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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14)화 (114/164)

114화. 아이의 기억

2021.04.05.

"네 이름을 지어줬다고?"

"엄마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비밀로 해야 한다고 했지만, 아저씨한테 말하는 건 괜찮다는 거 알아요. 아저씨는 내 편이잖아요."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벨레누스는 덩달아 미카엘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네 이름이 왜, 그런지 이제 좀 알 것 같네."

"내 이름이 어때서요?"

미카엘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책의 사인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저씨? 그래서 내 이름이 어떻냐니까요?"

"특별한 이름이지."

"특별해요? 뭐가요?"

"손 줘봐."

이번에도 원하는 대답 대신, 다른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미카엘은 말대꾸를 하기보다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미카엘의 손바닥 위로 글자를 썼다.

"네 이름 철자는 이렇게 쓰지?"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왠지 그럴 것 같았거든."

"에이, 그게 뭐예요."

블랑셰 제국은 대대로 전사들을 숭배해온 만큼 영웅들의 이름에서 성을 따는 경우가 흔했고, 특히 최초의 영웅 셉누스는 많은 성의 유래가 되었다. 누스라는 성만 해도 제국에서는 흔한 성 중 하나였다. 하지만 셉누스는 최초의 영웅이기 전에, 제국의 초대 황제였다. 황실은 셉누스의 이름을 쓰고 싶어했고, 그와 동시에 자신들만의 특별함도 원했다. 황족들의 이름에 들어가는 철자들이 기존 제국어와 다른 건 그 때문이었다. 카벨레누스는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이마를 짚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걸 받고 있었군."

"뭘 받았는데요?"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지."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미카엘에게, 그리고 알리시아에게 닿았다. 예전과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완전히 같진 않았다.

"……끝까지 지켜볼 거라고 했었지."

죽은 자에게 보답할 방법 같은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은 끝이었고, 슈바르한의 가장 높은 산에서 내려볼 거라는 유언도 의미 없었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유언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신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까. 이번에는 보란 듯이 완벽하게 지켜낼 테니까. 이미 떠나간 자가 바랐던 모습, 그대로.

"……."

알리시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 건, 그때였다.

"알리시아!"

귀신같이 알리시아의 변화를 눈치챈 카벨레누스가 반사적으로 침대로 불쑥 몸을 내밀었다. 우악스러운 사내의 손에 콱 눌린 침대가 일순간 출렁거렸다. 알리시아는 깨어나자마자 느낀 반동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각기 다른 색의 눈동자를 빤히 올려다봤다.

"엄마!"

"몸은 괜찮아? 아픈 곳은? 의사라도 부를까?"

"……."

"왜 말이 없어? 설마, 몸이 많이 안 좋은 거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이마를 짚었다. 알리시아는 떨리는 사내의 손에 입을 떼려다가 품에 푹 안겨 오는 작은 몸체에 숨을 뱉었다.

"……엄마, 많이 걱정했어?"

"엄마아아, 흐읍, 으아아아앙……!"

"엄마가 미안해."

알리시아는 미카엘을 끌어안고 다독이면서 카벨레누스를 향해 미소 지었다. 울지 않았을 뿐, 사내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마물이 성벽을 둘러싸고 있다고요?"

"그래. 그대는 성공했어."

카벨레누스는 옅은 미소와 함께, 흘러내린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말, 다행이에요. 꿈에서 마물들을 만나긴 했지만, 그건 정말로 꿈이잖아요. 깨고 나면 없던 일이 될까 봐 걱정했어요."

"그런 일은 없어."

"다행이네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카벨레누스는 급히 알리시아의 허리를 받치고 어깨를 끌어안아 그녀를 부축했다.

"무리하지 마. 그대는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마물들이 성벽을 둘러싸고 있다면서요. 이대로 둘 수 없어요. 다들 불안해할 거예요."

"마물 따위에 겁먹는 자들 병사로 키운 적 없어."

"마물과 더 해야 할 이야기도 있어요."

"……."

"무리하지 않을게요."

곧게 빛나는 눈을 이길 수 있는 건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결국 깊은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내가 직접 안고 가지."

"엄마, 나도 갈래!"

카벨레누스가 자신의 외투를 벗으려는 순간, 미카엘이 대뜸 소리쳤다.

"미카엘은 여기 있어."

"싫어!"

눈치 빠른 아이는 재빨리 엄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금방 돌아올 테니 너는 여기 있어."

"아저씨는 갈 거잖아요."

"나와 넌 다르지."

카벨레누스는 단호히 말을 자르며 외투를 벗어 알리시아의 어깨에 걸쳤다. 체격 차이 탓에 사내의 외투는 굳이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여자의 작은 몸을 금세 쏙 감춰버렸다.

"나는 더는 엄마랑 안 떨어질 거예요."

"미카엘."

낮게 울린 카벨레누스의 목소리에 미카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알리시아에게 매달린 아이의 팔은 떨어질 줄 몰랐다. 알리시아는 손을 살짝 들어 카벨레누스를 제지한 다음, 미카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이렇게 부탁해도 안 될까?"

"……."

"얌전히 있으면 맛있는 쿠키를 줄게."

"나는 이제 쿠키 싫어."

"엄마가 직접 구운 건데도?"

"나는 쿠키보다 엄마가 더 좋아!"

미카엘이 고집스럽게 두 눈을 치켜떴다.

"미카엘. 엄마, 이제 괜찮아."

"거짓말! 엄마는 나한테 맨날 괜찮다고만 하잖아!"

"미카엘……."

"이젠 내가 지킬래! 엄마가 안 쓰러지게 내가 계속 옆에 있을래! 내가 엄마를 지켜줄 거야!"

미카엘은 있는 힘껏 소리쳤지만, 정작 아이의 두 눈은 떨리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미카엘을 바라봤다. 어느샌가, 아이의 뺨에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굳이 엄마를 지켜주지 않아도 돼."

"왜? 내가 약해서? 아니면, 내가……."

미카엘의 두 눈에 한가득 눈물이 고였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엄마를 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 말이었다.

'절대 잊지 말렴. 네 엄마가 불행해지는 건 모두 너 때문이라는 걸.'

악의 섞인 말은 여전히 아이의 기억 속에 있었다.

"네가 어려서 그런 거지. 다른 이유는 없어."

알리시아의 손등 위로 카벨레누스의 손이 겹쳐졌다. 미카엘은 머리에 느껴지는 두 사람 몫의 무게에 숨을 삼켰다. 기억에 남은 건, 악의 섞인 말만이 아니었다.

"말했잖아. 지키는 건 내 몫이라고."

"……."

"어린애는 어린애답게 굴어. 그게 잘 어울려."

"나 안 어려요."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서 떼쓰면 애 맞아."

"……."

카벨레누스의 엄지가 미카엘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미카엘은 두 볼을 잔뜩 풀린 채 카벨레누스를 노려봤지만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미카엘은 입만 삐죽 내밀면서 알리시아의 품으로 폭 안겼다.

"나, 안 따라갈게. 대신 빨리 와야 해. 알았지?"

"응. 금방 돌아올게."

알리시아의 손이 젖은 미카엘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군다 해도 통통하게 젖살이 오른 뺨은 여전히 아이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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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심해."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카벨레누스는 단호히 말하며 외투를 고쳐 매줬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말리려다가 포기하고 그냥 웃었다. 바람 한 점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둘둘 말린 외투가 빤히 보임에도 사내의 눈은 연신 미처 찾지 못한 틈을 찾고 있었다.

"힘들다 싶으면 바로 말하고."

"네."

"마물이 혹시라도 무리한 요구를 하면 바로 거절하고."

"네."

"만약에 무슨-."

순간 카벨레누스의 걸음이 멈췄다. 귀를 찢는 듯한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위협하려는 게 아니에요. 반가워서 그러는 거예요."

"저게 반가워하는 거라고?"

"네. 반갑다고 말하고 있는 걸요."

알리시아의 대답에도 한 번 구겨진 카벨레누스의 미간은 퍼지지 않았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의 귀에 들리는 건 날뛰는 짐승처럼 거친 울음소리뿐이었다.

"저, 믿으시죠?"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군."

카벨레누스는 한숨과 함께 도로 걸음을 뗐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품에 안긴 채 저 멀리 보이는 마물 떼를 바라봤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점점 더 마물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티 난다.]

[그대 그릇 많이 깨졌다.]

[위험하다.]

"잠깐……!"

거리가 부쩍 좁아지면서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목소리가 커진 것도 모자라 한꺼번에 쏟아지는 무수한 목소리에 머리가 어질했다.

"괜찮나?"

"잠시 목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서 놀란 것뿐이에요. 괜찮아요."

알리시아가 가쁜 숨을 쉬자마자, 마물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알리시아는 심호흡을 하며 마물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마물들 역시, 알리시아의 반응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너희가 날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거 알아."

[우리 해치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우리 그대 편이다.]

마물들이 횡설수설하며 내뱉는 말에 다시금 머리가 울렸다. 알리시아는 마물들이 더 떠들기 전에 서둘러 입을 뗐다.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내가 알아듣기 너무 힘들어."

[힘드나?]

[인간 약하다.]

[우리 주의해야 한다.]

알리시아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금세 주변이 고요해졌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겨우 한숨을 돌리며 마물들을 바라봤다. 흉측한 몰골과 달리,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들은 순진무구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말이야. 괜찮다면, 너희들 중 한 명만 나와 대표로 이야기해줄래?"

[한 명?]

"으음, 그러니까…… 한 마리? 하나?"

알리시아는 외투에서 손을 빼 검지로 숫자 1을 표현했다. 마물이 숫자를 알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마물은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 하나. 내가 한다.]

마물 무리에서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개체들에 비해 몸집이 유독 큰 마물이었다.

"그리고, 널 제외한 다른 자들은 자리를 비켜줬으면 해."

[우리 싫나?]

"싫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때문에 그래. 거대한 너희들이 성벽을 둘러싸고 있으면 위협이 되거든."

[그것도 이해했다.]

마물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머지 마물들이 성벽에서 물러났다. 마치 잘 훈련된 군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지나치게 고분고분하군."

"저들에게 악의는 없거든요."

알리시아는 싱긋 웃으며 카벨레누스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 카벨레누스는 싫은 기색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반문 없이 알리시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알리시아는 빠르지 않은,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마물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맞지 않은 외투가 질질 끌리며 설원에 길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네."

알리시아가 먼저 가까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자리에 서 있던 마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에도 마물은 알리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꿈에서도 느꼈지만, 진짜 크네."

[그래서 싫은가?]

"올려다보기 힘들다는 것만 빼면 싫진 않아."

[그럼 줄인다. 그대 힘든 건 싫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물의 몸집이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끝없이 올려봐야 했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알리시아는 방금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눈만 껌벅거렸다.

"크기를 마음대로 줄일 수 있어?"

[정해진 건 없다. 원하면 그렇게 된다.]

"……그럼 혹시 겉모습도 바꿀 수 있어?"

[그대가 원하면.]

"그럼 왜, 지금껏 그런 모습으로 있었던 거야?"

마물이 사람들에게 배척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끔찍한 외형 탓이었다. 흉측한 외모는 위협적이었고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마물의 외형이 다른 모습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진짜 아니다.]

"진짜가 아니라고?"

[그대 잃었다. 그래서 우리 진짜 모습 잃었다.]

알리시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는 숨겨진 방에서 마물의 다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마물이 말하는 진짜 모습일 것이었다.

"그 이야기, 좀 더 들려줄 수 있을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문제 있다.]

"무슨 문제?"

[그대 그릇.]

"……."

[계속 깨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얼마 못 버틴다. 곧 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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