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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19)화 (119/164)
  • 119화. 은혜를 갚는 일

    2021.04.22.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멜타 공작은 폐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신경 쓰지 않기에는 너무도 많은 귀족들이 멜타 공작을 따르고 있지. 주의를 기울여서 나쁘진 않아."

    "그래서 더 볼 것이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원래 늙은이들은 제 것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하거든요."

    만다린 후작은 키득키득 웃고는 와인잔을 기울였다. 잔을 흔들 때마다 안에 있던 와인이 찰랑거리며 맑은소리를 냈다. 잔에 담긴 와인은 피처럼 진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차라리 이빨 빠진 호랑이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 편이 훨씬 도움될 것 같지 않습니까?"

    "다른 이야기?"

    "폐하의 혼사 문제 같은 거 말입니다."

    "또 그 이야기인가."

    "혼사는 중요한 문제니까요."

    중요한 건 네 놈의 권력이겠지. 제르페누스는 열망 어린 만다린 후작의 눈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다린 후작이 제르페누스의 편을 드는 건, 순수한 지지가 아니었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황제가 결함 있는 여동생을 가장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상대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그 중요한 혼사도 의미가 없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폐하를 지킬 테니까요."

    보란 듯이 가슴을 두들기는 만다린 후작을 보며 제르페누스는 피식 웃었다. 만다린 후작은 수도에 수두룩한 속이 빤히 보이는 멍청이들 중 하나였다. 입으로만 ‘폐하’거리며 살랑거릴 뿐, 그의 시선에는 야만인 혼혈 황제를 깔보는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

    '역시, 저들도 함께 정리해야겠군.'

    제르페누스는 와인을 마시며 파티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귀족들을 바라봤다. 황위를 이은 후부터 혹시라도 괜찮은 자가 있을지 눈여겨봤지만 다들 똑같았다. 저들은 만다린 후작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의 개들이었다. 잘 쓰고 버리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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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딴 걸 만들다니. 황제, 그놈 미친 거 아니야?"

    펜리르는 날카롭게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팔 하나가 잘려 비명을 내지르는 와중에도 맹목적으로 적을 향해 달려드는 실험체들은 겉모습만 사람의 가죽을 쓰고 있을 뿐이지, 마치 이성이 없는 짐승 같았다.

    "괜한 소리는 그만하시고 집중하십시오."

    펜리르와 등을 맞대고 있는 베르베가 인상을 찌푸리며 실험체의 공격을 막았다.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죽음을 불사하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실험체들은 상대하는 건 고역이었다.

    "설마 내가 이 정도도 못 해치우려고."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대로 실험체 하나의 목이 댕강 날아갔다. 펜리르는 자세를 고쳐잡으며 무너지는 시체를 피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머리든, 심장이든 한번에 목숨을 끊어야 해. 안 그러면, 우악!"

    "누가 할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펜리르 대신, 공격한 실험체를 베어낸 베르베가 대놓고 혀를 쯧 찼다.

    "제 동료를 베면서까지 달려드는 놈의 공격을 무슨 수로 예측해."

    아무리 죽었다 해도 동료의 몸까지 찌르며 적을 향해 공격하다니. 펜리르는 바닥에 널브러진 병사들의 시체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차라리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면 좋으련만, 죽은 자들의 얼굴은 전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군."

    "새삼스러운 평가를 하시는군요."

    베르베는 마지막 남은 실험체까지 처리한 후, 검을 거둬들였다. 오랜 싸움 탓에 그녀의 몸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넌 너무 냉정해."

    "소맹주께서 너무 경박스러우신 겁니다."

    "소맹주에게 경박스럽다니."

    "제게 경박스럽다는 말을 듣기 싫으시면 맹주가 되십시오. 언제 잃을지 모를 소맹주 자리보다는 그편이 제 안위를 맡길 만할 테니까요."

    베르베는 덤덤히 대꾸하며 몸을 낮춰 죽은 실험체의 상태를 확인했다.

    "예전과 달리, 단련된 몸이 아닙니다."

    "싸우기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육체노동에 익숙한 몸이지."

    "민간인이군요."

    시신들을 뒤적거리던 베르베의 손이 멈췄다. 실험체 중에는 노인도 섞여 있었다.

    "그게 무서운 거지. 농기구나 들었을 법한 사람들을 싸우는 괴물로 만든 거잖아."

    "만약, 이런 상태의 자들을 끝없이 만들 수만 있다면……."

    "최강의 군대가 되겠지."

    "……저들의 실험은 어디까지 진행됐을까요?"

    베르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금 전의 괴물들이 단체로 달려들 거라고 상상하니 절로 울적해졌다.

    "이렇게 보여줄 정도면, 다 완성되었다고 봐야겠지."

    "이번 싸움에서 슈바르한 대공이 이길 수 있을까요?"

    "당연히 이겨야지. 안 그러면, 우리도 끝인걸. 현실적으로 현재 제국에 견줄 만한 병력을 가진 건 슈바르한 대공뿐이고, 그렇다고 로아킨을 경멸하는 황제가 우리를 받아줄 리 없잖아."

    펜리르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제국이 감추고 있던 그늘을 확인하면 할수록 우울해졌다. 이 땅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들이 꼬여 있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좀 더 로아킨에서 숨죽이고 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르베는 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약한 소리를 하는 것치곤 그녀의 눈은 사냥을 기다리는 맹수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오래간만에 이렇게 오래 바람도 쐴 수 있잖아."

    "정확히 말하면, 소맹주의 사심 덕분이죠."

    "사심이라니."

    펜리르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지 않았습니까."

    "계획은 원래 쉽게 바뀌는 거고, 무엇보다 내가 아무리 불효자라 해도 날 키워주신 분의 목까지 내 손으로 따는 건 그렇잖아."

    "슈바르한에서 영감님을 정리하고 오겠다고 말을 꺼내셨던 건 소맹주셨습니다. 타국에서 조용히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고까지 말씀하시면서요."

    베르베가 별 표정 없이 고개만 까닥거렸다.

    "할 수 없지. 나는 영감님은 좋아하지만, 맹주는 그래선 안 되는 거잖나."

    "제가 소맹주를 따르는 건 그 때문이죠."

    "그 때문?"

    "소맹주는 결국 감정보다는 이성이 앞서는 사람이잖습니까."

    "어쩐지, 다른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으로 들리는데?"

    펜리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할 거면 제대로 하라는 소리입니다. 그게 소맹주의 전문 아닙니까?"

    "내 전문이 뭔데?"

    "웃는 낯으로 다른 사람에게 칼 꽂도록 시키는 것이요."

    "그건 너무 냉정한 평가 아냐?"

    펜리르는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베르베는 딱히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다음 말을 이었다.

    "제가 소맹주를 따르는 건 그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소맹주는 다른 사람에게 칼을 들게 하고, 그걸 휘두르게 만드는 사람이거든요."

    "……."

    "소맹주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얻을 수 있는 계획을 세우십시오. 저는 그 계획에 맞게 움직이고, 소맹주가 원하는 걸 가져오겠습니다."

    "영감님이랑은 정반대의 소리를 하네."

    "체르, 그 영감은 자신이 맹주인 줄 착각하는 양반이니까요. 로아킨을 위한다는 말로 맹주의 판단을 흐리고, 심지어 그 핏줄까지 넘봤죠. 소맹주가 그자의 손에서 키워진 것도 결국 그 때문 아닙니까?"

    질색하는 베르베의 얼굴에 잠깐이나마 보기 드문 표정 변화가 엿보였다. 체르는 스스로가 대단한 충신인 척 굴어왔지만, 그 역시 맹주 가문을 위협하던 가신 중 하나였다. 다들 체르가 무서워 다른 말은 하지 않았을 뿐, 다들 그가 어린 맹주의 아들을 요구한 까닭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저는 소맹주를 맹목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뜻은 존중합니다. 소맹주께 이해할 만한 이유를 대면 무조건 그 뜻에 따를 겁니다."

    "그건 이유를 잘 만들면, 미친 놀음에도 어울려줄 거라는 뜻으로 들려."

    "제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는 게 어렵긴 하겠지만요. 절절한 사랑놀이 정도는 한 번쯤 눈 감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달콤한 유혹이네."

    "소맹주의 첫사랑이 이뤄지면 지긋지긋한 술버릇도 끝날 거 아닙니까."

    펜리르의 첫사랑은 그의 측근이라면 한 번쯤은 들은 이야기였다. 본인은 잘 숨겼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지만, 펜리르는 술만 마시면 아무 부하나 잡고 엉엉 울며 과거 이야기를 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간 힘겹게 버틴 세월이 있으니 한 번쯤은 맹주로서가 아니라, 남자로서 살 수 있게 눈감아줄 아량도 있었다.

    "그래서 언제 하실 겁니까?"

    "기대를 저버려서 미안하지만, 딱히 저지를 마음은 없어."

    "맹주의 입장 때문입니까?"

    "그보다는 그 여자가 날 안 좋아하거든."

    "매력이 없으시군요, 소맹주."

    "매력이 없다니! 내가 얼마나 멋진 신랑감인데!"

    펜리르가 발끈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럼 뭐 합니까. 좋아하는 여자 마음 하나 못 잡는 남자인데."

    "이미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던 걸 어떡해."

    "소맹주에게 더 매력 있었으면 뺏어올 수 있었을 거 아닙니까."

    "아냐. 나는 못 해."

    "역시, 소맹주는 매력이……."

    "그게 아니라, 나는 그런 표정 못 짓게 한다고."

    펜리르는 푹 고개를 숙였다. 기대를 안 했던 건 아니었다. 자신은 이제 힘없는 꼬마가 아닌, 어엿한 어른이니 얼마든지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고, 특히나 오래된 것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 좋았다.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을 품어왔는지 밝히면,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달라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여자의 앞에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내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으니까. 그곳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포기할 생각이면서 왜 나선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슈바르한 대공이 주는 것들이 탐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네?"

    "나는 그때, 괴롭힘당하는 노이슈타인 공주를 보고도 도망쳤어. 그 아이가 가엽다 생각하면서도 솔직히 무서웠거든."

    아이는 눈치가 빨랐다. 맹주의 아들이라는 허울만 있을 뿐이지, 자신의 입장이 인질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괜히 잘못 엮여서 피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새끼 고양이를 안고 있더라. 자기도 괴롭힘당하는 건 마찬가지면서 끝까지 고양이를 안고 버텼어. 그게 참 멋있고, 날 부끄럽게 하더라고."

    "……."

    "그걸 본 후부터 강해지고 싶었지. 힘을 가져서 다음번에는 그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어.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어. 다음번이라는 건, 다음 순서가 오지 않으면 그만이잖아."

    "……."

    "그래서 난 안 된 거야. 매번 미뤄서. 그리고 그만큼 늦어버려서."

    펜리르는 피식 웃었다. 더 나은 기회를 기다리다가 매번 늦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연심이라기보다는 은혜를 갚는 일인 거지. 지금의 날 있게 한 그 아이에 대한 은혜."

    "확실히 그편이 낫긴 하군."

    "내가 아무리 그래도 하대는 좀 그렇지 않아?"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베르베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턱짓으로 위를 가리켰다. 높게 솟은 절벽 위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슈바르한 대공 전하?"

    "오래간만이군."

    카벨레누스는 바람에 흩날리는 망토를 대충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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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베는 그 모습을 보며 슬쩍 펜리르의 옆에 붙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확실히 소맹주 쪽이 부족하긴 하네요."

    "베르베."

    "원래 진실은 쓴 법이죠."

    펜리르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베는 세상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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