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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15)화 (115/164)
  • 115화. 옆에 있을게

    2021.04.08.

    "……내게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 알 수 있어?"

    [오래 버터야 스무 밤 못 보낸다.]

    "……."

    [괜찮다. 그대 답 알고 있다.]

    "내가 답을 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마물은 대답 대신, 코끝으로 알리시아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가리킨 방향에는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카벨레누스가 있었다.

    "이야기는 끝났나?"

    "그게…… 마물이 제가 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요."

    "답? 무슨 답?"

    "제 몸을 낫게 하는 방법이요."

    "……뭐?"

    거칠게 뱉어진 숨이 혹한에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저자에게 줬다. 답.]

    "당신에게 줬대요."

    "내가 마물에게 받은 거라곤 책뿐이야."

    "책이요?"

    "식물도감인데……."

    카벨레누스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알리시아의 모친이 만들었다는 수프의 재료들은 전부 독초였다. 그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알리시아가 상처 입을 거라는 건 뻔한 일이었다.

    "뭔가 알고 계신다면 말씀해주세요."

    "들으면, 상처 입을 거야."

    "상관없어요."

    "……."

    "저, 살고 싶어요. 살아서 당신이랑 미카엘과 함께하고 싶어요. 그걸 위해서라면 온몸이 넝마짝이 되더라도 상관없어요."

    꿀꺽-. 카벨레누스의 목울대가 요동쳤다.

    "그대는……."

    여자는 이번에도 두려워하면서도 버티려 들었다. 떨면서도 악착같이 이를 앙다물고 이겨내려 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슴을 뛰게 했다. 모순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옆에 있을게."

    "……."

    "그대가 상처 입길 선택한 것처럼, 그 옆을 지키길 선택하는 것은 내 몫이니까."

    한번 결정한 일은 망설이지 않는다. 카벨레누스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상처 입을 거라는 걸 아는 만큼, 알리시아가 이겨낼 거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덜 상처 입길 바랐다. 자신의 존재가 위안이 되었으면 했다.

    "예전에 그대가 모친의 수프를 먹고 싶다고 했었지. 사실 그때, 모르코 부인은 수프에 들어가는 재료를 구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때 분명 모르코 부인은 재료를 구할 수 없다고……."

    "진실을 말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말했던 거지."

    카벨레누스는 쓰게 웃었다.

    "진실이 어떤 것인데요?"

    "그때, 그녀가 찾았던 재료들은 전부 독초였어."

    카벨레누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일그러지는 알리시아의 얼굴을 볼 때마다 괴로웠다. 하지만 눈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그녀 혼자 상처 입게 둘 수 없었다. 옆에 있겠다는 건, 모든 걸 지켜본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독이었는지도 알고 있나요?"

    "전부 고통 없이 목숨을 앗아가는 맹독이었지."

    "……."

    더는 창백해질 리 없을 것 같던 알리시아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카벨레누스는 비틀거리는 알리시아의 몸을 부축했다.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넋을 놓은 여자의 표정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달달 떨리는 손끝이 가여워 미칠 것 같았다.

    "……죽는 게 나은 삶이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죽일 생각을 했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요."

    "……."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잖아요."

    알리시아는 거칠게 눈을 비볐다.

    "분명, 방법이 있다고 했어요."

    "……."

    "지금은 그것만 생각할래요."

    "그럴 수 있나?"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어요. 지금에 와서 의도를 가늠하려고 해봤자, 산 자의 주관이 섞일 뿐이에요."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음에도 알리시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이를 꽉 깨물고 마물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말해줘. 네가 말하는 답이 뭔지."

    [인간 약하다. 하지만 끈질기다. 그게 답이다.]

    "그게 답이라고?"

    [그대 특별하다. 이길 수 있다.]

    "……설마, 나 보고 독을 먹으라는 거야?"

    [이겨내면 그릇 강해진다.]

    마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군."

    카벨레누스가 보호하듯 알리시아를 자신의 뒤로 감췄다. 알리시아의 의사를 존중해 웬만하면 잠자코 듣고 있으려고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다 죽어가는 여자에게 독을 먹으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나 다른 바 없었다.

    "……만약, 네 말대로 독을 먹으면 살 수 있어?"

    "알리시아!"

    카벨레누스가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도 삶이 절실했다.

    [완벽한 방법 아니다. 시간을 늦추는 것뿐이다. 결국 한계 올 거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그릇을 완전히 고칠 수 있는 방법 말이야."

    [한 번 깨진 그릇이다. 되돌릴 수 없다.]

    마물의 눈이 가늘어졌다. 짐승의 눈에는 깨진 그릇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떻게서든 겨우 버티고 있다만 오래 버티기는 어려웠다. 깨진 흠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힘 역시 강해졌고, 그만큼 그릇이 망가지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었다.

    [웬만하면 힘쓰지 마라. 그렇게 되면 스무 밤도 무리다.]

    "……정말로 방법이 없어?"

    [애당초 수리해도 소용없는 문제였다.]

    마물은 알리시아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담금질하면 강해지는 검처럼 그릇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생명에게는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에 그런 생존본능을 자극하면 그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자가 품고 있는 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릇을 강하게 해 시간을 벌 수 있을진 몰라도, 결국 거대한 힘을 감당해내진 못할 것이었다.

    "……소용 없다고?"

    [힘 사용하지 않아도 그대 그릇 깨졌을 거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대 그릇 유독 작다.]

    마물이 킁킁거리며 알리시아의 냄새를 맡았다. 그녀에게선 왕의 냄새가 났지만 완전히 같진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왕과 다르다. 냄새 옅다. 원래 왕에 비해 힘 약하다.]

    알리시아는 마물의 시선을 따라 드러난 제 손목을 응시했다. 창백한 살갗은 푸르스름한 핏줄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나는 내 힘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어. 그리고, 어머니도 나처럼 어머니에게서 힘을 물려받은 거였지."

    […….]

    "아마 네가 말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내 선조였을 거야. 그래서 힘도 약할 수밖에 없는 거겠지."

    [그래도 이상하다.]

    마물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다고?"

    [힘은 그만한 그릇이어야 주어진다. 그런데 그대, 그렇지 않다. 힘과 그릇 크기 다르다. 문제 있다.]

    "……."

    알리시아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고개만 숙였다. 마물을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고 상황도 달라지지 않았다.

    "괜찮아."

    "……."

    "아직 포기하기엔 일러."

    눈치 빠른 사내는 다른 말 대신, 손을 단단히 맞잡아줄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카벨레누스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당신 말이 맞아요. 아직 포기하긴 일러요."

    알리시아는 애써 웃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서든 살아 있으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순간이 왔다. 그걸 아는 이상, 아직은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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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우리의 대리자께서는 유달리 인기가 많군."

    "그래 봤자, 사기꾼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들 중 누구도 저자를 사기꾼이라고 여기지 않잖나."

    제르페누스는 군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행차하고 있는 제임스를 보며 턱을 괬다. 외모가 아름답다는 평을 받긴 했지만 멀리서 본 사내는 생각 이상이었다. 은발을 나부끼며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사내는 신의 대리자라는 말이 썩 잘 어울렸다.

    "정말로 저 사기꾼을 성안으로 들일 셈이십니까?"

    "당연히 들여야지."

    "하지만……."

    "솔직히 나는 신실한 신전의 개보다 사기꾼이 더 믿음직스럽다는 입장이라서."

    제르페누스는 여유롭게 사람들을 상대하는 제임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써먹을 만한지 가치가 확인할 참이었는데 저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버리더라도 잠시는 써먹을 만해 보였다.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라고. 어차피 지금의 우리로선 저자를 처리하지 못하니까."

    "이 땅에서 폐하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물론 내가 제대로 된 황제였다면, 거역할 수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니잖아? 다들 날 향해 진짜 황제가 아니라고 수군거릴 뿐이지."

    "폐하."

    펠시온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정통성 가진 황제의 재목이 있으니까, 더욱더 그러겠지."

    하지만 제르페누스는 태연히 고개만 까닥거릴 뿐이었다. 신전이 낸 소문 때문에 현재 자신의 입장은 좋지 않았다.

    "결국 내 자리는 카벨레누스의 것이니 내게 쏟아지는 악평 같은 건 상관없지만, 아직 내 개를 돌려받은 게 아니잖나."

    "……."

    "내 개를 손에 넣을 때까지는 버텨야지"

    제르페누스는 자신의 눈꼬리를 천천히 매만졌다. 빼앗긴 환호는 불쾌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건, 득실거리는 벌레들이 아니었다.

    "폐하, 대신관께서 독대를 청하십니다."

    "급히 독대를 청하시다니. 우리 영감님께서 화가 나도, 아주 단단히 난 모양이야."

    기다렸던 방문에 제르페누스는 기꺼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대리자를 만든 게 폐하라고 의심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있고, 자신의 계획을 어그러트린 눈엣가시가 수도까지 와서 찬양받고 있으니 배알이 꼴려도 단단히 꼴린 거겠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대신관의 독대를 허할까요?"

    "안타깝게도 내겐 신의 대리자와의 선약이 있어서 말이지."

    늙은 여우의 인내심은 과연 어디까지일까나. 제르페누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팔짱을 꼈다. * * *

    "마녀를 소탕하다니, 대단한 일을 벌였더군."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임스는 싱긋 웃어 보였지만, 그의 심장은 여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황제의 얼굴을 가까이서, 그것도 그와 함께 차를 마시는 건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신의 대리자라고 불리시는 분께서 너무 겸손하군."

    "신의 대리자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일 뿐,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대단한 일이지. 거짓 신분으로 황제 앞에 뻔뻔하게 얼굴을 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

    제르페누스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금세 꼬리를 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기꾼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알고 온 사람 같았다.

    "폐하께서는 절 사기꾼이라 여기시는 모양입니다."

    "다들 날 무능하다 평하지만, 내가 괜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거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다행이라고?"

    제르페누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폐하께서 눈먼 자가 아니라면, 저희들의 이야기도 빨라질 테니까요."

    "다른 꿍꿍이가 있나보군."

    "꿍꿍이라 할 것도 없죠. 제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였으니까요."

    복수. 제임스는 눈에 띄게 감정을 드러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복수하려는 거지?"

    "슈바르한 대공입니다."

    "슈바르한 대공?"

    "슈바르한 대공으로 인해 제 연인이 죽었습니다."

    거짓과 진실을 교묘하게 섞으면 진의를 구분하기 어렵다. 제임스는 펜리르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술술 불으며 이마를 짚었다. 만들어진 이야기임에도 막상 떠들고 나니 괜히 입안이 썼다.

    "대공의 손에 죽은 연인을 기리기 위한 복수라, 이런 일을 벌인 것치곤 훨씬 낭만적인 이유로군."

    제르페누스는 웃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제임스의 이야기를 빠르게 판단했다. 그가 슈바르한 출신의 화가였다는 것부터, 최근까지 슈바르한 성에 머물렀다는 것 등 제임스가 하는 이야기는 조사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딱히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은 없었다.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기에 이런 짓까지 벌인 것이죠. 제 연인은 죽었는데, 정작 자신은 행복해지려는 대공을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으니까요."

    "대공이 행복하다고?"

    카벨레누스와 행복은 어울려선 안 되는 단어인데. 제르페누스는 짐짓 뒤틀리는 속을 모른 체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실지는 모르나, 대공에겐 여자가 있습니다. 탕녀처럼 붉은 머리를 가진 여자죠."

    "누굴 말하는지 알 것 같군."

    "저는 그녀를 죽이고 싶습니다."

    제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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