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121)화 (121/164)
  • 121화. 확신

    2021.04.29.

    "전하께서 전부 처리하신 겁니까."

    "보면 모르나."

    돌아온 서늘한 답변에 성기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슈바르한 대공이 괴물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형형한 금안을 가진 사내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괴물처럼 보였다. 웬만한 맹수라도 저 눈빛을 보면 오금이 저려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을 것이었다.

    "귀찮은 것들이 끼어든 탓에 잔당을 놓쳤어."

    "저, 저희가 추격할까요?"

    "내가 놓친 사냥감을 너희가 잡아보겠다고?"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구겨지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숨소리가 멈췄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얼른 알로거스트로 가지."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내가 괜히 여기까지 온 것 같나?"

    카벨레누스가 짜증을 토하며 검 손잡이를 쥐자, 이번에는 동시에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탐색하듯 천천히 움직이는 사내의 시선은 잔뜩 굶주린 맹수 같았다. 사내는 아직 피에 굶주려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절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그나마 네가 나을 것 같군."

    "네, 네?!"

    "당장 갑옷과 투구를 벗어."

    "네? 하지만 제가 입고 있는 건 신전의 성기사들에게만-."

    "두 번은 말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성기사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성기사에게 있어서 신전의 교리는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교리와 목숨이 저울질당하는 상황이 오니 눈앞이 캄캄했다.

    "안 벗나?"

    "버, 벗습니다!"

    신께는 송구스럽지만 젊은 성기사에겐 아직 목숨이 더 소중했다. 성기사는 다급하게 갑옷의 연결부를 풀기 위해 버둥거렸다.

    "느리군."

    "원래 갑옷은 혼자 못 입고 벗는-."

    "그럼 너희들이 벗는 걸 도와주면 되겠군."

    "탈의는 종기사들이나 하는……."

    눈에 칼이라도 박은 건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시선만 봐도 위협적이다. 성기사들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카벨레누스가 지목한 성기사의 갑옷과 투구를 어설픈 솜씨로 벗겨냈다.

    "수도로 돌아가기 전까진 같이 행동하지."

    "네?"

    "나올 때와 들어갈 때의 인원수가 맞아야 의심을 사지 않지."

    "그러면 저는 어떻게……."

    갑옷을 빼앗긴 성기사가 느릿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그걸 왜 내게 묻지?"

    "네?"

    "내가 놓친 사냥감이나 추격하고 있든, 말든 간에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지."

    "그렇지만 전하께서 제 갑옷을 가져가셨-."

    "그래서?"

    카벨레누스가 삐딱하게 고개를 세웠다. 사내에겐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전하께서-."

    "시끄러우니 입 다물어."

    거친 손짓에 성기사들은 눈치껏 카벨레누스의 갑옷 시중을 들었다. 무자비한 폭정이었지만 누구도 차마 입을 뗄 순 없었다. 카벨레누스의 악명은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그의 앞에서 못한다는 소리는 꺼낼 수 없었다.

    1663839669768.jpg

    * * *

    "엄마, 이것 봐. 어때?"

    "잘 그렸는걸. 아빠가 보면 좋아하실 거야."

    "……."

    "왜 그래?"

    "역시, 이상해. 아빠라는 말."

    미카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오물거렸다. 알리시아는 아이의 둥근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가 이상한데?"

    "그냥, 다 이상해. 그것도 너무 이상해서 아저씨가 들으면 뭐라고 할 것 같아."

    "아저씨가 돌아오면 아빠라고 불러주고 싶다면서."

    "그렇긴 하지만, 이상하잖아."

    "안 이상해."

    "……진짜?"

    삐죽 고개를 든 미카엘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알리시아는 미소를 머금으며 어린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볼은 말랑말랑하니 무척 부드러웠다.

    "응. 엄마는 오히려 듣기 좋은걸. 그리고 아빠도 들으면 좋아하실 거야."

    "정말?"

    "물론이지."

    "그럼 아저씨가 올 때까지 연습할래."

    "연습?"

    "원래 뭐든 연습하면 더 잘하게 되잖아. 열심히 연습해서 아저씨가 돌아오면 불러줄래."

    미카엘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반짝거리는 아이의 눈은 열의로 열렬히 불타고 있었다.

    "그러려면 아빠가 빨리 와야겠다."

    알리시아의 손이 부드럽게 미카엘을 어루만졌다. 미카엘은 엄마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배시시 웃었다.

    "나랑 약속했으니까 금방 올 거야."

    "약속?"

    "아저씨한테 내가 세 번째 소원을 빌었거든."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

    "비밀."

    "응?"

    "아저씨가 돌아오면 알려줄게."

    해맑게 웃어 보이는 미카엘에 알리시아는 더 캐묻길 포기하고 그냥 웃었다. 부자간의 남모를 비밀이 한두 개쯤 있어도 좋은 것 같았다.

    "그런데, 연습하려면 지금부터 아저씨말고 아빠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안 돼. 연습은 나 혼자 해야 해."

    "어째서?"

    "이왕 하는 거라면 아저씨 앞에서 가장 먼저 해주고 싶으니까."

    "그렇게 해주면, 아빠가 정말로 좋아하겠다."

    "당연히 그래야지. 누가 불러주는 건데."

    미카엘은 힘껏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림 속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는 검은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 그림은 여기까지만 그리고 정리할까?"

    "그럼 아저씨 그림은?"

    "저기 둘까? 물감이 마른 후에 잘 포장해서 선물하게."

    "대신, 옮기는 건 내가 할래!"

    "할 수 있겠어?"

    "당연하지!"

    미카엘은 힘차게 대답하며 캔버스를 집어 들었다. 그릴 때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막상 다 그리고 보니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제아무리 냉정한 아저씨라도 자신의 그림을 보면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조심해서 옮겨야 해."

    "맡겨만, 으앗!"

    "미카엘!"

    알리시아가 재빨리 달려와 미카엘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아이는 놀란 것 외에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엄마가 조심하랬잖아."

    "미안해."

    "아니야.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

    "그치만, 아저씨 그림이……."

    미카엘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코를 훌쩍거렸다. 처참히 떨어져 바닥을 구른 카벨레누스의 그림은 덜 마른 물감이 뒤엉켜 처음의 모습과 다르게 뭉개져 있었다.

    "괜찮아. 그림은 다시 그리면 돼."

    알리시아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캔버스를 집어 들었다가 그대로 멈췄다. 뭉개진 물감으로 인해 그림 속 카벨레누스가 어쩐지 우는 것처럼 보인 탓이었다.

    '괜한 생각이겠지…….'

    알리시아는 숨을 삼킨 채 일그러진 카벨레누스의 눈가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닿은 물감이 묻어나 손을 엉망으로 만들었음에도 차마 손을 뗄 수 없었다. 아무리 손끝으로 비벼도 돌아오지 않는 일그러진 눈매가 자꾸만 거슬렸으니까. * * *

    "설마 전하께서 이번 일과 관련이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헤르만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신의 대리자라는 이름은 제게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전하께서 제가 주신 이름을 거절하신 줄 알았는데요."

    헤르만의 진한 미소에 카벨레누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알리시아를 마녀로 만들기 위해 작업을 해놓은 후, 보란 듯이 내주었던 칭호였다. 그대로 군대를 몰고 신전을 덮치지 않고, 헤르만의 서신만 구겨버린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다면, 폐하의 농간일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이렇게 수도로 오는 것이 번거로웠을까요."

    "전하 정도라면, 몰래 숨어들 수도 있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누구와 달리, 도둑이 아닙니다."

    카벨레누스는 헤르만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군요."

    헤르만의 입꼬리가 눈에 띄게 실룩거렸다.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전하의 편입니다."

    "그런 분이 가짜와 잘만 어울리시던 걸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전하를 위해서였는걸요."

    "절 위해서요?"

    "폐하께서 제 면담 요청을 왜 계속 거절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대신관을 내치실 거라면, 제가 돌아왔던 날 그러셨어야지요."

    "그때는 절 이길 수 없다 판단하셨기 때문이겠죠."

    헤르만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련한 대신관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는 데에 능숙했다.

    "지금은 뭐가 다릅니까."

    "폐하께서는 신의 뜻을 가졌다고 착각하시고 계시지요. 어리석게도요."

    "지금 궁에 머물고 있는 신의 대리자 말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신의 대리자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가짜지요."

    잔뜩 가늘어진 헤르만의 눈매 사이로 혐오가 엿보였다.

    "그자가 움직여준 덕분에 대신관과 직접 연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건 사실이나, 솔직히 썩 반갑진 않더군요."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로아킨에게 농락당한 건 지난 세월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계획이 있으십니까?"

    "그렇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인 것입니다."

    "그럼 제게도 방도를 일러주실 수 있으십니까?"

    헤르만은 두 손을 깍지낀 채로 턱을 괬다. 제르페누스든, 카벨레누스든 다들 버티는 데에는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면 안전할진 몰라도 자신의 염원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서든 어느 한쪽이라도 먼저 잡아먹어야 다음이 유리해졌다.

    "폐하께서는 신의 대리자를 앞세우셨습니다만, 그자는 검증받은 진짜 대리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가짜의 진실을 폭로하란 말씀이십니까?"

    "어떤 가짜도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드리는 겁니다."

    카벨레누스의 눈에 힘이 실렸다.

    "그 계획에 제가 할 일이 있습니까?"

    "대신관께서 정식으로 절 신의 대리자로서 공표해주시면 됩니다."

    "지금껏 두 명 이상의 대리자는 없었습니다. 신의 대리자는 단 한 명뿐이었죠."

    "그렇기에 더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겠지요."

    "설마……."

    "다들 편을 가를 겁니다. 그리고, 진짜가 누군지 알아내기 위해서 더욱 목소리를 높일 겁니다."

    카벨레누스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연히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겁니다."

    "너무 확신하시는 거 아닙니까?"

    "요즘 어떤 소문이 도는지 알면 당연히 확실할 수밖에요. 솔직히 제국인들 중 누가 로아킨을 좋아합니까? 애당초 녹색 눈의 황제는 그간 제국에서 쌓아 올린 근간을 무너트리는 존재였는 걸요."

    새하얗게 샌 눈썹 아래로 두 눈이 반짝거렸다. 의견을 둘로 나누면 그것은 분쟁이 되는 법이었고, 분쟁이 불러온 혼란이야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기 가장 좋은 시기가 되어주었다.

    "로아킨과의 추문에 이어서 새로운 신의 대리자까지 등장하면, 가짜의 자리는 위태로워질 겁니다. 특히나, 신의 대리자가 슈바르한 대공이라면 더욱 그럴 테고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 새로운 신의 대리자를 선포하기에 앞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확신이죠."

    헤르만이 붙임성 좋은 노인처럼 카벨레누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노인의 살구씨처럼 쪼글쪼글한 얼굴에는 음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16638396697685.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