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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23)화 (123/164)
  • 123화. 가장 고결한 성자

    2021.05.06.

    "……."

    "아직도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생각해보니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건 너무 자비로운 것 같아서 말이지."

    "그렇다고 절 해치실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해칠 순 없어도 네 기분을 나만큼이나 더럽게 만들어줄 순 있지."

    제르페누스는 느긋하게 머리카락 끝을 둥글게 말았다. 가볍게나마 되갚아줄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제게 손끝 하나 상처 입히신다면-."

    "그 팔찌 벗어."

    "……네?"

    "소중한 걸 빼앗기면 네놈도 기분이 더러워지겠지."

    물론, 아무리 그래도 나보단 못하겠지만. 제르페누스는 비아냥거리며 피식 웃었지만, 제임스를 바라보는 두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이 팔찌는 제게……."

    "팔찌가 싫다면, 몸으로 할 거야. 몸 안의 상처가 있어도 옷으로 잘 가리면 그만이잖나."

    "……."

    "펠시온."

    "네, 폐하."

    펠시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임스를 향해 다가갔다. 제임스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다가 새삼스레 등에 닿은 딱딱한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등 뒤는 막힌 벽뿐이었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자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말해주지 않았는데…….'

    제임스는 초조하게 입술을 자근자근 씹다가 점점 더 가까워진 펠시온과의 거리에 성급히 팔찌를 벗었다. 팔찌는 펜리르와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지만 목숨보단 소중하지 않았다.

    "여, 여기 있습니다!"

    팔찌가 내밀어지고서야 펠시온은 멈췄고, 그 뒤에 선 제르페누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 눈빛을 보니 그나마 기분이 풀리는군."

    "……."

    "너무 섭섭해하진 말게나. 인생은 그런 거잖나. 누군가를 거슬리게 할 만한 짓을 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도 해야 하는 거지."

    제르페누스의 손짓에 펠시온은 제임스의 팔찌를 챙겨, 자신의 주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제르페누스는 제임스를 향해 웃을 뿐, 팔찌를 집어 들지 않았다.

    "볼품없는 물건이군. 아무리 보고 있어도 갖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아. 이딴 건 쓰레기통에 던져두는 편이 가장 잘 어울릴 거야."

    "……."

    "왜 그런 표정이지? 네놈은 내가 그런 평을 내린 것에 감사해야지 않나? 내가 이걸 탐내기라도 했으면 그대는 영영 이 팔찌를 돌려받지 못했을 거잖나."

    제르페누스가 얄궂게 입술을 끌어올리며 느긋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 기분은 항상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거야. 다시 말해, 그대가 적당히 내 비위를 맞춰주면 이 더러운 물건을 도로 줄 수 있다는 거지."

    "……제게 뭘 원하십니까?"

    "첫째, 제대로 신의 대리자 노릇을 할 것. 두 번째, 다신 날 농락하지 말 것. 마지막 세 번째. 내가 끌릴 만한 특별한 정보를 넘겨줄 것."

    "제가 정보 같은 건-."

    "없어도 만들어야지. 그게 간절한 거잖나."

    어디 열심히 노력해보라고. 제르페누스는 대놓고 웃음을 터트린 후,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펠시온이 팔찌를 자신의 품으로 감췄다. 그때였다. 쿵쿵, 하고 빠르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로 시끄럽게 하는 거지?"

    "폐하, 방금 급보가 날라왔습니다!"

    "급보?"

    "신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제르페누스의 두 눈이 빠르게 제임스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넋 나간 듯한 제임스의 얼굴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것이 연기라면 저놈은 정말로 대단한 연기자일 것이었다.

    "펠시온. 다녀와."

    제르페누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목소리를 낮췄다. 펠시온은 눈치껏 주인의 뜻을 알아차리고 곧장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대공 전하께서 사라지셨다고?"

    "죄, 죄송합니다!"

    "내가 분명 잘 지켜보라 하지 않았더냐?"

    "그, 그것이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도 대공께서 일어나지 않으시는 것 같아 무례를 무릅쓰고 방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이미 사라지신 후였습니다."

    "그럼 정확히 언제 사라지신 건지도 모르겠구나."

    헤르만은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신관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바닥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몸을 굽히고 채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신관은 가여워 보일 지경이었지만, 헤르만의 눈에는 조금도 차지 않았다. 용서는 말로 비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 말해야 하는 것이었다. 헤르만은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럼 수상한 점도 못 찾았겠구나."

    "그것이……."

    "내 화를 여기서 더 돋우고 싶지 않다면 바른대로 말하는 것이 좋을 거란다."

    헤르만이 웃자, 신관의 얼굴이 더욱 희게 질렸다. 신관은 요란스럽게 헤르만 앞에서 몸을 굽히며 서둘러 목소리를 높였다.

    "신전 내, 핏자국이 생겼습니다!"

    "핏자국? 무슨 핏자국?"

    "무슨 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전에 있는 대부분의 동상들에 핏자국이 생겨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동상? 그러면, 모든 동상에 피가 묻었던 건 아니었나 보구나."

    "신 프라임의 동상에만 남아 있었습니다."

    신관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신 프라임의 동상이 욕보였다는 건 프라임을 따르는 사제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불명예였다.

    "그걸 언제 알아차렸지?"

    "아침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밤이나, 새벽 기도 때는 못 알아차렸다는 거군."

    신전에서는 사치와 향락을 멀리하자는 의미에서 기름 대신, 촛불을 쓰고 있었다. 위치만 적당히 맞춘다면, 핏자국 정도는 얼마든지 어둠 속에 감출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땐 주변이 어두웠던 데다가 무엇보다 누가 감히 신성한 동상에 해코지를 할 거라 예상했겠습니까."

    "전하께서 그동안의 승리에 취하셔서 너무 오만해지신 모양이구나."

    헤르만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카벨레누스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저지른지는 모르나, 확실한 건 그는 모든 걸 계획한 채 일부러 신전으로 들어왔다. 속셈이 뭐든 간에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다.

    "……설마, 대공 전하께서 그런 짓을 하셨다는 겁니까?"

    젊은 신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황실이 아무리 대대로 신전을 경계해오긴 했어도 프라임은 제국의 시작을 함께해온 국교였다. 제국의 영웅이 제국의 신앙을 욕보이는 짓을 했다곤 믿고 싶지 않았다.

    "밤이 되면, 신전은 문을 닫고 이곳에는 사제들과 성기사들밖에 남지 않지. 대공 전하께서 하신 일이 아니시라면, 나는 내 사람들을 의심해야 할 거다."

    "맹세컨대, 저희 중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너희 모두 충실한 신의 종들이 아니더냐. 나는 너희를 의심하지 않는단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헤르만은 주름진 손으로 신관의 손을 잡아주며 웃었다. 헤르만의 너그러운 미소에 신관의 얼굴이 그나마 밝아졌다.

    "하나, 이대로 넘어가게 되면 신전의 꼴은 우습게 될 것이다."

    "그 말씀은……."

    "나는 너희들이 모시는 신 하나 지키지 못하는 성직자로 남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도 자비를 베풀기엔 황실은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모욕을 안겨주었지."

    "저희는 대신관님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신관이 고개를 내려 헤르만이 끼고 있던 반지에 입을 맞췄다. 그의 손에는 가장 고결한 성자인 대신관을 상징하는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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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카벨레누스는 가볍게 나무를 타고 올라 주변을 살폈다. 사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몸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물의 피를 주입받은 후부터 그의 감각은 보통 사람을 웃돌았다.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었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리곤 했다.

    "일단 이쪽에선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저쪽으로 가봐! 그 짧은 시간 내 멀리 가진 못했으니 이 근처에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카벨레누스는 자신을 추격하는 성기사들을 가만히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저 정도 병력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이곳은 헤르만의 영역이었다. 괜히 힘을 써 필요 이상의 소란을 일으키면 시간만 지체될 뿐이었다.

    "우리는 반대쪽을 수색하도록 하지."

    "저 방향은 별궁인데…… 아무리 그 괴물 대공이라 해도 벌써 저기까지 움직였을까요?"

    "나도 믿긴 싫지만, 혹시 모르지."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해야지. 혹시라도 그 괴물을 놓치기라도 하면 대신관께서 우릴 가만두지 않으실 테-."

    "……페틴?"

    성기사 무리가 흩어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숨죽이고 있던 사내가 움직였다. 남은 성기사는 다섯이나 되었지만, 사내는 비린내 나는 일에 누구보다 능숙했다. 맹수가 사냥감의 목덜미를 단숨에 물어 꺾어버리듯 사내의 손아귀에 기사 다섯이 소리소문없이 단숨에 제압당했다.

    "커억……!"

    "쉿. 소리 내지 마. 괜한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아."

    귓가를 속삭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는 높낮이 없이 일정했다. 목을 잡힌 성기사가 느릿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찰나의 시간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쓰러진 동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쓰러진 동료들은 자신이 왜 죽었는지 영문조차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이하게 꺾인 목만 아니더라도 그들이 죽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지하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으, 어아, 아……."

    소리를 내려고 해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잡힌 목에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입 말고 손을 움직여."

    재촉하는 목소리는 아까보다 톤이 낮아져 있었다. 성기사는 반사적으로 침을 꿀꺽 삼키려다가 욱신거리는 목구멍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꽉 눌린 목은 단지 침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성기사는 황급하게 방향을 가리켰다.

    "이 와중에도 거짓말이라……."

    성기사가 가리킨 방향을 확인한 카벨레누스가 헛숨을 뱉었다. 그 방향에는 성기사들이 묵는 숙소가 있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지. 제대로 말해."

    "……."

    "대답 안 할 건가?"

    "……."

    "정 대답하기 싫다면 할 수 없지. 내가 알아서 찾을 수밖에."

    혹시나 했는데, 영 쓸모가 없군. 가라앉은 사내의 목소리는 이제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성기사는 아랫도리가 축축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래를 타고 흐르는 액체의 감각이 섬뜩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적의 명령에 순순히 따라주면 안 된다는 걸 이성적으로 알면서도 목을 조이는 힘이 더 강해자 덜컥 겁이 났다. 압도적인 힘 차이는 차마 반항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마치 짐승의 아가리에 목이 잡힌 양 힘없이 축 처져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다, 아니 확실히 죽을 것이었다. 슈바르한 대공에 대한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과장되었을 거라 비웃었는데, 그를 둘러싼 무시무시한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제 목을 쥐고 있는 악력은 맨손으로도 사람을 찢는다는 소문과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결국 성기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방향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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