨레누스는 재빨리 갑작스러운 빛에 인상을 찡그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빛에 취약했다.

"그쪽에도 통로가 있었나 보군."

카벨레누스는 맞은 편에서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는 헤르만에 인상을 찌푸렸다. 백발의 대신관은 이 순간에도 여유로워 보였다.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신성한 동상에 그런 짓을 하신 것도 모자라, 멋대로 신전 안을 헤집고 다니실 생각이신가봅니다."

"그 돌덩이가 신성한 물건인 줄은 몰랐군."

카벨레누스는 거만하게 턱 끝을 추켜올렸다. 자신을 향한 무수히 많은 무기들 앞에서도 사내는 조금도 기죽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오만한 지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전하께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슈바르한 대공이라 해도 세상에는 해선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입니다."

"그 말, 그대에게도 똑같이 들려주고 싶은데. 세상엔 대신관이라 해도 해선 안 되는 짓이 있는 거라고 말이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눈이 있다면, 이자들이 안 보일 리는 없을 텐데."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싸늘하게 식은 그의 두 눈에는 감출 수 없는 혐오가 뒤섞여 있었다.

"신의 종께 함부로 대하면 벌을 받으실 겁니다."

"이자들이 선대 대신관의 성기사라는 걸, 그대가 모를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전하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헤르만은 짐짓 모른 척 웃었다.

"저들은 많이 잡아야 서른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잖나."

카벨레누스는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헤르만을 노려봤다. 선대 대신관은 헤르만만큼이나 오랫동안 집권했다. 선대 대신관의 성기사라면, 이미 오래 전에 백골로 돌아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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