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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13)화 (113/164)
  • 113화. 신의 대리자

    2021.04.01.

    "감사합니다, 나리."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덜덜 떨며 손을 내밀었다. 두툼한 흰 눈썹 아래로 보이는 오래된 눈동자는 경외심으로 그득 차 있었다.

    "감사할 필요 없네."

    제임스는 손을 뻗어 노인의 손을 잡았다. 소매가 밀리면서 살짝 드러난 제임스의 손목에선 팔찌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리께서 어떤 일을 해주셨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저 목이 메는군요. 다행히 신께서 저희를 버리시진 않은 모양입니다."

    "물론, 프라임께서는 우리를 항상 지켜보시지."

    "아아……."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마녀의 결말은 정해져 있으니. 제임스는 마지막으로 싱긋 웃은 후, 노인의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힘없이 묶여 있는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붉은색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연상시키듯이. 제임스는 말없이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거칠게 몸을 돌렸다.

    "……도대체 이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제임스는 성큼성큼 앞서 나갔고, 옆에 서 있던 백색 후드를 깊게 눌러쓴 펜리르도 곧장 제임스의 뒤를 따랐다.

    "할 수 없죠. 슈바르한 대공과의 팽팽한 신경전 덕분에 황제 측의 경계가 심해졌으니까요. 계획을 살짝 수정할 필요가 있죠."

    "살짝 수정한 정도가 아니잖아."

    제임스의 목소리가 좀 더 격양되었다.

    "지금 섣불리 가짜 신분을 내세웠다가 걸려서 단두대로 가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그러면, 지금 이 상황은 괜찮다고?"

    "괜찮은 게 아니라, 훌륭하죠."

    "훌륭?"

    제임스의 이마 주름이 깊게 파였다.

    "현재 황제의 입장은 썩 좋지 않습니다. 다들 지금 황제가 진짜 황좌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로 수군거리는 걸요."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황제가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선 더는 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나는……."

    제임스는 입을 가린 채 말끝을 흐렸다. 펜리르가 요구한 대로 연기하고 있을 뿐이지, 자신은 진짜 신의 대리자가 아니었다.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구원자 노릇도 이제 그만 정리할 때도 되었으니까요."

    "정리라고?"

    "슬슬 황제를 뵈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펜리르는 손가락을 하나둘 접어가며 마녀사냥을 시작한 날을 샜다. 계획대로 알리시아와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재앙을 일으키던 마녀를 잡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 다음 계획으로 넘어갈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에게 접근할 방법이 있어?"

    "저희에겐 신의 대리자라는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진짜가 아니지 않잖아."

    "하지만, 사람들은 당신을 신의 대리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

    "황실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황제보다 마녀를 죽이고, 자신들의 손을 잡아준 구원자의 존재가 크게 느껴지는 거죠."

    펜리르는 연신 자신들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표하는 사람들을 보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자신이 로아킨인이라는 걸 밝혔을 때도 저들이 같은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장난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제 와서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저와 거래를 했고, 원하는 걸 얻으면 그만이잖습니까."

    "……."

    "게다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귀족보다는 신의 대리자 쪽이 훨씬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귀족이라는 이유로 당신을 깔보던 자들이 이제는 당신에게 허리를 굽히겠죠."

    저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펜리르의 손이 제임스의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인상을 썼다. 펜리르의 말은 툭 튀어나온 손과도 같았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욕망을 건드렸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무대는 제가 만들 테니, 당신은 그에 맞게 완벽하게 연기만 해주시면 됩니다."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야?"

    "없습니다."

    "……."

    제임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무능력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고 한들, 상대는 제국을 지배하는 황제였다. 오히려 태연한 펜리르의 반응이 이상한 것이었다.

    "그래도 불안하신가보군요."

    "……."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괜찮으실까요?"

    펜리르는 느긋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야기라고?"

    "저 마녀는 프라임 신전의 하수인입니다."

    "……교단이 마녀를 부린다고?"

    "정확히는 마녀가 아닌, 마법사입니다. 마법사를 접하기 어려운 평민들에게는 그저 재앙을 부르는 마녀로밖엔 보이지 않았겠지만요."

    일순간이나마 후드 아래로 녹색 눈동자가 슬쩍 엿보였다.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녹색 눈동자는 로아킨의 특징이었지만, 펜리르는 그 색이 유독 선명했다.

    "대대로 프라임 신전은 필요에 따라 재앙을 만들고, 없애왔습니다."

    "교단이 그런 끔찍한 일을 벌여왔다는 거야?"

    "슈바르한 대공은 그 사실을 알면서 감췄습니다. 황제가 되기 위해 신전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죠."

    "……."

    "신전과 손잡고, 자신의 여자를 희생시키는 만행까지 저지르면서 말입니다."

    펜리르는 후드를 깊게 눌러 쓰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펜리르의 입술이 삐딱해졌다.

    "괜히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프라임 신전이 저질러온 만행의 증거만 보여주더라도 황제는 저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거든요."

    "……."

    "무엇보다 황제 측에서 사람을 보냈고요."

    "사람을 보냈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폭풍은 잠시일 뿐, 폭풍이 지나가면 모든 것은 모래에 감춰지고 사람들은 그 위에 새로운 터전을 만드니까요."

    제임스는 가만히 펜리르를 바라봤다. 후드 아래 가려진 펜리르의 입술은 언제나 그렇듯 호선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 * *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알리시아는 쓰러져 쥐 죽은 듯 잠들어 있었지만, 무사히 깨어났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카벨레누스는 자꾸만 떠오르는 끔찍한 생각을 지우기 위해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렇지만 한 번 떠오른 상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일분일초가 흐를 때마다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엄마, 언제 일어나요?"

    "……."

    성벽을 둘러싼 마물들을 전부 죽이고 그녀를 살려내라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제 옷깃을 잡고 있는 아이 때문이었다. 카벨레누스는 눈 끝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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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카엘의 손은 알리시아의 것보다 한참 작고 여렸다. 아직 사내에게는 지켜야 하는 것이 남아 있었다.

    "괜찮을 거야."

    "……진짜요?"

    "그래."

    카벨레누스는 미카엘과 눈을 맞추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티 낼 수 없었다.

    "그럼 엄마는 언제 일어나요?"

    "금방 일어날 거야. 그러니 너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

    "네 엄마는 네가 이러고 있는 걸 더 안 좋아할걸."

    카벨레누스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미카엘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이내 카벨레누스의 품에 안겼다. 카벨레누스는 말없이 들썩거리는 아이의 등을 다독거렸다. 숨죽여 우는 아이가 알리시아를 닮아서 더 목이 멨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카벨레누스는 본능적으로 미카엘을 품 안으로 당기며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뭐지?'

    카벨레누스는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렉스예요."

    카벨레누스의 품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미카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렉스?"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미카엘이 바라보는 방향은 텅 비어 있었다.

    "렉스가 이쪽으로 왔어요."

    "왔다고?"

    "아저씨 옷을 당기고 있어요. 저쪽으로 가자는 것 같아요."

    미카엘이 검지로 창문을 가리켰다.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을 좀 더 단단히 끌어안은 채,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아직은 마물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창문을 코로 두드리고 있어요."

    "열라는 건가."

    카벨레누스는 낮게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창문을 열었다. 달칵-. 혹한의 추위를 막기 위해 단단히 물려 있던 걸쇠가 풀렸다. 카벨레누스는 밀려드는 추위에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마물들은 여전히 슈바르한의 성벽 주위를 빙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미카엘을 안은 카벨레누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감정에 불쾌할 지경이었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금색 눈들은 하나 같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왕을.

    "하……."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저들이 원하는 건 확실했지만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알리시아가 필요한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아저씨,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요."

    마물을 노려보는 카벨레누스가 답답했는지 미카엘이 재촉하듯 카벨레누스의 셔츠를 당겼다 아이가 가리킨 창틀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이건……."

    책 표지에 적힌 글자를 읽은 카벨레누스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알리시아가 쓰러진 시점에 이런 책을 가져온 마물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이제 렉스는 뭐 하고 있어."

    "사라졌어요."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아요."

    미카엘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카벨레누스는 주변을 천천히 훑은 후, 마물들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창문을 도로 닫았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마물이 가져온 책이 들려 있었다. 마물들이 알리시아의 편이라면, 적어도 그녀를 해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은 가리고 말고 할 때가 아니었다. 약간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잡아야했다.

    "그 책은 뭐예요?"

    "식물도감."

    카벨레누스는 대답하면서도 인상을 팍 썼다.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식물도감이요? 그게 뭐예요?"

    "식물의 종류나 특징을 적어놓은 책이지."

    카벨레누스는 순순히 답하며 책장을 넘겼다가 멈췄다. 책에는 그림 몇 장이 꽂혀 있었다.

    "예쁘다."

    미카엘이 중얼거리며 꽃 그림 한 장을 집었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처음 본 그림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이 그림들을 본 적이 있었다.

    "……."

    카벨레누스는 식물도감을 넘겨가며 그림 속 식물의 특징을 확인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그림 속 식물들은 전부 독초들이었다.

    "착각이 아니군. 그때 보고받았던 식물들이야."

    카벨레누스는 재빨리 책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확인했다. 책 안쪽 표지에는 익숙한 사인이 있었다.

    "으음, 뭐 하는 크라우드 뭐 부인께…….?"

    "친애하는 클라우드 백작 부인께라고 읽는 거야."

    "가제프 아저씨 물건인가봐요. 클라우드는 가제프 아저씨 성이잖아요."

    "가제프의 것이 아니야."

    카벨레누스는 날렵하게 그려진 사인을 엄지 끝으로 매만졌다. 클라우드 백작 부인은 가제프의 어머니이기 전에 모르코 부인의 쌍둥이 자매였다. 클라우드 백작 부인의 유품은 모르코 부인에게도 전해졌다.

    "아무래도 모르코 부인의 물건 같은데……."

    "모르코 부인이요?"

    미카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코 부인을 알아?"

    모르코 부인은 미카엘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 미카엘이 알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물음에 망설임없이 힘껏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알아요. 내 이름을 지어주신 분이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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