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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17)화 (117/164)
  • 117화. 보고 싶을 거야

    2021.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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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은 숨겨진 방에서 글을 발견한 후부터 쭉 생각했던 게 있었어요."

    "생각했던 거?"

    "한두 번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사소한 우연들이 여럿 겹치면 우연이 아니잖아요."

    알리시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거슬렸던 부분들을 하나로 이으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드러났다.

    "저는 프라임이 추방당했다는 낙원이 슈바르한이 아닐까 생각해요."

    "하지만 그대가 해석한 글에선 그랬잖아. 추위도, 배고픔도 없는 풍요로운 땅이었다고."

    "마물이 그러더라고요. 프라임이 이곳에서 추방당했다고. 맞지?"

    알리시아가 시선을 돌리자, 마물은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고갯짓이었으나 용기를 주기엔 충분한 몸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얼어붙은 땅과 낙원은 썩 어울리지 않는데."

    "변했을 수도 있죠."

    "변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해도, 프라임은 진짜 신을 죽게 만들었잖아요."

    알리시아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더듬었다. 벽에 새겨진 글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솜털이 바짝 섰다. 자신을 향한 지독한 혐오와 죄책감, 그리고 분노, 온갖 감정들로 얼룩진 글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감정을 일으켰으니까.

    "혹시 슈바르한의 이명, 기억하세요?"

    "신이 버린 땅이던가."

    카벨레누스가 살짝 이마를 찡그렸다. 알리시아는 손바닥으로 사내의 구겨진 이마를 피며 고개를 저었다.

    "신이 버린 땅 말고, 다른 말도 있잖아요."

    "신의 축복이 닿지 않는 땅말입니까?"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가제프가 끼어들었다.

    "맞아. 예전에 경이 말해줬었지."

    "그러면 그대는 신이 사라졌기 때문에 낙원이 사라졌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마물에게 좀 더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지만, 지금 밝혀진 것만 이어보면 그럴 것 같아요."

    알리시아는 흘끔 마물을 바라봤다. 혹시 틀린 부분이 있을까, 걱정해 마물을 봤지만 마물은 잠잠했다. 정답인 모양이었다.

    "그럼 신이 돌아오면, 얼어붙은 땅이 녹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곰곰히 생각에 잠겨있던 가제프가 슬쩍 손을 들었다. 그의 뺨은 기대감에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

    카벨레누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슈바르한의 얼음이 녹는 건 기쁜 일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경에게 너무 냉정하게 말씀하지 마세요. 그래도 기회가 생긴 거니,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그건 무리다.]

    옆에 선 마물이 알리시아의 소매 끝을 물고 고개를 저었다. 완강한 부정의 뜻이었다.

    "무리라고?"

    [그자 추방당한 날, 그대 훔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를 훔쳐?"

    […….]

    찰나의 순간, 빛나는 동공이 흔들렸다. 알리시아는 높게 솟은 마물의 꼬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가능할지도 모른다.]

    "뭐가?"

    [그대 그릇 고치는 것.]

    "……뭐?"

    알리시아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그릇을 고칠 수 있다고 한 거 맞아?"

    [가능할진 모르겠다. 하지만 가능성 있다.]

    "그렇다면 당장 말해줘. 부탁이야."

    알리시아는 다급하게 심호흡을 하고는 마물과 눈높이를 맞췄다. 마물은 까만 코를 알리시아의 손등에 가져다 댄 채 천천히 숨을 토했다.

    [그자라면 방법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자라면…… 프라임 말이야?"

    [그대 사라지고 그자 추방당했다. 하지만 떠나기 전, 우리에게 약조했다.]

    "약조?"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손을 만지작거렸다. 짐승의 콧바람이 손을 스치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그대 돌려준다 했다.]

    "돌려준다는 게 무슨 의미지?"

    [모른다. 하지만 그자 분명 뭔가 알고 있었다. 그 증거로 사라졌던 그대, 다시 나타났다.]

    "……."

    [그대 돌려준 그자라면, 방법 알고 있을 거다.]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간절했다. 알리시아는 두 주먹을 꽉 쥐며 눈을 빛냈다.

    "그럼, 프라임은 어디서 만날 수 있어?"

    [모른다. 우리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 외부 일은 모른다.]

    "그럼……."

    "왜 그래? 문제라도 있어? 혹시, 그댈 고칠 방법이라는 게 어려운 문제인 건가?"

    초조한 얼굴로 겨우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카벨레누스가 참지 못하고 몸을 낮췄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알리시아가 해석해주지 않는 한, 그는 마물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꿈에도 알 수 없었다.

    "혹시, 프라임을 찾을 수 있을까요?"

    "프라임?"

    "프라임이라면 절 고칠 방도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대요."

    "그럼 찾아봐야겠군."

    망설임없이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이웃집 개라도 찾는 것처럼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답이었다.

    "프라임을 만나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럴 리가. 프라임은 신화 속 인물로만 들어서 실제로 본 적은 없어."

    "그러면……."

    "그래도 상관없어. 찾을 수 있고, 없고가 아니라 무조건 찾아야 하는 거니까."

    카벨레누스는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사내는 지금껏 원하는 사냥감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막연한 상황에서 벗어나 목표가 뚜렷해진 이상, 더는 두고 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찾을 수 있다.]

    "찾을 수 있다고? 혹시, 프라임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야?"

    [나는 없다. 하지만 저자라면 가능하다.]

    알리시아에게서 떠날 줄 몰랐던 마물의 시선이 카벨레누스를 향했다. 알리시아는 덩달아 사내를 바라봤다.

    [저자 안에 흐른다. 그자와 같은 피.]

    "……."

    [같은 피끼리 끌리는 거 본능이다. 충분히 가능하다. 저자에게 찾게 하면 된다.]

    "……마물이 내게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맞나?"

    눈치 빠른 사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금세 알아차리고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라면, 프라임을 찾을 수 있을 거래요."

    "내가?"

    "당신에겐 프라임의 피가 흐르니까요. 당신이라면 본능적으로 찾을 수 있을 거래요."

    "본능은 모르겠지만, 일단 지독한 냄새는 나긴 하는데."

    카벨레누스는 마물을 흘겨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겉모습만 렉스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지, 마물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은 탓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고여 썩은 물처럼 비릿한 냄새였다.

    "냄새요? 무슨 냄새요?"

    "마물에게서 아무런 냄새도 안 나나?"

    "저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습니다."

    "저도요."

    "두 사람 다 모르는 걸 봐선 내게만 나는 모양이군."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죄의 냄새다.]

    "죄의 냄새?“

    [죄인에게 새겨지는 낙인이다. 우리도 저자에게서 같은 냄새 맡는다.]

    "하지만, 죄를 지은 건 프라임이잖아."

    알리시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우리 그자가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묵인했다. 인간 질투했던 건 그자뿐만이 아니었다.]

    "……."

    잘못을 비는 것처럼 푹 고개 숙인 짐승에 알리시아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 말 하나라도 놓칠까, 쫑긋 서 있던 두 귀가 축 처진 마물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용서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잘못하지 않는다. 우리 모든 걸 잃었다. 같은 일 벌어지지 않길 바란다.]

    그대를 잃고 싶지 않다. 마물의 두 귀와 꼬리가 처량할 정도로 힘없이 처졌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마물의 머리에 손을 올려놨다.

    "나는 네가 기억하는 신이 아니라서 용서 같은 말은 할 수 없어. 그건 내 몫이 아니잖아."

    […….]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네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 네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알리시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여전히 마물을 이해하기란 어려웠지만, 기본적으로 마물은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무엇을 물어보든 순순히 대답해줬고, 그녀가 이해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런 마물을 작은 위로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 * *

    "정말로 내가 자리를 비워도 괜찮아?"

    "괜찮아요. 금방 돌아오실 거고, 마물도 절 지켜주기로 했잖아요."

    "……."

    카벨레누스가 지그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가만히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서든 그러고 싶었다.

    "저보다 당신이 더 불안한 눈치인 걸요."

    "그대 말이 옳아. 내가 더 불안해서 그래."

    카벨레누스는 두 팔을 벌려 알리시아를 끌어안았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그건 썩 좋은 말은 아니군."

    "네? 어째서요?"

    "이미 충분히 기다리게 했잖아. 더 기다리게 해선 안 되지."

    "그럼 같이 갈까요?"

    알리시아는 일부러 우스갯소리를 뱉으며 카벨레누스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군."

    성마른 손이 고정하듯 알리시아의 등과 허리를 꽉 쥐었다. 몸이 조금 나아졌다 해도 그녀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이대로 먼 길을 여행하는 건 무리였다.

    "제겐 슈바르한이 가장 안전해요."

    "알고 있어."

    카벨레누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슈바르한은 최고의 요새였다. 이곳에 있으면 튼튼한 성벽과 잘 훈련된 병사들, 그리고 심지어는 마물들도 알리시아를 지켜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판단과 별개로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라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있죠. 우리 나중에 여행 갈래요?"

    "……여행?"

    "미카엘은 항상 바다를 보고 싶어했거든요."

    "……."

    "모든 일이 끝난 후에 함께 바다를 보러 가요. 물론 우리 가족끼리 오붓하게만요."

    가족.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카벨레누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어쩐지 마치 쿠키를 한입 가득 밀어 넣은 것처럼 혀끝이 아렸다. 하지만 그 낯선 감각은 나쁘지만은 않았다. 되려 품속 작은 온기처럼 기꺼웠다.

    "……그래. 그러자. 셋이 함께 보러 가."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오랫동안 검을 휘둘러 만들어진 근육질 몸은 제 것과 사뭇 달랐다. 감탄이 절로 날 정도로 강하고 단단했다. 하지만 여자는 다른 사람처럼 순수하게 감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내의 몸이 쉽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른 돌아와야 해요. 많이 보고 싶을 테니까."

    "……."

    "대답 안 해주실 거예요?"

    "……나도 보고 싶을 거야."

    아주 많이. 카벨레누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알리시아의 품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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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아이의 그릇은 문제없다.]

    "……정말?"

    [피 섞인 탓이다. 그대와 같은 일 벌어지지 않는다.]

    "다행이네."

    알리시아는 미카엘의 뺨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손에 감기는 아이의 머리카락은 질 좋은 붓처럼 부드러워 자꾸만 손이 갔다.

    [그대, 혹시 힘 싫어하나?]

    "솔직히 좋아하진 않았어."

    [어째서?]

    마물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 힘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을 겪어야 했거든."

    [알 것 같다.]

    "알 것 같다고?"

    [그대 모든 것을 빼앗겼다. 어떤 영광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마물이 침대에 턱을 괸 채 빤히 알리시아를 올려다봤다. 이제 그녀에게선 예전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특별함은 감춘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었다.

    [그대 삶 녹록치 않았을 거다.]

    알리시아가 가진 힘은 가장 순수한 것으로 사람의 본능을 자극했다. 정체를 짐작하지 못해도 인간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다름은 쉽게 틀린 것으로 간주되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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