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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16)화 (116/164)
  • 116화. 괜찮을 거예요

    2021.04.12.

    "대공이 미운 게 아닌가?"

    "밉습니다. 그래서, 그자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겁니다."

    "그럼 마녀를 소탕한 이유는?"

    "마녀의 인상을 들어보니 다들 하나 같이 그 여자를 연상시키더군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그 여자에게도 마녀의 이름을 씌우자고요."

    "재미있는 생각을 했군."

    마녀를 퇴치하지 않아도 결국 그 여자는 마녀로 몰렸을 텐데. 제르페누스는 계획이 어긋나 분노하고 있을 헤르만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가짜 신의 대리자 때문에 헤르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 덕분에 자신은 신전의 계획을 통째로 삼킬 명분이 생겼다.

    "사실 저는 폐하의 제안을 받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내 제안을 거절했던 건가?"

    "네."

    "그럼 지금에 와선 승낙한 이유는?"

    "제힘으로는 그 여자를 죽이는 것 정도가 고작이지만, 폐하께서 도와주신다면 대공을 완벽하게 무너트릴 수 있을 테니까요."

    제임스의 눈에 힘이 실렸다. 제르페누스는 느긋하게 자신의 입매를 매만졌다.

    "내가 내 아우를 칠 것 같나?"

    "제가 폐하의 입장이라면 대공이 미울 수밖에 없으니까요."

    "……."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차를 젓던 제르페누스의 손이 멈췄다. 카벨레누스를 미워한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카벨레누스는 뭐 하나 부족함 없이 완벽한 동생이었다. 그 여자와 관련된 문제가 성가실 뿐이지, 미워할 수 있는 구석은 없었다.

    "아쉽게도 나는 내 동생을 미워하지 않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치곤 폐하께서는 여전히 제게 흥미 있어 보이십니다."

    "원래 훈육은 애정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거든."

    제르페누스는 다리를 꼰 채 고개를 까닥거렸다. 오래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상대는 자신이 원하는 걸 가지고 있었으니까. 마음껏 이용하다가 버리면 그만이었다.

    "황궁에 그대의 자리를 만들어주지."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뭘 원하지?"

    "복수에 대한 확신입니다. 폐하께서는 아직 제 복수를 도와주겠다고 말씀해주시지 않으셨니까요."

    "그대는 확실한 걸 좋아하나보군."

    제르페누스는 뱀처럼 눈꼬리를 휘며 소파 팔걸이를 매만졌다.

    "저는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다 걸었습니다. 확신이 없다면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물론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 그대의 바람대로 슈바르한 대공은 모든 걸 잃을 거야."

    물론 잃은 것 이상으로 얻는 게 더 많게 되겠지만. 제르페누스는 뒷말을 감추며 싱긋 웃었다. 금색 눈동자를 지닌 동생은 초라한 설원의 땅이 아닌, 모두가 우러러보는 황금 황좌가 잘 어울리는 자였다. 모든 일이 끝나면, 카벨레누스는 슈바르한 대공으로서의 이름을 버리고 블랑셰 황제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정말입니까?"

    "썩 믿지 못하는 눈치로군."

    "조금 전, 폐하께서 대공을 미워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확신이 필요한 건가?"

    제르페누스는 이번에도 웃었다. 그는 제임스의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능숙한 척하려 해도 상대는 협상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 그런 상대는 협박이 더해지면 얼마든지 제 뜻대로 다룰 수 있었다.

    "글을 써주십시오. 폐하께서 저의 복수를 도와주신다는 내용이 담긴 내용의 글말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대의 목을 베어버려도 상관없는 사람이야."

    "모두가 제가 오늘 황궁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죽는다면 다들 폐하를 의심할 겁니다."

    "……."

    제르페누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맞은 편에 앉은 사내의 눈은 연신 초점이 흔들리고 있었고,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히 겁을 먹었으니 슬슬 자신의 발밑에 무릎 꿇고 애원할 때였다. 그런데 정작 제임스의 입에서는 제르페누스가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제가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사람들은 저와 폐하의 이야기를 떠들고 있겠죠."

    "……."

    "절 적대할 거라 여겼던 폐하께서 기꺼이 넓은 아량으로 절 받아주셨으니 다들 신기해하고 있는 거겠죠."

    "……감히 날 협박하려는 건가?"

    제르페누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가 이 복수에 모든 걸 걸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

    "제가 무사한 모습으로 군중들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 폐하께선 곤란한 입장이 되실 거라는 걸 압니다."

    잘만 웃어 보이던 제르페누스의 눈이 잠깐이나 굳었다. 재능 좋은 사기꾼이라고 너무 얕봤다가 오히려 흠을 보였다.

    "사기도 머리 좋은 놈이 칠 수 있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글을 써주지. 그리고, 앞으로 그대가 머물 장소와 할 일도 일러두겠네."

    제르페누스는 종을 울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 한스를 불렀다.

    "앞으로 저 아이가 그대의 시중을 들어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이야기하게나."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하긴. 그것보다 오랜 여독으로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들어가서 편히 쉬게나. 내일부턴 아주 바쁜 날들이 이어질 거거든."

    제르페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스는 눈치껏 제르페누스의 뜻에 따라 제임스를 밖으로 인도했다. 제르페누스는 두 사람이 나가기까지 기다리다가 문이 열린 순간, 느긋하게 손을 들었다.

    "펠시온."

    "네, 폐하."

    커튼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펠시온이 제르페누스에게 예의를 갖췄다. 하지만 제르페누스는 인사를 받기보다는 조금 전 제임스가 나간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젊은 황제는 더는 웃고 있지 않았다.

    "저 사기꾼의 얼굴을 잘 기억해놓도록 해. 모든 일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죽여버릴 거니까."

    * * *

    "다시 한번 생각해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하지만 시간이 없잖아요."

    "……."

    "제게 남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면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요."

    "하지만……."

    카벨레누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알리시아가 죽지 않길 바라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독을 먹게 할 순 없었다. 저 몸 상태로 독을 먹으면 정말로 모든 게 끝날 것 같았다.

    "괜찮아요. 당신이 계속 옆에 있어줄 거잖아요."

    "……."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쿵쿵 울리는 심장박동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계속 생각했어요. 어머니가 정말로 절 죽이고 싶었던 건지."

    "……."

    "하지만, 역시 저는 어머니가 절 죽이려고 했다고 믿고 싶지 않아요."

    알리시아의 시선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솥에 닿았다. 기이한 녹빛을 내는 수프는 식감을 돋우진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충분했다.

    "전 아직도 살라고 말하던 어머니의 말을 기억해요. 그리고, 마물은 제가 힘을 쓰지 않아도 죽을 거라고 했죠."

    "……."

    "저는 어머니가 제 상태를 알고서 수프를 만들었다고 믿을 거예요."

    "……."

    "돌아가신 어머니는 어떤 말도 해주시진 않겠지만,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거든요. 다정하고, 절 많이 사랑해주셨어요."

    마물의 이야기만 듣고선 독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니 두려움은 잊혀졌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수프를 먹었던 날은 제가 유난히도 아팠던 날들이었어요."

    "……."

    "괜찮을 거예요, 전부."

    "……."

    "아무리 괴롭고 힘들다 해도 결국 살아 있어야만 기회가 오잖아요. 결국, 기회라는 건 산 자의 것이니까요."

    알리시아는 두 팔에 힘을 줬다. 그녀는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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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몸은 어때? 괜찮아?"

    "네. 전보다 나아요."

    얼굴만 봐도 몸 상태가 나아졌다는 게 보였지만, 카벨레누스는 습관처럼 알리시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즉사했을지도 모를 맹독을 먹고도 알리시아는 잠시 앓았다는 걸 제외하고는 멀쩡했고, 앓고 난 후에는 오히려 혈색이 돌아와 보기 좋아 보였지만 여전히 사내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임시다. 완벽한 방법 아니다.]

    불쑥 튀어나온 마물이 알리시아와 카벨레누스의 사이를 억지로 파고들었다. 카벨레누스는 타의로 멀어진 거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마물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알리시아의 손에 얼굴을 비빌 뿐이었다. 애당초 마물의 관심사는 알리시아뿐이었다.

    "마물을 이렇게 얌전하게 구는 건 처음이군요."

    가제프는 몇 번이고 안경테를 매만졌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마물을 길들일 줄이야, 아무리 봐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거든."

    크르르-.

    "물론, 알리시아의 도움 없이는 우리에게 저들의 말은 들리지 않지만."

    "아가씨께서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겁니까?"

    "그런 것 같아."

    알리시아의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마물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도련님은요?"

    "이유는 나도 모르지만, 미카엘은 듣지 못하더라고."

    [피가 섞여서 그렇다.]

    마물은 알리시아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마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렉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물은 겉보기엔 커다란 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피가 섞였다는 게 무슨 뜻이야?"

    [아이. '그자'의 피가 흐른다.]

    마물은 알리시아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마치 애교라도 부리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자? 그자가 누군데?"

    [말할 수 없다.]

    "어째서?"

    [죄인이다. 이름 말해선 안 된다.]

    마물이 고개를 저었다.

    "죄인? 무슨 죄를 지었는데?"

    [그대의 모든 것 앗아갔다. 그래서 추방당했다.]

    마물이 고개를 돌려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적대 어린 시선에 카벨레누스는 본능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찡그린 눈매 사이로 엿보이는 사내의 눈동자는 마물의 것보다 훨씬 진한 금색이었다.

    [어느 날 왔다. 그자의 피를 가진 자.]

    "저 사람은-."

    [안다. 그자 아니다.]

    "……."

    [하지만 그자의 냄새가 섞여 있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마물의 시선이 흔들렸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 저 사람은 원해서 그런 힘을 얻은 게 아니야.“

    [그래서 불완전한 거다.]

    "불완전?"

    [더 강해질 수 있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강한 사람이야."

    [아니다. 아직 부족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물어도 되나?"

    참다못한 카벨레누스가 슬쩍 끼어들었다. 알리시아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대화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게……."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인가?"

    "그건 아닌데, 저도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알리시아의 손이 다시금 마물의 목덜미를 쓸었다. 처음에는 마물을 만지는 것이 낯설었는데, 몇 번 만지다보니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제가 이해한 부분만 정리하자면, 아무래도 당신의 실험에 쓰였다는 마물이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아요."

    "특별한 존재? 그게 누군데?"

    "말할 수 없는 죄인이래요. 그런데……."

    "왜?"

    "추측일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아마도……."

    알리시아의 시선이 마물에 닿았다. 실은 죄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뭐든 물어봐라. 나 대답 가능하다.]

    "……너희가 말하는 죄인. 그자의 이름이 혹시 프라임이야?"

    [나 말할 수 없는 이름이다.]

    "역시 맞는구나."

    알리시아의 잇새로 가냘픈 숨이 흘러나왔다.

    "……프라임이라고?"

    "마물이 그렇게 말한 겁니까?"

    "아니. 내 생각이야."

    알리시아는 자신을 향한 두 사내의 시선에 멋쩍게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물어도 되나?"

    "예전에 당신이 그랬잖아요. 신전에서는 당신의 힘을 신성한 힘이라고 부른다고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당신이 한 말은 대부분 기억해요."

    알리시아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 시절의 자신은 항상 초조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카벨레누스의 흥미에 기댄 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입장이라는 곱씹으며 버텨야 했다. 그래서, 그만큼 매 순간이 간절하고 소중했다. 별것 아닌 순간조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기억하고, 또 기억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었다. 더는 초조해할 이유가 없었다. 알리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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