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118)화 (118/164)
  • 118화. 이빨 빠진 호랑이

    2021.04.19.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그럴 리 없다. 힘들었을 거다.]

    마물의 목소리가 물먹은 솜처럼 축 처졌다. 오랫동안 살아온 짐승은 인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인간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는 자를 향해선 감히 질투를 품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그런 자가 자신들과 가까워지면 기다렸다는 듯 악랄할 정도로 헐뜯고 시기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권위를 잃은 신은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연약한 몸으로 버텨야 했던 그녀가 괜찮았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지금의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

    "만약, 내가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걸. 이렇게 마물……."

    알리시아는 말을 하다가 말고 마주친 눈에 마른 침을 삼켰다.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데, 계속 이대로 마물이라고만 부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너는 이름이 뭐야?"

    [이름?]

    마물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게, 계속 마물이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잖아."

    […….]

    "……혹시, 내가 실수한 거야?"

    가만히 올려다보는 시선에 알리시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마물을 다 알지 못했다.

    [나, 이름 없다.]

    "이름이 없다고?"

    [이름 없으면 잊힌다. 그래서 우리 잊혀졌다. 아무도 우리 기억하지 못한다. 그게 우리가 받은 벌이다.]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주는 건 어때?"

    [그대가?]

    마물의 눈이 눈에 띄게 커졌다. 알리시아는 열렬한 시선에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었다.

    "물론 너만 괜찮다면 말이야. 계속 함께할 건데, 계속 마물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

    […….]

    "싫어?"

    [아니. 좋다. 그대가 주는 것이라면 뭐든 좋다.]

    깜짝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마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알리시아는 부드러운 손길로 마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펠시는 어때?"

    [기억.]

    마물이 낮게 그르렁거렸다.

    "뜻을 알고 있구나."

    [그대가 가르쳐준 거다. 우리의 모든 것, 그대에게 배웠다.]

    "너희의 신은 다정했구나."

    [맞다. 다정했다. 그래서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원래 이름도 그대가 지어줬었다.]

    마물의 눈동자 초점이 흐릿해졌다. 길게 이어진 짐승의 눈꼬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신과 알리시아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녀에게서 예전의 흔적을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신을 사랑하는 짐승은 신이 남긴 작은 파편조차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펠시라는 이름은 나중에 이름을 찾게 되기 전까지만 쓰고-."

    [내 이름은 펠시다. 그대가 이름 지어준 순간부터 펠시가 되었다.]

    "그럼 원래 이름은?"

    [이름은 부르기 위해 있는 거다. 누군가 기억하고 불러주지 않으면 의미 없다. 그러니 나는 펠시다. 나는 그 이름이 좋다.]

    마물, 아니 펠시가 그르렁거리며 알리시아의 손등에 얼굴을 비볐다. 이를 보이며 웃는 마물은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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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제임스는 거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만지면 그대로 녹아버릴 듯 부드러운 옷감이 얼마나 비쌀지 감도 오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거울에 비친 사내가 제법 귀족처럼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군."

    뒤에 앉아 있던 제르페누스가 씨익 웃었다.

    "정말로 제가 파티에 가도 되는 겁니까?"

    "벌써부터 그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연히 가야지."

    "지금 상황이 썩 좋지 않은 거로 압니다."

    "좋지 않기 때문에 파티를 즐겨야 하는 거지. 어떻게서든 그럴싸해 보여야 살아남는 곳이거든."

    제국의 수도, 알로거스트는 매해 열리는 파티를 다 세도 다섯 손가락을 채울지 모를 슈바르한과는 달랐다. 알로거스트의 귀족들은 제국 어느 지역의 귀족들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다. 그들은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춤을 추고 담소를 나누는 사교 활동을 즐겼고, 특히 그 속에서도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일을 사랑했다. 내로라하는 수도의 귀족들과 어울리기 위해선 항상 구애하는 공작새처럼 화려한 깃을 내보일 필요가 있었다.

    "귀족 중에 화가 시절의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답지 않은 귀족들의 눈을 걱정하는 인간이 그런 일을 잘도 벌였군."

    "……."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어차피 그런 건 상황에 따라 적당히 말하면 그만이고, 무엇보다 그 사실을 입 밖에 낼 정도로 간 큰 자는 없을 테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되네."

    제르페누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히 머리를 넘겼다. 먹고 살기 바빠 고상한 취미를 즐길 수 없는 슈바르한에서야 신진화가의 명성이 통했을지 몰라도 수도는 아니었다.. 수도에서 이름이 제법 알려진 귀족들은 다들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화가들이 따로 있었다.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는지는 몰라도, 후원자가 없는 화가인 이상 변변치 못한 귀족들만 전전했을 게 뻔했다.

    "적당히 말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거지. 솔직히 평범한 화가에게 마녀를 소탕할 수 있는 힘이 어딨겠나? 어느 날 갑자기 신탁을 받고 특별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면 모를까 말이야."

    "……."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어차피 거짓으로 꾸민 이야기잖나. 거짓 몇 개 더 는다고 문제 될 건 없지."

    제르페누스는 보란 듯 크라바트를 단단히 멨다. 기껏 신의 대리자를 데려왔는데 품에만 싸고돌 순 없었다. 이리저리 내보이며 헤르만을 자극하고 더 나아가 카벨레누스를 끄집어내야만 했다.

    "허튼 생각은 그만하고 슬슬 나가보자고. 아, 물론 가기 전에 그 팔찌는 빼는 게 좋겠군."

    "이건 안 됩니다."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아차 싶어 표정을 구겼다. 하지만 이미 제르페누스는 흥미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왜 안 되는 거지?"

    "……이건 제 연인의 유품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뺄 수 없습니다."

    제임스는 슬쩍 손으로 팔찌를 가렸지만, 오히려 그 행동이 제르페누스를 자극했다.

    "그래?"

    제르페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딱히 트집 잡을 구석은 없었다. 구슬을 꿰매어 만든 팔찌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했다. 제임스의 반응이 거슬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문제 될 건 없었다. 황궁에 들어오기 위해선 검문을 거치기 마련이었고, 특히나 제임스의 소지품은 몇 번이고 확인한 상태였다. 팔찌에 문제가 있다면 걸려도 진작에 걸렸을 것이었다.

    '내 기우겠지.'

    제르페누스는 엄지로 턱을 쓸다가 이내 생각을 지웠다. * * * 얼어붙은 입김이 새하얗게 부서졌다. 카벨레누스는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바라보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뼛속을 에는 듯 거세게 부는 혹한의 바람은 오늘도 다를 바 없이 매서웠지만, 사내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딱히 이상해 보이는 곳은 없군."

    <그렇습니까?>

    머릿속에서 들리는 가제프의 음성에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었다. 오랜 연구 끝에 기존의 통신구를 소형으로 개량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윙윙 울리는 타인의 음성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근방에 다른 유물은 없나?"

    <네. 기록에 남겨진 슈바르한에 있는 프라임의 흔적은 그 탑이 마지막입니다.>

    "그럼 역시, 슈바르한은 아닌가."

    <추방당했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외부에 있을 확률이 높긴 할 겁니다.>

    "혹시나 했는데 아쉽군."

    카벨레누스는 다 무너져가는 탑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신에게 집착하던 프라임이라면 슈바르한으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을까 해 확인차 둘러본 것이었지만, 역시나 별 소득은 없었다.

    <앞으론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대로 복귀하실 겁니까?>

    "복귀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일단 서쪽으로 쭉 움직여보지."

    <괜찮으시겠습니까? 경계 지역의 경비가 최근 들어 심상치 않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 혼자 나온 거지. 딸려 있는 꼬리가 없어야 쉽게 움직이니까."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소란을 피우시면 안 됩니다.>

    카벨레누스에게 병사 몇을 상대하는 건 손가락을 굽히는 것보다 쉽겠지만, 섣부른 행동은 꼬투리가 되기 쉬웠다. 조용히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만큼 인내가 필요했다.

    "내가 그 정도 사리분간도 못 할 거로 보이나."

    <아무래도 아가씨의 일이니까요.>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잘 지내십니다. 수프 덕분인지 혈색도 많이 돌아오셨고요.>

    "그런가."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알리시아와 마음껏 연락하고 싶었지만 통신구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만일을 위해 연료를 아껴야만 했다.

    <아가씨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금방 돌아갈 거라고 전해줘."

    <그거면 되는 겁니까?>

    가제프가 기대를 감추지 않으며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더 필요한 게 있나?"

    <으음, 그게 이왕이면 좀 더 달콤한 말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 말은 직접 만나서 해야지."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간 떨어져 있던 시간에 비해 지금은 약과였지만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성에 남아 있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소매를 걷었다. 그의 손목에는 어울리지 않게 작은 구슬을 엮어놓은 팔찌가 있었다. * * *

    "신의 대리자라고 하길래, 좀 더 나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군요."

    "보세요. 저 아름다운 미모를. 저 정도면 어떤 영식들에게도 뒤지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신의 대리자인 것이죠. 프라임께서 헌신하셨다면, 분명 저런 모습이었을 걸요."

    제임스는 들려오는 이야기를 모른 체하며 와인을 홀짝거렸다. 신의 대리자가 모습을 드러낸 이후부터 사람들은 전부 그에 대한 이야기에 듬뿍 빠져 있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왔고, 다들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와인 향이 좋군요."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실은 오늘의 와인은 특별한 손님을 위해 준비한 것이거든요."

    만다린 후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들 기다렸다는 듯 와인을 찾았다. 제임스는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하며 이번에는 탑처럼 쌓아 올린 초콜릿을 하나 집어 먹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초콜릿 접시에 손을 뻗었다. 제임스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초콜릿을 즐기며 남은 와인을 홀짝거렸다. 잔에 닿아 있는 그의 입술 끝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다들 신의 대리자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야."

    제르페누스는 제임스를 보며 눈매를 휘었다. 처음에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설펐던 화가는 몇 번의 파티를 거쳐 이제 제법 그럴싸한 신의 대리자 흉내를 내고 있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신앙심이 예전 같지 않다 해도 신의 뜻은 제국과 함께하는 걸요."

    파티 내내, 제르페누스의 옆을 지키던 만다린 후작이 두 손을 비비며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는 대표적인 친황제파로, 제르페누스가 황제가 되는 데에 많은 공헌을 한 가신이었다.

    "하긴, 그렇군."

    제르페누스는 싱긋 웃으며 느긋하게 주변을 살폈다. 신의 대리자를 대동한 덕분인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여론이 나쁘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대공 전하 측도 저희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겁니다."

    "글쎄.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이제 슬슬 늙은 여우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가 되었잖나."

    "신의 뜻은 저희에게 있지 않습니까. 쉽게 움직이진 못할 겁니다."

    "조력자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제르페누스는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멜타 공작을 보며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가짜 신의 대리자를 세웠을 거라는 둥 좋지 않은 시선도 존재했다.

    "멜타 공작은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이빨이 빠진 건지, 아니면 그런 척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 않나."

    "멜타 공작이 움직일 거라면 진작에 움직였겠죠."

    "그렇게 생각하나?"

    "제 딸이 죽어도 미동도 없던 노인네입니다. 하물며 손자라고 다를 게 있겠습니까. 솔직히 움직일 거라면, 대공 전하께서 전장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때부터 나섰을 겁니다."

    만다린 후작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이죽거렸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멜타 공작은 선황후가 죽은 후에도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살아남은 손자를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으로 모든 사태를 넘겼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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