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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22)화 (122/164)

122화. 미끼

2021.05.03.

"확신이라. 재미있는 말을 하시는군요."

"전하께서도 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확신은 모르나, 적어도 대신관께서 제가 황위에 오르길 바라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야 황실과 신전이 지켜왔던 신념이 다시금 지켜질 테니까요."

카벨레누스가 손끝으로 느긋하게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 자리에는 반짝이는 금안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 번 무너진 믿음을 다시 되돌리기란 쉽지 않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 아니. 그 가짜가 살아남았기에 황실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는 걸요."

"……."

"모두가 금안이 사라진 황실을 걱정한다고 말하며, 동시에 황가의 건재함을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의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계시니까요. 카벨레누스를 잡고 있는 헤르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하의 핏줄마저 오염되었다는 걸 알면 황가를 향한 반감도 커질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찌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 아이를 제게 넘기십시오."

일순간 카벨레누스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헤르만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전하께서 그 아이를 거둔 것만으로도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신 건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마음만으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제 편이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시는군요."

"전하를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

품에 다 차지도 않는 작은 아이를 버리는 것이 날 위한 일이라고? 카벨레누스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지금 자리에서 핏대를 세워가며 외쳐봤자 소용없었다. 애당초 헤르만은 미카엘을 쓰기 좋은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아이를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해칠 마음이 없다는 걸 제가 어찌 압니까."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은 채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숨이 유난히도 뜨겁게 느껴졌다.

"아이를 건네주신다면, 차기 대신관으로 키우도록 하겠습니다."

"대신관이요?"

"아이에게 특별한 힘이 있지 않습니까? 응당 특별한 힘에 걸맞는 자리를 주어야죠."

"그게 어떤 힘인 줄 알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상극이라는 건, 서로의 장점이 각자의 단점이 된다는 뜻이지요. 다시 말해, 둘을 모두 가질 수만 있다면 보다 완벽해질 수 있는 겁니다."

카벨레누스는 웃지 않았지만, 헤르만은 웃었다.

"그 가짜는 제가 불안해하고 있을 거라 여기겠지만, 사실 저는 그런 사소한 일로 화내지 않습니다. 저는 큰일을 위해선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

"……일부러 초조한 척 구셨다는 겁니까?"

"가짜가 젊고 노련하다면 제겐 세월이 있습니다. 세 명의 황제와 함께했고, 그만큼 많은 일들을 겪었지요."

헤르만이 여유롭게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젊은 날의 치기는 잠깐이었다. 금세 타오른다는 건 그만큼 쉽게 꺼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하께는 마음에 품은 여자가 있으시지요?"

"대신관께서는 제 사생활에도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전하께서 아이를 포기하신다면, 앞으로 그녀에 대한 문제는 일절 신경 쓰지 않도록 하지요."

"그럼 그녀에게 황후 자리라도 주시렵니까?"

"원하신다면요."

"……대신관께서 제게 너무 많은 패를 보이시는군요."

카벨레누스의 턱근육이 불룩 불거졌다. 노골적으로 미카엘을 향한 욕심을 드러내면 의심을 살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헤르만은 욕심을 입 밖으로 내고 있었다. 그리고 보통 그런 경우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헤르만은 어떻게서든 미카엘을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저는 전하의 편이고, 무엇보다 전하께서 옳은 선택을 해주실 거라 믿고 있으니까요."

"옳은 선택이요?"

꽉 다물린 카벨레누스의 잇새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건 신뿐, 한낱 인간은 항상 선택을 해야 하죠."

"……."

"잘 생각하세요. 여자는 잃으면 그만이지만, 아이는 아닙니다. 얼마든지 또 가질 수 있죠. 물론, 검은 머리에 금안을 가진 아이로요."

"……제가 대신관의 뜻에 따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아니더라도 결국 그렇게 될 겁니다."

헤르만의 눈주름이 움푹 파였다. 복잡한 협박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제르페누스의 친모가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거 아닌 소문이라도 사소한 소문들이 쌓이고 쌓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의심을 하게 되죠. 그리고 그렇게 쌓인 의심은 결국 불신이 됩니다. 진실이란, 많은 이들이 믿는 이야기거든요."

"……."

"그런데, 가장 재미있는 게 뭔지 아십니까? 소문의 당사자도 얼마든지 소문에 휩쓸린다는 겁니다. 자신이 한 것이 아닌데도 다들 그렇다고 말하면 정말로 자신이 그랬다고 착각하게 되거든요."

그렇게 죽인 자들이 수백이었습니다. 헤르만은 뒤로 머리를 젖힌 채 턱을 세웠다. 주름진 눈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먹이를 코앞에 둔 뱀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마녀 이야기는 실패했지만, 다음번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

"바로 대답하지 않으셔도 되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세요. 이 늙은이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까요."

헤르만은 다시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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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카벨레누스는 입매를 일그러트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미카엘을 향한 헤르만의 탐욕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프라임에 대한 조사를 끝내고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만 했다. 지금이야 다들 미카엘을 노리고 있지만, 그건 결국 마물을 부리는 힘 때문이었다. 미카엘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이 들통나면 누구도 미카엘을 살려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한 번이라도 빼앗기면 끝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이를 꽉 다문 채,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앞에는 프라임 신전의 상징인 프라임의 동상이 있었다.

'이것도 아니군.'

거대한 장검을 두 손에 쥐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동상은 모두가 찬양하는 위대한 신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지만, 정작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물이 말하던 프라임의 흔적은 같은 건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런 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면 진작에 느꼈겠지.'

카벨레누스는 표정을 잔뜩 구겼다. 아주 어릴 때부터 봐왔던 프라임의 동상이었다. 신전에 와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신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동상에 특별한 힘이 있다면 이미 예전에 느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카벨레누스는 차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신전까지 아니라면 더는 의심 가는 곳이 없다는 것 역시, 그는 알고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주변의 인기척을 한 번 확인하고는 품속 넣어둔 주머니를 꺼냈다. 단단히 밀봉된 주머니 안에는 붉은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이 방법까지 안 되면, 그 영감의 창고라도 뒤져야겠지.'

병의 마개를 뜯자마자, 익숙한 체취가 훅 코를 파고들었다. 카벨레누스는 냄새에 취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병을 기울여 핏방울을 바닥에 떨궜다. 떨어진 피는 몇 방울 되지 않았지만 짐승에 가까운 예민한 후각은 귀신같이 냄새를 알아차렸다. 사내에게 있어서 피 냄새는 무엇보다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래된 쇠처럼 싸한 피 냄새에는 역겹기보다는 달게만 느껴졌다. 피에는 알리시아의 체향이 섞여 있었다.

'미끼를 물어주면 좋을 텐데.'

마물에게 있어서 알리시아의 체취는 유혹적이었다. 만약 프라임이 근처에 있다면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었다. * * *

"날 가지고 노는 건 재미있었나, 신의 대리자."

"폐하를 속인 건 아닙니다!"

"다른 자도 아니고, 로아킨을 끌어들였으면서 날 속인 게 아니라고?"

제르페누스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로아킨과 엮이게 된 것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거절하던 절 이곳으로 부른 건 폐하셨습니다."

"그 거절부터 날 속이려고 한 거 아닌가?"

"제가 속이지 않았다는 건, 제 뒷조사를 하신 폐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조사한 바에 따르면 네 놈은 아주 결백했지. 그런데, 그거 아나? 너무 결백해 보이면 오히려 의심스럽다는 거."

제르페누스가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펠시온이 제임스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제임스는 부쩍 가까워진 칼날 끝에 뒷걸음치다가 등에 닿은 벽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더는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잊으셨습니까? 저는 이미 폐하와 한배를 탔다는 걸요!"

"한배?"

"제가 신의 대리자였기에 폐하께서 그간 불안하던 황권을 그나마 회복하신 거 아닙니까!"

제임스는 등 뒤로 숨긴 주먹을 꽉 쥐었다. 금방이라도 절 죽일 듯한 제르페누스가 두려웠지만 참을 순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은 펜리르가 예견한 것과 똑같았다. 이번에도 그의 명령에 따르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내 앞에서 위세라도 떨려는 건가?"

제르페누스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제가 좋든, 싫든 간에 폐하께서는 절 내치실 수 없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임스가 애써 양 입술을 끌어올렸다. 제르페누스는 그런 제임스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손을 들었다. 짜증나긴 하지만 제임스의 말이 옳았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제 와서 신의 대리자를 멋대로 바꿀 순 없었다. 괘씸해도 지금은 자신에게는 신의 대리자가 필요했다.

"……좋아. 네 말대로 지금은 같은 배를 탄 입장이니 이번 한 번만 넘어가주지. 하지만 다음번은 없어."

"물론입니다."

제임스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펠시온의 검이 치워졌음에도 제임스의 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르페누스는 창백하게 질린 제임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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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저런 꼴을 보면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화가로 살아왔던 탓일까, 제임스는 모든 일에 쉽게 놀라고 겁을 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담력이 큰 사내는 못 됐다. 그럼에도 제임스는 제 목소리를 냈다.

'분명 머리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데.'

파티 좀 몇 번을 데려가줬다고 귀족 놀이에 푹 빠진 것만 봐도 뻔했다. 사람들이 추켜세워주자, 자신이 정말로 신의 대리자라도 된 양 고귀한 척 구는 꼴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멍청이 중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한 건, 그렇게 멍청해 보이다가도 중요한 순간마다 정답을 내놓는다는 거였다.

'둘 중 하나겠지. 나까지 속일 정도로 저놈의 연기가 뛰어나거나…….'

혹은 뒤에 누가 있거나. 제르페누스는 제 이복동생을 떠올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는 동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저런 멍청이를 이용해먹는 건 카벨레누스의 방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를 굴려도 이번 일을 계획했을 마땅한 후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헤르만이 잃은 것들을 생각하면, 카벨레누스밖에 후보가 남아 있지 않을 뿐이었다. 의심에 확신을 갖기 위해선 괘씸해도 조금 더 곁에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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