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내가 할 수 있는 일
2021.05.10.
[불안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떨어져 있으니까."
[괜찮다. 강한 남자다. 금방 돌아온다. 걱정 필요 없다.]
"그 사람이 강하다는 걸 알아도 걱정돼. 결국, 그도 사람인걸."
[그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알리시아는 자신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시선에 잠시 숨을 멈췄다. 짐승의 두 눈은 카벨레누스의 것처럼 금색이었나, 그의 것과 달리 오래된 골동품처럼 빛이 바래 있었다.
"……그가 사람이 아니면 뭔데?"
[물은 건 내 쪽이다. 그대는 그를 사람이라 생각하나?]
"당연하지."
[그러면 된 거다.]
"그게 다야?"
한껏 긴장하게 만든 것치곤 간단한 대답이었다.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던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게 가장 중요한 거다.]
"중요하다고?"
[생각은 말이 된다. 말은 행동이 된다. 그리고 행동은 생각을 현실로 이루는 거다. 그대가 알려준 거다.]
"미안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거다.]
"……음, 좋은 말인 것 같긴 하네."
여전히 이해는 안 되지만. 알리시아는 뒷말은 삼키면서 그냥 웃었다. 펠시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늘수록 느끼는 건 그의 말을 전부 이해하는 게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이럴 때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 주제를 바꾸는 편이 나았다.
"있지, 쭉 묻고 싶었던 게 있는데 물어도 돼?"
[그대가 원하면 뭐든 좋다.]
펠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리시아의 말을 거절해본 적이 없었다.
"너희는 슈바르한에서 떠날 수 없다고 했잖아. 그게 너희가 받은 벌이라고."
[그렇다.]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슈바르한에서만 있어야 하는 거야?"
[모른다.]
"모른다고?"
[그대가 돌아오는 날까지 이곳에 있는 게 벌이었다.]
"그러면 너희의 벌은 이미 끝난 거 아냐?"
알리시아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하지만 우리 떠날 수 없다. 여전히 벌은 계속되고 있다.]
"왜 벌이 끝나지 않는 거지?"
[우리 용서하고 싶지 않은 거다. 미워하는 거다.]
"……."
[방관도 죄다. 우리 그 사실 너무 늦게 알았다.]
펠시의 두 귀와 꼬리가 스르륵 아래로 처졌다. 마물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다른 이유?]
"네가 말한 존재는 항상 다정하고 너흴 많이 아꼈다면서. 그런 존재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미워하지 못했을 거야."
[…….]
"같이 방법을 찾자. 나도 한 번 찾아볼게."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펠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펠시는 멍하니 알리시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그대 다정하다. 그래서 더 걱정된다.]
"걱정?"
[그대 항상 다른 이들 먼저 생각했다. 인간들, 그런 그대 이용했다.]
펠시의 두 귀가 또 한 번 축 처졌다.
"나는 그때와는 달라."
[안다. 그래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대 가장 위대한 것이다. 특별하다. 가치 있는 것은 가치 있게 대해야 빛난다.]
"……."
[내가 잘못했나?]
"어……?"
[울고 있다, 그대.]
당황한 펠시가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뱅글뱅글 돌고서야 알리시아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뭐랄까. 그냥, 좋아서."
알리시아는 다급히 흐르는 눈물을 훔치다가 이내 그냥 웃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왜 우는지 알지 못해 당황스럽기만 했는데, 막상 말로 내뱉고 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좋은데 왜 우나.]
"네가 처음에 그렇게 말했을 때는 부끄러웠는데, 지금은 그 말이 위로처럼 느껴져서."
[뭐가 좋은 거지?]
"그동안 마음이 무거웠거든."
알리시아가 쓰게 웃었다. 몸이 아픈 만큼 마음도 약해져 자꾸만 카벨레누스에게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관계가 어떤 식으로 흐르는지 한 번 겪어본 터라 무작정 의지하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왜 마음이 무겁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솔직히 내가 짐이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거든."
[그대 짐 아니다.]
펠시가 발끈해 반박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이 도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애당초 자신이 아니었다면, 카벨레누스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신전으로 잠입할 일은 없었으니까.
"……나 말이야, 날 살리겠다고 위험을 자초하는 그 사람을 말리지 않았어. 이기적이라도 나는 살고 싶었거든."
[이기적이지 않다. 그도 바란 일이었다.]
"그렇다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
카벨레누스에게만 모든 걸 맡겨놓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제대로 된 힘이 할 수만 있다면 자신도 나서고 싶었다. 카벨레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물론, 내가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알리시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지만, 알리시아는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몸이 아프지 않았다 해도 자신은 무능력했다. 나서는 것보다 카벨레누스의 보호 아래서 안전하게 그를 기다리는 편이 이상적이었다.
[슬퍼하지 마라.]
"슬퍼하는 게 아니라, 아쉬운 거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그에게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알리시아의 손가락이 천천히 유리창 위로 호선을 그렸다.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어도 보이는 건 끝없이 펼쳐진 설원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알리시아는 종종 카벨레누스의 방에서 밖을 바라보곤 했다.
"……나도 강하면 좋을 텐데."
[그대 충분히 강하다.]
"그 사람도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어. 나는 하나도 강하지 않은걸."
[이상하다. 그대는 다른 이들에겐 관대하지만 자신에겐 냉정하다. 기준 엄하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알리시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보이는 힘만 강한 거 아니다. 세상엔 그보다 강한 거 훨씬 많다. 그대는 그런 힘 가졌다.]
"……."
[정작 그대, 자기 힘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 것인데 쓰지 못한다.]
"네가 날 너무 좋게 봐주는-."
[나 말했다. 가치 있는 것은 가치 있게 대해야 빛이 난다고.]
"……그렇게 말해주면,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된 것 같은 게 아니다. 정말로 그대는 특별하다.]
당연하게 돌아온 펠시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었다. 알리시아는 치미는 울음을 삼키며 끌어안듯 두 팔로 자신을 안았다.
"나는 항상 그 특별함이 싫었어. 오히려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
[어째서?]
"내 불행이 특별함에서 오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대 잘못이 아니다.]
펠시의 대답에 알리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비슷한 말을 해주던 사내를 알고 있었다.
"……맞아. 내 잘못이 아니지. 그리고, 특별한 것도 잘못이 아니고."
알리시아는 자신이 기억하는 사내와 비슷한 눈을 한 짐승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나 사실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고 싶지 않았어."
[안다. 그대 처음부터 그랬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과 함께 가고 싶었어.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
[하고 싶으면 된다.]
"안 돼. 하고 싶다고 전부 할 순 없어."
[그런가…….]
펠시가 기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예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기다리고 있을 필요도 없겠지."
[그 말은…….]
번쩍 위를 향한 펠시의 꼬리가 살랑살랑 춤을 췄다.
"기다리고만 있지 않을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어."
알리시아는 눈물을 닦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한 번 목표를 정한 그녀의 두 눈은 언제 흔들렸냐는 듯 곧았다.
* * *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은 냄새로군.'
카벨레누스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빠르게 전진했다. 지금쯤이면 다른 성기사들이 시체를 발견하고 추격 중일 테고, 신전의 소란에 제르페누스까지 붙었을 확률이 컸다.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여 목적을 달성하고, 헤르만과 제르페누스가 다투는 사이 몰래 빠져나가는 편이 가장 깔끔했다.
'이 정도로 가까워졌는데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상하군.'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명한 금안은 고양이과 맹수가 그러하듯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며 사냥감을 찾기에 여념 없었다.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성격이거나, 아니면 잡혀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은데. 이런 공간이면 후자일 확률이 높아 보이긴 하는군.'
카벨레누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주변을 살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낮게 울리는 마물의 울음소리와 섞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사내의 신경을 거스르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묘하게 익숙하단 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코를 찌르는 마물의 냄새 때문인지, 알리시아를 따르는 마물이 말한 것처럼 같은 피끼리 끌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묘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이곳까지 들어온 건 분명 이번이 처음인데, 이미 예전에 이곳을 와봤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단지 기분 탓이면 좋겠지만…….'
카벨레누스는 빳빳해진 목덜미를 손으로 주물럭거렸다. 익숙한 만큼 편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곳에 있으면 몸이 무거웠다. 마치 습기 찬 공기가 피부를 스칠 때마다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 끼쳤다. 그리고 사내는 이런 기분이 들 때는 썩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는 분명 마물의 것이었다. 죽은 마물에게선 더는 냄새가 나지 않았고, 살아 있는 마물은 슈바르한을 벗어나지 못하니 이런 냄새를 풍길 수 있는 건 프라임 뿐이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이대로 발을 뺄 수 없었다. 알리시아가 살기 위해선 프라임이 있어야 했다.
'실수는 용납할 수 없어. 이번 한 번으로 끝내야 한다.'
헤르만은 제르페누스 이상으로 꼬리 자르기를 잘했다. 한 번 신전을 헤집어놓은 이상, 다음에도 이곳이 무사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한참을 프라임을 찾기 위해 헤매야 했고 그 시간만큼 알리시아는 고통받아야 했다. 모든 걸 뻔히 알면서 그녀를 고통 속에 둘 수 없었다. 무리하면서까지 수도로 들어온 건 그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이던 카벨레누스의 걸음이 일순간 멈췄다.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하 통로 끝에 누군가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검의 위치를 확인하듯 검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느껴지는 인기척은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좀 더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갔다. 거리감이 있긴 하지만, 어둠 속에서 보이는 윤곽만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끝이 둥글게 마감된 갑옷은 성기사의 전유물이었다. 눈치 빠른 헤르만이 뭔가 벌써 조치를 취한 모양이었다. 카벨레누스는 구렁이 같은 헤르만의 수에 혀를 차며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성기사들의 실력은 뻔했고 인원도 그리 많지 않으니 정리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것'만 보지 않았다면. 챙-! 언제나 망설임 없었던 카벨레누스의 검이 일순간 흔들렸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적들의 검이 단숨에 카벨레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