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사내가 노리던 목표
2021.04.26.
"이렇게 성을 비우셔도 되는 겁니까?"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볼일이 있다고 쉽게 왕래할 거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펜리르는 불만을 감추지 않으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카벨레누스와 마지막 연락을 했을 때만 해도 그는 슈바르한에 있었다. 아무리 혼자 움직였다 해도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순 없었다. 무슨 특별한 수를 쓴 게 틀림없었다.
"할 수 없지.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니까."
"매번 그렇게 짧게 이야기를 끊으시면 재미없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지."
"쓸데없는 말은 아니죠. 전하께서 움직인 방법을 썼다면, 저희들도 좀 더 빨리 약속했던 임무를 처리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펜리르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카벨레누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을 흘겨보는 시선에 인상을 쓰다가 결국 긴 한숨을 뱉었다.
"어차피 그대는 못 쓰는 방법이야."
"시도하기 전까지는 모르죠."
"괜히 잘못 시도했다간 죽기 십상이지."
"그렇게 위험한 방법입니까?"
"그래."
카벨레누스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마차 같은 매개체를 써오던 순간이동 마법을 맨몸으로 연속해서 사용하니 확실히 몸에 무리가 갔다. 보통 인간과 다른 몸을 가진 자신도 이 정도인데,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릴 것이었다.
"그럼 위험을 무릅쓰고 절 찾으신 데에는 이유가 있으시겠군요. 예정대로 계획이 잘 진행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오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펜리르는 손목에 찬 팔찌를 보란 듯이 내보였다. 슈바르한의 마법 기술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말로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확실히 부러웠다. 아직 실험단계라곤 하나, 기존의 통신구를 휴대할 수 있게 작게 만들어 어디서나 연락을 취하는 마도구는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어서."
"고작 그런 일로 전하께서 움직이셨단 말입니까?"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아."
"……."
잘만 웃던 펜리르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긴 했지만, 그건 정말로 시간 벌기에 불과하더군."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 기분이야."
카벨레누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수프 덕분에 알리시아의 몸 상태는 나아져갔지만, 그게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었다. 수명이 조금 늘어났다고 끝이 아니었다. 억지로 늘린 수명의 벌처럼 독초로 만든 수프를 먹고 난 다음 날이 되면 알리시아는 어김없이 열병을 앓았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정작 알리시아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혹시라도 어린 아들의 귀에 비명이 들릴까, 사내의 품에 안겨 애써 고통을 참아내는 게 전부였다.
"이대로라면 한 2년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괴로워하는 걸 뻔히 알면서 가만둘 순 없어. 한시라도 빨리 방법을 찾아야 해."
"조급해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프라임을 찾으면 해결될 거야."
"프라임이라고 하면, 제국의 신 아닙니까?"
"그가 알리시아를 살릴 방도가 될 수 있을 거라더군."
카벨레누스의 두 눈에 안광이 비쳤다. 펜리르는 용광로의 불길과도 같은 사내의 눈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카벨레누스는 설명엔 소질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진심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 더는 묻지 않도록 하죠. 결국 중요한 건 결과니까요. 그래서 뭘 하시려는 거죠?"
"나는 이대로 수도에 있는 프라임 신전으로 갈 생각이야."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군요."
"할 수 없어. 이게 최선이거든."
"최선이요?"
"프라임과 관련된 유물들은 전부 확인해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 이제 남은 건 하나야."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봤다. 제국의 수도, 알로거스트가 있는 방향이었다.
"프라임 신전이라고 해서 프라임이 존재한다고 볼 순 없죠."
"확률상으로는 가장 유력해. 그리고……."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때의 감정은 이제 타인의 것처럼 낯설게만 느껴졌지만, 첫 살인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일은 너무도 조용하게 넘어갔지."
"그날이요? 그때가 언제인데요?"
"……."
카벨레누스는 대답 없이 그저 머나먼 하늘만 가만히 바라봤다.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기에 묻어뒀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그날의 사건은 이상하리만큼 간단하게 수습되고 은폐되었다. 그리고, 그 일을 벌일 만한 인물은 한 명뿐이었다.
"사람 궁금하게, 왜 말만 하고 답은 안 주십니까."
펜리르의 투정에 카벨레누스는 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자는 어떻게 되었지?"
"질문은 제가 먼저 했는데…… 뭐. 어쩔 수 없죠. 저는 힘 없고 연약한 입장이니까요. 위대한 대공 전하의 비위를 맞춰드릴 수밖에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는 펜리르에 카벨레누스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전하께서 좋아하실 만한 이야기를 들려드리자면,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황제의 실험체와 절 추격해 온 로아킨 군대가 충돌해 몰살당한 것처럼 완벽하게 꾸며두었죠."
"황제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군."
"굉장히 좋아할 겁니다. 신경을 확실히 긁을 수 있게 로아킨 시신에는 신의 대리자를 따르는 추종자의 옷을 입혀놨거든요."
피로 얼룩진 로브는 더는 흰색이 아니었지만 신의 대리자가 썼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신의 대리자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입었던 로브는 로아킨의 흔적을 가리기 위한 옷인 동시에, 신의 대리자와 로아킨의 연결고리였다.
"로아킨과 엮여 있는 신의 대리자가 괘씸하겠지만,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하겠지."
"어쩌겠습니까. 본인이 신나게 얼굴을 보이고 다닌 죄죠."
진상이야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제르페누스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임스를 받아들였고, 덕분에 무너지던 황권을 회복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받아들인 신의 대리자를 이제 와서 내칠 수도 없을 것이었다.
"소문은?"
"충분히 퍼졌습니다. 덕분에 다들 꽤 혼란스러울 걸요. 혐오하던 로아킨과 고귀한 신의 대리자. 둘의 조합은 썩 어울리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황제와는 잘 어울리지."
"그야, 로아킨 혼혈 황제와 로아킨이 따르는 신의 대리자로 둘을 묶을 수 있으니까요."
"덕분에 황제는 이성을 잃겠지."
평생 로아킨의 꼬리표를 떼기 위해 아등바등해왔던 제르페누스였다. 주변의 눈이 있어 제임스를 죽이진 못하더라도 분노를 끌어올리는 건 가능할 것이다.
"자신이 풀어놓은 실험체들이 날뛰는 소식을 기대했을 텐데, 돌아온 건 로아킨과의 추문이니 황제 입장에선 얼마나 화가 날까요."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물론 알죠. 번거롭게 신의 대리자를 꾸며낸 것도 그 때문인 걸요. 기대하십시오.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펜리르가 느긋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계획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 하는군."
카벨레누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순수한 감탄이었다.
"제가 괜히 차기 맹주 소리를 듣는 게 아닙니다. 제 아비의 도움으로 어울리지도 않은 자리에 오른 녀석과는 비교도 되지 않죠."
"그렇군."
"보통 이럴 때면, 과거사를 묻는 말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전하께서는 참 냉정하십니다."
"……."
펜리르는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지만, 정작 카벨레누스의 얼굴에는 일말의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펜리르는 힘없이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영감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지. 그대가 요청한 대로."
"영감님 성격에 화가 많이 나셨을 것 같군요."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네. 저는 슈바르한으로 돌아가자마자, 가장 먼저 영감님부터 죽일 겁니다. 저는 영감님께 쌓인 게 좀 있거든요. 물론 전하께서는 이런 이야기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으시겠지만요."
펜리르는 일부러 소리 내 웃었지만, 이번에도 웃는 건 그뿐이었다. 펜리르는 흘끔 멀리 떨어져 망을 보고 있는 베르베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뗐다.
"그거 아십니까? 절 추격해 온 병사들 중 영감님의 아들은 없었습니다."
"본인이 오지 않은 건가."
"영감님이 일부러 부르지 않은 거겠죠. 제가 더 강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펜리르는 보란 듯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지만, 반응 없는 카벨레누스는 좋은 관객은 아니었다.
"……영감님다운 행동은 아니지만, 그게 진짜 부모인 거겠죠. 그렇게 울부짖던 로아킨의 명예나, 본인의 목숨보다는 자식이 더 소중하단 뜻이잖아요."
"내게 위로라도 바라는 건가."
"바란다 해도 안 해주실 거 압니다."
"……."
"영감님을 치기로 결심한 후부터 이런 결말이 나올 걸 알고 한 거지만, 역시 시원섭섭한 건 어쩔 수 없네요. 솔직히 좋게 시작한 관계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원망만 있진 않았습니다. 나름 잘 맞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거든요."
"……."
"혹시나 했는데, 진짜 위로 한마디 안 해주시는군요."
펜리르는 머리를 헝클어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당초 위로를 받으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기에 상관없었다. 항상 좋은 선택만 있을 수 없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럼 전하께서 관심 없는 이야기 말고, 다시 흥미가 생길 만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펜리르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에 닿았다.
"정말로 저런 것들을 상대해야 하는 겁니까?"
"상황에 따라선."
"저들 모두 민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싸울 때는 단련한 병사들 못지않게 강했죠."
"그래서?"
"그래서라뇨? 설마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신 건 아니시죠?"
"아니. 알아."
"그런데도 그렇게 덤덤하십니까? 저희 군대만 하더라도 저놈들의 습격 때문에 연락이 끊겨서 한참 고생했어야 했다고요. 그런데 저런 놈들이 단체로 우글거리게 되면……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가늘어진 녹색 눈이 염탐하듯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훑었다. 사람들의 표정을 읽는 건 펜리르에겐 익숙한 일이었지만, 무심한 사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는 건 매번 어려웠다.
"그들이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끝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실험에 가장 중요한 재료는 마물의 피였지만, 마물이 사라진 지 벌써 8년이었다. 아무리 실험이 완성단계라 해도 슬슬 재료 고갈에 시달릴 때였다. 제르페누스의 군대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끝이 없다고 어떻게 확신하시죠?"
"괴물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게 우리 쪽에 있거든."
"그게 뭔지 물어봐도 이야기해주시지 않으실 거죠?"
카벨레누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펜리르는 눈치껏 백기를 선언하며 물러났다. 괜한 호기심도 상대를 봐가면서 부려야 하는 법이었다.
"할 수 없죠. 전하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니, 포기하고 볼일이나 봐야죠. 이봐, 베르베!"
"왜 부르시는 겁니까. 귀찮게."
"이번에는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해."
펜리르는 다가올 전투를 위해 검을 뽑아 든 베르베를 향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소맹주."
"검보다 달릴 준비부터 하라는 소리야. 이제부터 우리는 본부대와 합류해서 함께 움직일 예정이거든."
"본부대 쪽으로 이동하려면 먼저 처리부터 해야죠. 귀가 먹으신 게 아니시라면, 저 소리가 안 들릴 없으실 텐데요?"
"괜찮아. 그 부분은 우리 멋진 대공 전하께서 해결해주실 테니까."
펜리르가 카벨레누스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대는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것 같군."
카벨레누스는 능글맞게 웃는 펜리르를 어이없다는 투로 흘겨보고는 그대로 검을 뽑았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리고, 애당초 전하께서는 절 보러 이곳으로 오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알면 슬슬 도망갈 준비부터 하지 그래? 내가 실수로 로아킨의 차기 맹주를 베어버리면 곤란하잖나."
카벨레누스는 한쪽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며 검을 뽑았다. 애당초 사내가 노리던 목표는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